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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가 그렇게 좋은 아이가 아니라는것은 확실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가정환경이 안좋아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 스스로의 마인드를 경계하셔야 합니다. 제목에 그렇게 생각하시는것 처럼 드러나있어서 댓글 달고 갑니다. 전 운좋게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학할 기회도 있었고 그렇기에 미국까지 가서 꽤 괜찮은 대학교를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제 주변엔 서울대생들과 의사, 약사들이 넘쳐나기에 성장과정에서 주변 환경이 중요한것은 뼈저리게 공감합니다. 지금은 귀국후에 쉬면서 국제학교 학생들 대상으로 미국수학경시대회를 비롯한 수학, 과학 과목들을 가르치고 있어서 자연스레 아이들의 주변환경이 중요함을 다시한번 깨닫고 있는데, 제가 더 걱정되는것은 어머니들의 마인드입니다. 가정 환경이 안좋다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것이요. 전 여자친구가 있는데 어릴때 제 스스로는 상상도 못할만큼 안좋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밝고 씩씩하고 건강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변 친구들도 안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보이는데 예를들면 제 여자친구의 베프중 한 분은 어릴때 아버지가 집 나가시고,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가 있고 지적장애인 성인 오빠가 있으며 중학생 남동생도 있어서, 대학이란건 꿈에도 못꿔보고 18살부터 20대 중반인 현재까지 알바만 할수밖에 없었던 여성분입니다. 그런데 욕 한번 하지 않으며 삶에 대한 불평 한마디 없고, 오히려 제 여자친구에게 베풀어주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전 누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일말의 망설임없이 이 분이라고 할겁니다. 저도 나름 열심히 해서 현재 대치동에서 명문대 타이틀 걸고 시간당 15만원 이상 받아가며 영어로 수학, 과학을 가르치고 있지만 이 분에 비하면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아이의 행동을 통해 그 원인을 환경탓으로 돌리시면 안됩니다. 그 아이의 행동 자체만 보고 판단하셔야 합니다.

 

2020/03/27 14:46 2020/03/27 14:46

어릴때는 친구가 세상 전부인 시기가 있잖아요. 차별하지말란 교육도 교육이지만 내 아이에게 좋은 친구와 어울리게 해주고 그 안에서 예쁜 우정을 쌓아가게 하는것도 부모의 역할입니다. 그렇게 어울리다보면 자연스레 배우게되고 따라하게되고 물들어가는거죠. 무조건적으로 못놀게 하시는것보다 그 아이에 대한 자녀분의 생각을 물어보고 엄마의 생각을 전해보세요. 아직은 어리고 질풍노도의 시기는 아니니 부드럽게 잘 얘기하시면 알아들을거 같아요.


 

2020/03/27 14:45 2020/03/27 14:45

모태쏠로 전형적인 특징 입니다. 쌍방 소통이 안됩니다. 고치는거 거의 불가능 한데 만약 시도해 본다면 단호하고 지속적이게 잘못된점을 지적해줘야 합니다. 것도 본인이 문제점 인식이 있고 고치려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데 자칫 상대가 자길 너무 가르치려 든다고 생각하거나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식이면 그냥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다 받아 주게되면 결혼후 완전체 남편과 살게될 확률 높아요

2020/03/13 13:04 2020/03/13 13:04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게 저분이 착하고 센스도 있고 그런데, 남의 얘기를 못들어준다는건 주고받으며 공감을 하려는 능력이 조금 떨어지는거 같아서.. 어쩌면 상대방을 생각해서 슬리퍼를 가져왔다기보다 (상대방을 그렇게 배려하는 공감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말도 들어줄줄 알고 귀 기울이는 것에 대한 걸 이미 아는 사람 이었어야 하는게 맞는듯) 자기 자신의 젠틀한 행동이 글쓴이에게 플러스 요인이 되길 바라며 가져온 것 같은 느낌이 훨씬들구요.. 그게 나쁘다는건 아니고 어쨌든 그부분에 있어서는 센스가 있는건 확실하고 배려도 있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은 서로 대화가 잘 통할것 같긴해요 !! :) 음, 그런데 한편으로는 착하고 매너좋은거랑 감정적인 소통의 부분은 매우 달라서 ㅠ.. 글쓴이님이 사귀고 나서 조언은 해줄수 있고, 베플분 말대로 길들일수는(?) 있겠지만 정말 많은 힘든 과정이 될 것 같은 생각이에요 ㅋㅋㅋ 이건 단순한 한 사람의 습관을 고치는것의 문제만이 아닌듯요

2020/03/13 13:04 2020/03/13 13:04

그런말 입에 붙으신분들 가끔 계세요. 그냥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게 최곤것 같아요. 아 죄송해요^^ 이래저래 바빠서요ㅜㅜ 하시고 시어머니가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어쩌구저쩌구궁시렁궁시렁 그러면 네네 신경쓸게요~ 하고 절대 전화 안하면 그냥 포기하세요. 그냥 입버릇이구나 라고 생각하시고 흘려듣는게 최고예요. 뭐 어거지로 강요를 한다던가 화를 낸다던가 심해지면 또 모를까 그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네네^^ 하는게 최고에요! 그리고 신랑이라도 더 전화 자주 드리라고 할게요^^ 하고 신랑한테 다 넘겨버려요. 그거 며느리역할 아니에요. 아들역할이지.

2020/03/11 15:26 2020/03/11 15:26

저도 결혼초에 2주에 한번씩하다가 똑같은 소리듣고 간격더늘렸어요. 2달만에 한적도있죠.ㅋ 몆년지나도 저러실꺼에요. 전 5년됐는데 아직도 전화하면 첫마디가 목소리듣기굉장히 어렵네? 로시작해서 마무리는 전화좀자주해라! 이호통으로끝나요. 한귀로듣고 한귀로 흘려요. 저도 제사정도말하고 부탁도하고그랬는데 어머니가 먼저 제말을 한귀로 흘리시길래, 저도 똑같이 하는중입니다. 참고로 전 대학병원 3교대라 늘 정신없이 일하고, 요즘 코로나때문에 더힘든데도, 힘내라는 말은 일절없고 아직도 전화안한다고 삐져있어요. 며느리 사정따윈 개뿔 모르겠고, 남들한테 자랑할때만 좋은게 며느리죠 뭐.

2020/03/11 15:26 2020/03/11 15:26

딸한테 말해두세요 그거 얼마 안간다고 영어 그거 어릴때 몇년 다녀온거? 그런거 요즘 다들 가서 대단한거도 아니라는거 너가 영어 그렇게 할수있는거 다 엄마 할머니 아빠 덕분이라는거 그리고 영어...뽐낼수 있을때 맘껏 뽐내라고 하세요..제가 딱 따님분 나이대에 미국 다녀왔었거든요? 지금 잘하는것도 아니고 못하는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요. 지금이야 가족들 영어 못하니까 자기가 잘난 줄 알지만 곧 알수 있습니다 자기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걸^^ 제 부모님 저 영어 쓸때마다 저한테 계속 자기덕분에 너 영어 그정도라도 할줄 아는거라고 계속 강조하십니다! 할머니한테 그러는거 진짜 못되먹은거고 그건 혼나야 됩니다.

2020/03/10 09:35 2020/03/10 09:35

아이에게 화를 내지 말고 공을들여, 엄하게 훈육을 하시는게 좋겠습니다. 아이들은 배끼기의 달인이고 생존의 달인이에요. 한국에서 초3에 호주로 가 필시 얼마간이라도 놀림을 당하거나 자신이 모자라다는 불안을 느꼈을겁니다. 그럴때 초3은 나를 놀리는 저 아이들이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기보다 자신이 어서빨리 놀림을 받지 않는 위치에 닿고자 하는 욕망이 훨씬 큽니다. 그렇게 노력해서 자신이 주류에 속하고 나면 이전에 본인이 당한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주류가 향유하는 특권을 누리려고 하죠. 지금이 아이에게 그것이 도덕적 인간적으로 잘못된 일임을 깨우쳐줘야 하는 때입니다. 아이에 대한 이해와 공감없이 무턱대고 화를 내는 것은 아이의 반성이 아닌 반발을 살것입니다. 아이가 함께 산 외조부에 대해서도 같은 행동을 했는지 확인해 보시고 아니라면 낯선 친할머니가 외조부만큼이나 소중한 존재, 오래 계시지 않을 존재임을 알려주세요.

2020/03/10 09:35 2020/03/10 09:35

수술비용은 마련해뒀는지 물어보세요. ㅇㅇ이는 간까지 떼줬는데 넌 뭐냐 수술비내라 소리나올겁니다 2. 수술후 재활및 신체기능 떨어진 동생 케어 절대 안한다고 못박아두세요. 나는 바빠서 너 책임 못진다. 너까지 연 끊고싶지않으니 그런 부탁 할 생각마라 하세요 3. 수술 부작용 리스트뽑아주고 너도 성인이니 알아서 해라, 단 그것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네가 져야한다고 하세요

 

 

키노의 여행 10권 이익은 정의를 만들고 정의는 이익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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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Much is Your Justice?ㅡ 목차 컬러 애완동물의 나라 ㅡapPETiteㅡ 티의 소원 ㅡGet Real!ㅡ 프롤로그 어느 남자의 여행·b ㅡLife is a Journey, and Vice Versa·bㅡ 제1화 인터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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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ㅡOut of the Questionㅡ 제2화 허풍쟁이들의 이야기 ㅡFantasyㅡ 제3화 보호의 나라 ㅡMeritocracyㅡ 제4화 전봇대의 나라 ㅡTransmissionㅡ 제5화 이런 곳에 있는 나라 ㅡPrefaceㅡ 제6화 티의 하루 ㅡa Day in the Girl's Lifeㅡ 제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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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희가 있는 나라 ㅡUnsung Divasㅡ 에필로그 어느 남자의 여행·a ㅡLife is a Journey, and Vice Versa·aㅡ 컬러 애완동물의 나라 ㅡapPETiteㅡ 가을 어느 날 키노와 에르메스는 어느 나라에 도착했다. 그리 넓지 않은 성벽에 둘러싸인 평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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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땅에는 많은 고층 주택이 밀집되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키노는 입국하자마자 곧 그 나라의 주민들이 모두 동물을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를 끌고 걷는 사람, 고양이를 안고 다니는 사람, 앵무새 새장을 들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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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머리에 족제비를 얹고 있는 사람, 말을 타고 차도를 활보하는 사람. "애완동물인가봐." 에르메스가 말했다. "그러게…." 키노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키노는 에르메스를 타고 마을 안을 느긋하게 달렸다.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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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큰 거리 양옆에 줄지어 있는 것은 애완동물 관련 상품을 파는 가게, 동물 병원, 동물 미용실 등. 몹시 붐비고 있었다. 문지기가 소개해준 호텔에 들어가자 로비 안도 동물로 가득했다. 동물의 종류에 따른 화장실이 인간용 화장실보다 많았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국민 모두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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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동물을 기를 의무가 있습니다." 호텔 보이가 말했다. "의무?" "그렇습니다. 10세 이상의 건강한 사람은 모두 애완동물을 키워야 합니다. 학교와 가정에서 키우는 법도 가르쳐줍니다. 애완동물부에 등록되어 있는 종류라면 어떤 동물이든 키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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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에르메스가 물었다. "그야 한마디로 말하자면 마음이랄까요. 한 생명을 책임짐으로써 책임감과 사명감, 풍요롭고 따뜻한 마음을 키우는 것입니다." "한마디로ㅡ." 에르메스가 말했다. "'정조교육'?" "그렇습니다! 모토라도 씨, 박식하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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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가 기쁜 듯이 말했다. 키노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에르메스를 바라보았다.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채식주의자입니다. 누군가가 애완동물로 기르고 있는 동물을 먹을 수는 없으니까요." 보이가 덧붙였다. 다음날 키노와 에르메스는 나라 안을 여기저기 견학하며 돌아다녔다. 종류별로 많이 있는 애완동물 사육장과 애완동물 쇼. 애완동물 키우는 법 강습회와 애완동물을 잃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정신치료회. "감상은?" 에르메스가 물었다. "소문과 완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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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잖아…." 키노가 대답했다. "그러게. 또 속은 것 아니야, 키노?" "'또'라니 무슨 소리야?" 저녁 무렵 호텔로 돌아오자 남자들 몇 명이 키노와 에르메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들은 애완동물부의 관리라고 자기소개를 한 후 이 나라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우리나라에서 키노 씨께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뭐죠?" "입국 기념으로 키노 씨께 원하는 동물을 한 마리 드리겠습니다. 물론 무리라면 거절하셔도 좋습니다만 우리나라에 들렀던 기념으로 마음에 위안을 주는 귀여운 애완동물을 키워보시는 게 어떨까요? 내일까지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다음날, 입국한 지 3일째 되는 날 낮. 키노는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출국을 하기 위해 성문에 도착했다. 성문에 도착하자 키노가 어제 저녁 부탁했던 동물이 새장에 들어 있었다. 닭 한 마리였다. "감사합니다. 키우는 법은 어제 배웠습니다." 키노는 고맙다고 인사하며 새장을 받아들었다. "잘 키우십시오." 문지기와 관리가 입을 모아 말했다. 키노와 에르메스는 나라를 떠나 숲 속의 길을 느긋하게 달렸다. "소문대로야…." 키노가 말했다. "그러게. 정말이었네." 짐받이 위에 가방을, 그 위에 침낭과 새장을 실은 에르메스가 말했다. 그날 밤. 키노는 숲 속에서 야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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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잖아…." 키노가 대답했다. "그러게. 또 속은 것 아니야, 키노?" "'또'라니 무슨 소리야?" 저녁 무렵 호텔로 돌아오자 남자들 몇 명이 키노와 에르메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들은 애완동물부의 관리라고 자기소개를 한 후 이 나라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우리나라에서 키노 씨께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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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죠?" "입국 기념으로 키노 씨께 원하는 동물을 한 마리 드리겠습니다. 물론 무리라면 거절하셔도 좋습니다만 우리나라에 들렀던 기념으로 마음에 위안을 주는 귀여운 애완동물을 키워보시는 게 어떨까요? 내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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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해드리겠습니다." 다음날, 입국한 지 3일째 되는 날 낮. 키노는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출국을 하기 위해 성문에 도착했다. 성문에 도착하자 키노가 어제 저녁 부탁했던 동물이 새장에 들어 있었다. 닭 한 마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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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키우는 법은 어제 배웠습니다." 키노는 고맙다고 인사하며 새장을 받아들었다. "잘 키우십시오." 문지기와 관리가 입을 모아 말했다. 키노와 에르메스는 나라를 떠나 숲 속의 길을 느긋하게 달렸다. "소문대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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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가 말했다. "그러게. 정말이었네." 짐받이 위에 가방을, 그 위에 침낭과 새장을 실은 에르메스가 말했다. 그날 밤. 키노는 숲 속에서 야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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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는 호화로운 통닭 구이였다. "정말이었구나. 여행자에게 공짜로 음식을 주는 나라가 있다는 소문이." 키노가 통닭을 먹으며 말했다. 티의 소원 ㅡGet Real!ㅡ 내 이름은 리쿠. 개다. 언제나 즐겁게 웃는 듯한 얼굴을

백현동개인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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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지만 딱히 언제나 즐거워서 웃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태어날 때부터 이런 얼굴인 것이다. 나의 주인은 시즈 님이다. 언제나 초록색 스웨터를 입고 있는 청년인데 복잡한 사정으로 고향을 잃고 지금은 버기를 타고 여행 중이다. 또 한 명의 일행은 티.

용인개인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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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말이 없고 수류탄을 좋아하는 소녀인데 복잡한 사정으로 고향을 잃고 우리의 일행이 되었다. 우리는 여름풀이 흔들리는 초원지대를 지나 작은 나라에 입국했다. 나라 안에서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1년에 한 번 수확을 축하하는 국가적인 축제로 나라 안은 무척 떠들썩했다. 시즈 님은 이 나라로 이민을 할지 말지 고민할 동안 이 나라에 머물러도 좋은지 아닌지

풍덕천동개인회생

신봉동개인회생

허가를 받기 위해 관청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는 번화가를 걸었다. 커다란 벽돌 건물에는 사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몸통 부분에 잔뜩 붙여놓은 금속판이 마치 갑옷 같았다. 금속판 한 장 한 장에는 목탄으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죽전개인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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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물어보자 각자 소원을 적어서 붙여놓은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다. 축제 때 소원을 적어서 그림에 붙이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림을 올려다보자, 『회사 수입이 많아지기를.』

상현동개인회생

성복동개인회생

 

『올해도 농작물이 잘 자랐으면.』 『학교 성적이 올라가게 해주세요.』 같은 것부터, 『가족들 모두 건강하기를.』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기를.』

의정부개인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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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게 해주세요.』 등등 대체로 소박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인 소원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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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여행자님? 한 장 받으세요. 여기 소원을 쓰시면 됩니다." 한 사람이 말했다. 시즈 님은

용현동개인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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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에게 소원을 쓸 권리를 양보했다. 나는 시즈 님께 우리를 받아들여줄 나라를 발견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쓰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보다 행동이 중요하지." 시즈 님은 그렇게 말하며 나와 티를 그곳에 두고 이민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러 갔다

중랑구개인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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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친절한 사람과 만난 것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어쩌면 다정한 부모님이 자신의 딸을 걱정해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한 것은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제는 사실을 알 방도가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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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게도 키노 씨의 부모님은 수행 중 화재로 세상을 떠났다. 연락을 받은 키노 씨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깨끗하게 버렸다고 한다. "덕분에 멀리 떠날 결심이 섰어요. 스승님도 '이젠 괜찮다'고 말씀해주셨죠. 그래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자고 결심했어요. 열두 번째 생일로부터 3년이 지난 후였죠." 그리하여 키노 씨는 본격적으로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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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나라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여행의 일상이란 대체 어떨까? "평소 신경 쓰는 거요?

낙양동개인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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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는 겁니다(웃음). 이동 중에는 주로 휴대식량을 먹지만 먹을 수 있는 과일을 발견하면 당장 달려듭니다(웃음)." 역시 인간은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키노 씨도 당연한 일을 당연히 실천하고 있는 모양이다.

동대문개인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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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는 물고기를 자주 먹어요. 낚아서 구워 먹죠. 요즘같이 추운 계절에는 썩지 않아서 좋아요. 모토라도에 물고기를 매달고 달리다 새가 쪼아 먹을 뻔한 적도 있어요." 여행을 하는 동안 인간과 자연의 일체감을 느낀 적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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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대한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으면 여행을 떠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 이상으로 마음에 남았던 것은 여행 중에 만난 다른 여행자들입니다. 다들 친절한 분들이었죠. 제 나이가 어리다 보니 힘든 일은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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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것은 제대로 챙겨 먹는지 물어보곤 해요.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식량을 나눠주신 분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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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는 동료 의식을 소중히 여긴다. 동포들과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기에 같은 처지의 사람에게 친절해지는 것이다. 때때로 같은 국민들끼리 싸우기도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사실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는 마지막 질문에 키노 씨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여행을 계속할 거예요. 하지만 나중에는, 좀 더 나중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그럴 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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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면, 미래를 고민하는 아이들에게 여행에서 배운 것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그들이 꼭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좋아요. 그보다 나라 안에서 살아가며 그 지식을 활용해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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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없다. 키노 씨라면 틀림없이 꿈을 이룰 것이다. 키노 씨가 '선생님'이 될 날은 그리 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만약 선생님이 된다면 이렇게 자랑할 거예요. '선생님은 어느 나라에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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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 * * "안녕하세요, 키노 씨. 잘 부탁합니다." "네…, 저, 에르메스는 인터뷰를 하지 않을 건가요?" "네, 일단 여행자 키노 씨에게만 이야기를 들었으면 하는데요. 모토라도 에르메스 씨는 이번에는 아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에르메스, 잠시 입 다물고 있어." "알았어. 받을 건 받았으니 아무래도 좋아. 그럼 자고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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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까 끝나면 깨워줘." "응. 저, 그럼 시작하세요. 저도 사례로 이것저것 받은 이상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례 이야기는 기사에서 빼겠습니다, 아하하.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아무 보수 없이 인터뷰에 응해줬다고 쓸 겁니다. 일단 국영 신문이라서요."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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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인터뷰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자면 키노 씨께 여행에 대한 솔직한 얘기를 듣고 그것을 신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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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로 실을 겁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 출국하는 키노 씨는 그 기사를 읽으실 수 없겠지만…." "할 수 없죠.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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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좀처럼 보기 힘든 여행자에게 크나큰 동경을 품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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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싶어하죠."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도 되나요?" "네, 부탁합니다! 다들 여행자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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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모습을 알고 싶어할 겁니다. 대답은 전부 기사로 쓰겠습니다. 물론 '이것만은 도저히 대답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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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시면 확실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그럼 더 이상 묻지 않겠다고 약속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뻔한 질문입니다만

남해개인회생

산청개인회생

여행의 시작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언제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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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여행을 떠나려고 생각했는지,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는지." "음, 그러니까…, 전 열두 번째 생일까지, 태어난 나라에서 살았어요. 학교에 다니며 평범하게 생활했죠." "호오. 그럼 열두 살 때 여행을 떠난 겁니까?" "그런 셈이죠." "빠르군요. 놀랍습니다. 그럼 여행을 떠난 이유는?" "저…, 그 나라에서는 열두 살이 되면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고 해야 하나, 바꾸는 수술을 합니다." "'수술'…? 통과의례 같은 걸 형식상 그렇게 부르는 겁니까?" "네? 아뇨. 실제로 머리를 가르고 뇌 어딘가를 손본다고 들었어요. 그럼 불쾌한 일도 웃으며 할 수 있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 '제대로 된 어른'이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그래서 저도 당연히 그 수술을 받고 어른이 될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 직전에 만난 여행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 사실에 의문을 품게 됐습니다." "호오! 그 여행자의 영향으로 다른 나라를 둘러보려고 생각한 겁니까?" "아뇨. 당장 부모님께 달려가서 수술을 받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어리석은 생각이라며 굉장히 화를 내셔서ㅡ." "흐음, 혼나셨군요. 역시 관습을 거부하려면 용기가 필요하죠." "맞아요. 그래서 부모님을 거역하는 '쓰레기'라며 당장 죽이려고 하셨어요. 실제로 그 여행자는 저를 감싸다 눈앞에서 아버지의 칼에 찔려 죽었죠." "……." "나도 곧 죽을 거야, 뭐 할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쓰러져 있던 에르메스가ㅡ에르메스는 원래 고철이나 다름없던 걸 그 여행자가 고쳐서 타고 다니던 건데, 아무튼 제게 도망치자고 제안하더군요. 그래서 허둥지둥 에르메스를 타고 나라에서 도망쳤어요. 그러니까 나라를 떠난 건 제 의지가 아니라…, 단순히 죽지 않기 위한 결단이었을 뿐이에요." "……. 저…, 으음, 그건ㅡ, 확실히 중대한 결단이었군요…. 음. 그, 그후 이렇게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겁니까?" "네? 아뇨. 그후 할 수 없이 잠시 방황하다가 먹을 것을 찾지 못해서 숲 속에 쓰러져 죽을 뻔했어요. 그때 제가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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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나서 도움을 받았죠. 한동안 함께 살면서 사격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배웠어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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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그분이 친절하게 가르쳐주셨기에 지금 이렇게 여행을 할 수 있는 거군요." "뭐 그런 셈이죠. 자고 있으면 인정사정없이 고무탄을 쏘아대는 사람이었지만." "……. 그후 여행을?" "당장 여행을 떠난 건 아니에요. 그 사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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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옛날 여행을 다녔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긴 했지만." "그럼 그곳에서 뭔가 계기가 될 만한 일이 있었나보군요?" "네…, 그런 셈이죠. '그 일'을 겪은 후 저는 여행을 의식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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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습니다." "그렇군요. 그 일이란 뭔가요?" "음, 아까 말씀드렸죠. 태어난 나라에서 만났던, 저 때문에 눈 앞에서 죽은 여행자. 그의 어머니를 만났어요." "오오! 굉장한 일을 겪으셨군요." "네. 그는 저 때문에 죽은 셈이니까…, 계속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를 아는 사람과 만나면 사과하고 싶었어요. 그런 마음이 응어리처럼 남아 있었죠." "만나서 어떻게 됐나요?" "제가 그 사람 얘기를 했더니 그의 어머니는 가르쳐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렇군요. 그 어머니의 다정함에 감명을 받아서 자신을 다시 돌이켜보기 위해 여행을 떠난 건가요?" "아뇨. 그 직후 그녀는 제게 독을 먹인 다음 쓰러져 있는 제 목을 졸라서 죽이려고 했어요." "헉…?" "전 그녀를 총으로 쏴 죽였어요." "……." "스승님께 돌아간 후 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하지만 스승님께 여행 얘기를 듣다 보니 역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져서ㅡ." "그, 그렇군요. 그분과 상의를 했나보군요?" "아뇨. 상의를 했다가 안 된다고 하면 결심이 흔들릴 것 같아서 그냥 에르메스를 타고 떠났어요. 그때 허락 없이 가져온 물건이 꽤 많으니까 돌아가면 가만두지 않을걸요." "…그, 그렇습니까. 여행의 계기는 잘 알겠습니다. 음, 다음은 여행 중의 생활에 대해서 묻고 싶은데요…." "네." "나라와 나라 사이를 이동하는 동안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제일 신경 쓰는 것은 무엇입니까?" '먹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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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 "그렇군요, 식량 확보. 중요한 문제죠. 평소 어떤 것을 먹습니까?" "이동 중에는 주로 휴대식량을 먹지만 먹을 수 있는 동물을 발견하면 재빨리 쏴 죽인 다음 손질합니다. 보통 토끼나 새가 많죠. 숲 속에서 종종 마주치는 사슴은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아서 그냥 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새끼 사슴은 양이 적당한데다 고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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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고 맛있어서 새끼사슴만 죽이고 어미는 쫓아버립니다." "그, 그렇군요…. 바비큐로 드시나보죠." "네. 역시 고기를 먹으면 힘이 솟는 것 같아요." "그렇군요…." "요즘같이 추운 계절에는 고기가 썩지 않아서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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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에 사슴이나 멧돼지를 뒷다리만 싣고 달리기도 합니다. 에르메스는 싫어하지만. 이 경우 독수리의 공격에 주의할 필요가 있죠." "그렇군요…. 먹는 것 얘기는 일단 미뤄두고, 여행을 하면서 제일 힘든 점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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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험한 길, 악천후, 오랫동안 샤워를 할 수 없다는 점, 좀 전에 말씀드렸던 식사 문제,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은 많지만 제가 제일 성가시게 여기는 것은ㅡ." "여기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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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른 사람 말입니까?" "네." "여행 중에 만난 다른 사람들…. 제 생각엔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거나 여행 정보를 들을 수 있어서 편리할 것 같은데요." "네, 물론 그렇기도 하죠." "여행자들 간의 동료의식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만나는 사람의 절반 정도예요. 나머지 반은 위험하죠. 제 소지품을 빼앗으려고 하거나, 제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하거나…, 아무튼 난폭한 짓을 하려고 하죠. 그런 사람은 움직임이 어색하거나 묘하게 웃는 등 대충 알 수 있기 때문에 경계하곤 해요. 개중에는 제가 경계하는 것을 보고 순순히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습격당할 경우…, 키노 씨는 어떻게 하십니까?" "반격합니다." "…저, 구체적으로는?" "패스에이더를 겨눌 경우 겨누려는 순간 쏘기 때문에 대체로 죽이곤 하죠." "……. 주, 죽인단 말입니까?" "네. 패스에이더로 싸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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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적당히 봐주기란 굉장히 어렵거든요. 그리고 제 <캐논>은 구경이 큰데다 파괴력이 있는 탄환을 사용하기 때문에 팔다리를 쏴도 굉장히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보통 그대로 출혈사하죠." '하, 하지만…, 다짜고짜 쏴 죽이는 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안 그러면 제가 죽으니까요." "그, 그렇습니까…. 힘드시겠군요…. 저,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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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굳이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죽은 사람은 전혀 위험하지 않으니까요. 오로지 먹기만 하며 살아간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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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길에서 시체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여행자일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고." "그럴 때는 역시 그 사람의 성불을 빌며 정성껏 묻어주시곤 합니까?"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야생동물이 깨끗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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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어치울 테니까요." "……." "우리 여행자가 시체를 보고 제일 먼저 살펴보는 것은ㅡ." "네." "뭔가 쓸 만한 물건은 없나 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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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쓸모가 없으면 내버려두지만 가끔 귀금속이나 보석, 휴대 식량, 무기, 탄약, 그밖에 팔 만한 물건을 갖고 있을 경우가 있거든요." "그럴 경우…, 설마 유품을 가져가십니까…?" "네. 물론 부피가 큰 물건은 불가능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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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가 그 사람을 죽이고 빼앗았다는 오해를 받으면 곤란하니까 특징 있는 물건은 피하곤 합니다. 예를 들면 손에 끼고 있는 반지 같은 것 말이죠. 전에 시체를 발견하면 반드시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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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본 후 금니가 있으면 턱을 부수고 전부 뽑아낸 다음 녹여서 판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더군요." "……." "끝났어, 키노?" "끝났어."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제2화 허풍쟁이들의 이야기 ㅡFantasyㅡ 어느 나라, 어느 호텔 식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식당은 목조 건물 1층에 있었습니다. 바닥도 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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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자가 깔려 있었고 높은 천장에는 굵은 들보가 몇 개나 뻗어 있었습니다. 그 들보와 들보 사이, 또는 들보와 벽 사이에는 굵은 로프가 잔뜩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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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범선의 돛대처럼 수십 개나 드리워진 로프는 인간의 머리 높이로 느슨하게 늘어져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둥근 테이블이 20개 정도 놓여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의자가 놓여 있는 테이블에는 네 사람의 여행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오늘 이 나라에 도착한 여행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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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마차를 타고 여행하는 50대 아저씨. 한 사람은 커다란 사륜구동차를 타고 다니는 30대 누님. 한 사람은 그 누님과 친해져서 차를 얻어타고 온, 걸어서 여행중인 20대 청년. 마지막으로 모토라도를 타고 여행 중인, 머리가 짧고 허리에는 커다란 리볼버를 찬 1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소녀. 네 사람은 함께 식사를 마친 후 차를 마시며 여행자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습니다. 주위에 다른 손님은 없었습니다. 바 카운터에 있어야 할 바텐더의 모습도 지금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때였습니다. "여행자가 있다면서!" 이 나라 사람들이 커다란 목소리로 즐겁게 이야기하며 들어왔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30명 정도의 사람들이 테이블 주위에 모여 깜짝 놀라는 여행자들을 둘러쌌습니다. 여행자들이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후 이 나라 사람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행자님들, 여행자들은 종종 '나는 이런 나라에 가본 적이 있다'는 얘기를 하잖아요. 하지만 듣는 사람이 확인할 방도가 없으면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죠? 어때요, 우리에게 '그럴 경우 여행자들이 하는 거짓말'을 얘기해주지 않을래요? 상상력이 넘치는, 현실에는 있을 수 없는 신기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네 사람은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허풍을 들려주면 식사 값은 받지 않겠다는 얘기를 듣자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나는 예전에 이런 나라를 가본 적이 있지. 그 나라 사람들은 모두 엄청난 뚱보였어.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뚱뚱했지. 뚱뚱할수록 매력적이라며 매일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어대더군. 당연히 비만에서 비롯된 병이 속출하기 마련이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나. 그리고 드디어 걸을 수 없을 만큼 뚱뚱해지면 그 사람은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아 누군가가 죽을 때까지 시중을 들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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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체중은 300킬로그램 이상. 자신의 몸무게 때문에 뼈에서 살이 분리되어 움직일 수도 없지. 그 모습은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더군." 누님이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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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제일 깜짝 놀랐던 나라는 거기야. 아이가 태어나면 팔이나 다리 하나를 잘라버리는 풍습이 있는 나라. 팔다리가 양쪽 다 있으면 너무 완벽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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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서 아름답지 않다'며 하나를 싹둑 잘라버리는 거야. 그러기 위한 도구도 팔고 있지 뭐야. 그 나라 사람은 당연히 팔이나 다리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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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당연한 일이고 미의 기준이니까. 어딜 가든 '당신은 팔다리가 전부 있는 게 창피하지 않나요?' 라며 날 무시하지 뭐야. 그러다 내 팔이나 다리를 잘라버릴 것 같아서 도망쳤지." 청년이 말했습니다. "나도 정말 굉장한 나라에 가본 적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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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에는 '중년법'이라는 법이 있었지. 중년, 즉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성인이 범죄를 저지르면 놀랍게도 무죄라는 거야. 간단한 교정을 받을 뿐 교도소에는 들어가지 않아. '분별 있는 성인이 범죄를 저지르다니 어쩔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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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이유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게 이유라더군. 그 나라에서는 '무슨 일을 저지르려거든 중년이 될 때까지 기다려라'하는 것이 모토였지. 물론 대부분의 성인들은 평범하게 생활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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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엄청난 범죄가 발생하곤 해. 신변에 위험을 느껴서 얼른 떠났지." 소녀가 말했습니다. "전 나라 전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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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것을 봤습니다. 크기는 이 나라와 비슷했어요. 거대한 성벽 아래 캐터필러가 엄청 많이 달려서 계속 움직이고 있었죠. 사람들은 그걸 타고 생활하며 느긋하게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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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 나라에 타고 있을 때였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그 나라가 지나가는 것을 막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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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움직이는 나라는 강력한 레이저로 그 나라의 성벽을 종잇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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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우고 아무리 강력한 미사일 공격도 튕겨내며 눈 깜짝할 사이에 그곳을 통과했어요. 지금도 그 나라는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겁니다." 네 사람의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사람들은 무척 재미있어했습니다. "말도 안 돼"라고 놀라며 즐거워했습니다. 굉장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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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한 눈치였습니다. 그들은 역시 여행자들이라고 감격하며 식사 값은 자신들이 지불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돌아가야겠다는 말을 남기고ㅡ. 모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제히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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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사람은 식탁에 덩그러니 남겨졌습니다. 갑자기 조용해진 식당에서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자네들ㅡ, 거짓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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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내는 게 귀찮아서 그냥 실제로 가봤던 나라 얘기를 했지?"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아저씨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음, 나도 마찬가지야." 아저씨는 순순히 자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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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지만…, 물론 자네들 얘기도 놀랍지만…."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귀성형 통해 소이증, 귀가 기형인 환자에게 제2의 삶 선물
그리고 넷이서 허공에 늘어져 있는 로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이 나라도 정말 굉장하군…." 아저씨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세 사람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사람은 로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식당에 있던 이 나라 사람들이 모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로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바 카운터에는 바텐더가 로프에 무릎을 걸고 거꾸로 매달려 있었습니다. "한 잔 더 드릴까요?" 바텐더가 거꾸로 매달린 채 유리잔을 닦으며 물었습니다. 제3화 보호의 나라 ㅡMeritocracyㅡ 작은 자동차가 여름 초원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사방이 탁 트인 평평한 초원이었습니다. 풀꽃이 즐거운 듯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나무는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습니다. 하늘에는 석양을 코앞에 둔 태양이 빛나고 군데군데 떠 있는 구름은 선명한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자동차는 작고 노랗고 여기저기가 망가져 있었습니다.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배기관이 울퉁불퉁한 흙길에 맞춰 당장이라도 떨어져나갈 것처럼 정신없이 흔들렸습니다. 사이드미러는 온통 금이 가 있었고 보닛 구석은 녹슬어서 떨어져나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자동차는 광활한 초원을 열심히 달리고 있었습니다. 여름이라 기온은 나름대로 높았지만 습도가 낮아서 제법 쾌적한 곳이었습니다.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자도, 왼쪽 조수석에 앉아 있는 여자도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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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에 셔츠 깃을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조금 키가 작고 잘생긴 남자가 한 손으로 핸들을 쥐며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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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쉬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입국하면 쉬는 게 어떨까요." 스승님이라고 불린 긴 검은 머리의 여자는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되물었습니다. "쉬다뇨?" "말 그대로 쉬자는 뜻입니다. 나라에 머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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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만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하지 않고 느긋하게 지냈으면 해서요. 상인에게서 빼앗은 보석이 있으니 당분간 식비는 걱정 없습니다." 여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딱히 반대하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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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싶어서요." 남자가 그렇게 말한 순간 지평선 너머에서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는 비틀거리며 성벽으로 다가갔습니다. 길 좌우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남자는 더욱 속도를 늦췄습니다. 초원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동물이었습니다. 길이는 16센티미터 정도. 얼핏 보기에는 펭귄처럼 걸어다니는 새 같았지만 원숭이처럼 두 팔이 달려 있었습니다. 색은 갈색과 크림색 얼룩무늬. 온몸에 고양이 같은 털이 돋아 있었고 개처럼 복슬복슬한 꼬리가 달려 있었습니다. 얼굴에는 새끼 곰처럼 동그란 눈과 작은 코가 붙어 있었습니다. "호오, 저런 동물은 처음 보네요." 남자가 말했습니다. 여자도 아무 말 없이 초원에 얼굴을 내민 동물을 바라보았습니다. 30마리 정도의 동물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는 성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두 사람이 입국한 곳은 넓지도 좁지도 않고 농업이 주산업인, 주위에 분쟁이 일어날 만한 나라도 없는 한적한 나라였습니다. 입국을 허가받은 두 사람은 재빨리 보석을 팔아치우고 제법 호화로운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오랜만에 샤워를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은 두 사람은 나름대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다음날 두 사람이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드문드문 손님이 보이는 레스토랑에 동물이 들어왔습니다. 나라 밖에서 봤던 동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색깔은 조금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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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그렇게 말하며 접시로 손을 뻗었습니다. "큐?" 즐거운 듯이 슈크림을 움켜잡기 직전 동물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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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 동물은 시선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테이블에서 뛰어내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테이블로 달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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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 아직 꽤 많이 남아 있는 그 손님의 핫케이크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는 커다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체념한 듯이 식사를 도중에 그만두고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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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셨지요. 이 나라에서는 저 동물에게 손을 댈 수조차 없습니다. 만에 하나 상처를 입히기라도 하면 여행자라 해도 징역 5년 정도는 선고받을 겁니다. 죽이기라도 했다가는 종신형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세상에." 남자는 어이없어하며 중얼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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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물이 먹어치운 슈크림을 한 접시 추가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다 떨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웨이터는 머리를 숙이며 사과한 후 다른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슈크림을 먹고 있는 여자에게 반만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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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요." 매정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후 두 사람은 산책을 하며 나라 안을 둘러보았습니다. "횡포가 대단하군요." 남자의 감상대로 나라 안 곳곳에서는 그 동물이 인간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 오만방자하게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무리를 지어 도로를 가로질러서 차와 마차를 멈추게 하고, 벽을 타고 올라가서 빨래를 떨어뜨리고, 가게 앞의 과일을 먹어치우고, 깨끗하게 닦은 테이블에 발자국을 찍고, 아무 데나 오줌을 갈기고, 먹지도 않을 농작물을 엉망으로 만들어 던지며 놀곤 했습니다. 그 수는 결코 많지는 않았지만 희소하다고 할 만큼 적지도 않았습니다. 간간이 눈에 띄는 정도였습니다. 나라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요즘 번식에 성공했는지 갑자기 수가 늘었다고 합니다. 걷고 있는 두 사람에게도 몇 마리가 다가왔습니다. "무슨 일이죠?" 그러나 여자가 그렇게 말하며 눈을 마주치자 다른 곳으로 가 버렸습니다. 동물들은 도로 반대편에서 걷고 있던 어린 소녀에게 눈독을 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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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캬캬!" "큐큐큐!" "큐큐큐큐큐!" 동물들이 즐거운 듯이 떠들며 짓밟고 있는 것은 높은 곳에 걸려 있던 호텔주인의 부모님 사진이었습니다. 동물들은 액자를 밟아서 깨뜨리고, 사진을 짓밟고, 침과 똥으로 사진을 더럽혔습니다. "……." 주인은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아서 소중한 사진이 짓밟히는 것을 그저 멍하니 지켜보았습니다. "무슨 수로?"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진이 걸려 있던 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에는 긴 막대기 세 개가 걸쳐 있었습니다. "저런…." 로비에 있던 여종업원이 동물들이 저 막대기를 들고 와서 벽에 걸친 다음 타고 올라가서 사진을 떨어뜨렸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캬캬캬캬!" "큐큐큐!" "캬!" 즐거운 듯이 사진을 엉망으로 짓밟는 동물들. "아아…."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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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의 손님들은 속수무책으로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캬캬?" 동물 한 마리가 더러운 발로 손님들에게 다가왔습니다. 손님들은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다들 분한 듯이 이를 갈면서도 손을 대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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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의 왕이로군." 남자가 중얼거렸습니다. 이윽고 동물이 여자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필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캬캬캬!" 동물은 그렇게 외치며 몇 번인가 폴짝폴짝 뛰어오른 후 동료들이 있는 사진 위로 돌아갔습니다. "캬캬!" "큐큐!" "캬캬캬!" 동물들은 이미 원형을 알아볼 수 없는 사진을 발로 갈기갈기 찢었습니다.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습니다. 즐거워 보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타앙. 무시무시한 굉음이 로비를 뒤흔들었습니다. 로비에 잇던 사람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뛸 듯이 놀랐습니다. 동물들도 한 마리를 제외하고 모두 뛸 듯이 놀랐습니다. 한 사람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리볼버를 허리 높이로 겨누고 있는 여자였습니다. 한 마리는 그 탄환에 가슴을 맞고 몇 미터 뒤로 날아가서 바닥에 쓰러진 채 피를 뿜으며 미동조차 하지 않는, 조금 전 여자를 실컷 우롱했던 동물이었습니다. "저런." 남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왼손으로 가느다란 자동식 핸드 패스에이더를 뽑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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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큐큐?" 그리고 그대로 레이저사이트를 켰습니다. 붉은 빛은 동그란 눈과 눈 사이에 정확하게 멎었습니다. 탕. 조금 전보다 훨씬 조용한 발포음과 함께 한 마리가 뒤로 쓰러졌습니다. 넋이 나가 있는 손님들 앞에서,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 앞에서. "죄송해요. 패스에이더가 폭발했어요." 여자가 말했습니다. 남자도 패스에이더를 홀스터에 꽂으며 말했습니다. "제 것도. 음, 아무에게도 맞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여, 여행자님들…. 이런 엄청난 짓을…." "네? 무슨 말씀이죠?" "무슨 말이냐니…. 당신, 보호동물을 죽였잖아…. 이건 중죄야…." "동물?"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갸웃거린 후 죽은 두 마리와 멍하니 서 있는 한 마리를 바라보았습니다. "동물이라니 어디요?" 지극히 태연한 대답이었습니다. 웅성. 손님들의 웅성거림이 전해졌습니다. "어디에 동물이 있다는 거죠?" 여자가 담담한 어조로 다시 한 번 말했습니다. "아아. 그래…." 주인이 비틀거리며 일어섰습니다. "큐?" "손님 여러분…. 동물 따윈 아무데도 없잖습니까…." "큐우우…." 자리에서 일어선 주인은 눈물을 닦은 후 옆에 놓여 있던 튼튼해 보이는 의자를 들어올렸습니다. "죽어버려!" 그리고 남은 한 마리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습니다. "캬ㅡ." 작은 비명과 함께 뼈가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로부터 한동안 주인은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된 사진 앞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여행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고 여자는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세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어쩌지? 경찰을 불러야 하나? 그런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아무도 먼저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로비가 장례식장처럼 조용해졌을 때. "큐우?" 문이 열리고 얼핏 봐도 한 다스 이상의 동물들이 로비로 들어왔습니다. "큐큐!" "캬아!" "큐우!" "캬오오오오!" "캬아!" 동료의 시체를 본 동물들은 그렇게 외치며 인간들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타앙. 탕. 탕탕. 탕탕탕. 여행자 여자와 남자가 정밀한 기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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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에이더를 쐈습니다. 여자가 재빨리 탄창을 교환하는 동안에는 남자가 원호를, 남자가 탄창을 교환하는 동안에는 여자가 원호를 했습니다. 로비 안에 총성이 울려 퍼지고 모두가 귀울음에 시달렸습니다. 어느덧 로비 안에 움직이는 동물은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멍하니 서 있는 가운데. "어디에 동물이 있다는 거죠?" 여자가 말했습니다. "그, 그래!" 손님들 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동물은 반드시 보호해야 하지만 동물 따윈 아무 데도 없잖아!" "그래, 맞아! 이 나라에 동물 따윈 없어!" "없는 걸 무슨 수로 지키겠어!" 마치 스위치라도 누른 것처럼 모두가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라 안은 일찍이 없었던 소란한 하루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나라 안 곳곳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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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봤나?" "아니, 못 봤는데." 라는 인사가 오갔습니다. 호텔에서 시작된 파문은 점점 널리 확산되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손에 막대기나 농기구를 들고, "캬오! 큐우ㅡ." 눈에 보이는 동물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죽였습니다. 처음에는 경찰들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지만 모든 국민들이 들고일어나자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든지 아니면 보고도 못 본 척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당했습니다. "동물은… 없지 않나? 순경." "네…. 없습니다, 경감님." 그리고 결국 이런 대화를 나누기에 이르렀습니다. "캬오오오!" 하루 종일 나라 전체에서 노성과 비명이 울려 퍼졌습니다. 여행자 여자와 남자의 패스에이더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폭발하기를 되풀이했습니다. 탄환이 떨어지면 가게 사람들이 공짜로 나눠줬습니다. 그리고 저녁. 주인에게서 극진한 감사와 배웅을 받으며 노랗고 작은 자동차는 성문으로 달려갔습니다. 성문의 문지기들은 언제든지 또 오라며 고마워했습니다. 차는 활짝 열린 성문을 지나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큐우ㅡ!" 수풀에 숨어 있던 동물 한 마리가 자동차 지붕 위로 뛰어올랐습니다. "앗! 저 녀석! ㅡ안 보이지만!" 문지기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자동차 지붕 위로 휘두르려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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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됐어요. 이미 나라 밖으로 나왔으니까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문지기를 말렸습니다. 그때 자동차는 성벽을 지나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하긴 나라 밖이니까…, 조심해서 가십시오." 문지기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성문을 지키러 돌아갔습니다. "스승님?" 운전석의 남자가 지붕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떨고 있는 동물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큐우우우…." 여자는 잠시 그냥 달리라고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작은 자동차는 여자의 말대로 초원을 달렸습니다. 그리고 멈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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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차에서 내려 지붕에 있는 동물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이제 내리세요." "큐우우우우!" "데려갈 수는 없어요." "큐우우우?" "안 돼요." 여자가 노려보자 동물은 마지못해 자동차 지붕에서 뛰어내렸습니다. "큐우우우…." "당신들은 조금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군요." "큐우?"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 나라에서 정말로 힘이 있었던 건 그 나라 사람들입니다. 당신들이 아니에요." "큐우…." "자,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세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초원을 가리켰습니다. 동물은 여자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동물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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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과 크기가 조금 다른 20마리 정도의 크고 작은 동물들이 초원에서 얼굴을 내밀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큐우우우…." "안녕."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차에 올라탄 후 운전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습니다. "안녕."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차를 출발시켰습니다. 차는 비틀거리며 초원의 길을 달렸습니다. "의외로 상냥한 면도 있었군요, 스승님. 전 당장 때려죽일 줄 알았습니다." "아뇨, 아뇨." 여자는 부정하는 말을 두 번이나 되풀이했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스승님?" 왼쪽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자 여자는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나는 상냥하지 않아요. 그저 당장 죽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노란 자동차가 석양 속으로 사라진 후. "큐우우우!" 남겨진 동물 한 마리는 그렇게 말하며 무리를 바라보았습니다. "쿠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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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쿠구구." "쿠오오오." "쿠오오!" 무리들은 위압적인 태도로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큐우…." 한 마리는 조금 뒤로 물러섰습니다. 이윽고 무리의 보스인 듯한 한 마리가 그 한 마리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큐우큐우?" "큐우우! 큐우큐우큐우우우!" "큐우. 큐우큐큐큐." 보스는 그렇게 말하며 무리를 돌아보았습니다. "쿠오쿠오!" 그리고 짧고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무리들이 몸을 움츠렸습니다. "큐우큐우." 보스가 그 한 마리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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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흔들어 그 한 마리를 불렀습니다. "큐! 큐우ㅡ." 그 한 마리는 기쁜 듯이 그렇게 말하며 무리에게 다가갔습니다. 무리는 넓게 퍼져서 그 한 마리를 맞이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쿠오!" 보스가 그렇게 외친 순간 모두 일제히 그 한 마리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캬아ㅡ! 캬아아아!" 비명을 질러도 아랑곳없이 때리기를 계속했습니다. 이윽고 초원에 적막이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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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전봇대의 나라 ㅡTransmissionㅡ 키노와 에르메스는 어느 작은 나라에 있었습니다. 나라가 작고 평평해서 어디에서도 성벽 안쪽이 보였습니다. 밭과 집이 교대로 보이는 한가로운 풍경의 한가로운 나라였습니다. 따뜻한 햇살 아래 키노는 에르메스를 느긋하게 몰며 나라를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오, 여행자님, 안녕하세요. 바쁘지 않으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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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서 가족들과 차와 과자를 드시지 않겠습니까?" 길을 걷던 사람이 말을 건넸습니다. 키노는 그의 초대에 응하기로 했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키노는 에르메스를 밀며 그를 따라 걸었습니다. 넓은 자갈길에서 마당으로 들어서려 할 때였습니다. "아, 그 앞은 위험합니다." 그가 주의를 줬습니다. 키노는 걸음을 멈추고 앞을 살펴보았습니다. 바닥 바로 앞에 굵은 선이 뻗어 있었습니다. 선은 집 안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뭐죠?" 키노가 물었습니다. "전선입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집들을 연결하기 위해 쳐놓은 전선이라고 그는 설명했습니다. "닿으면 감전돼서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위험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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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심하면 괜찮습니다. 전선 앞쪽을 보십시오." 키노와 에르메스는 전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습니다. 전선 앞쪽에는 기둥이 서 있었습니다. 높은 기둥이었습니다. 끝은 뾰족했습니다. 전선을 따라 반대편으로 시선을 옮기자 그곳에도 기둥이 서 있었습니다. 기둥은 돌로 만든 튼튼한 토대 위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집 근처에서 이 기둥을 종종 봤는데." 에르메스가 말했습니다. 키노가 이 기둥은 뭐냐고 물었습니다. "전봇대입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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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 "네, 그렇습니다. 실은 몇 년 전에 당신 같은 여행자가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 여행자에게 바닥에 전선이 깔려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럼 전봇대를 세우는 게 어떨까요. 전선과 전선 사이에.' 아주 멋진 생각이었죠. 우리는 즉시 전선과 전선 사이에 기둥을 세웠습니다. 기둥을 보면 어디에 전선이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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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아래를 살펴보지 않아도 '아, 전봇대가 있으니까 전선이 있겠구나'라고 알 수 있죠. 감전되는 사람이 많이 줄었습니다." 키노와 에르메스가 출국한 지 며칠이 지난 후였습니다. "아…, 아차!" 키노를 초대했던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우리에겐 벌레가 소중한 신앙의 대상이라 날벌레를 먹는 새를 싫어한다는 걸, 그래서 새가 앉지 못하게 전선을 높이 치지 않고 농지 외에는 땅을 파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바닥에 깔아둔 거라는 걸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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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야. 그게 뭐 어쨌다고?" "그 말을 하는 걸 깜빡했어! 얼마 전에 왔던 여행자와 모토라도에게! 전봇대 얘기를 듣고 분명히 우리를 바보라고 생각했을 거야! 멍청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뭐 어때. 어차피 여행자인데. 우리나라에 또 올지 안 올지도 모르잖아. 오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아." "그럼 정정할 기회가 없는 거잖아! 다른 나라에 가서 우릴 바보 멍청이라고 얘기하면 어떻게 하지?" "신경 쓰지 마. 우리도 다른 나라는 고사하고 그 여행자에 대해서도 전부 아는 건 아니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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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지만…." "신경 쓰지 마. 자, 기도 시간이다. 위대한 벌레님, 부디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소서." 제5화 이런 곳에 있는 나라 ㅡPrefaceㅡ "키노, 이런 곳에 정말 나라가 있긴 한 거야?" 에르메스가 길을 달리며 키노에게 물었다. "글쎄…." 키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에르메스와 키노가 있는 곳은 하얀 사막이었다. 눈에 보이는 범위 안에는 온통 단단하게 굳은 하얀 흙이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져 있었다. 하늘은 하얀 구름으로 빈틈없이 뒤덮여 있었다. 하얀 하늘과 하얀 대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은 하늘과 대지의 경계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서 모토라도 한 대가 덩그러니 달리고 있었다. 키노는 노란 렌즈의 고글을 쓰고 얼굴에는 밴대나를 감고 있었다. 긴 갈색 코트를 입고 긴 자락은 허벅지에 감아 고정시키고 있었다. "'글쎄'라니." "실은 나도 왜 이런 곳을 달리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이상해." "역시. 뭐 여긴 껌 플러스니까." "……. 혹시 '카무플라주'?" "그래, 그거! 용케 알았네." "이봐…. 그러니까 '위장'이란 말이지? 어째서? 무엇 때문에?" "좀 더 달리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에르메스가 말했다. 키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에르메스를 몰았다. 풍경이 너무나 변함없어서 정말로 움직이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런 공간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낸 후. "아…." 키노는 그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커다란 간판이었다. 간판은 하얀 사막 속에 반쯤 파묻혀서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적혀 있는 커다란 문자ㅡ. 키노는 간판 앞에서 에르메스를 멈췄다. 사이드스탠드를 세우고 에르메스에서 내린 후 비틀거리며 간판으로 걸어갔다. "아아…." 이윽고 키노는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0권 후기·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잘 부탁합니다.』 이럴 수가. 키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장갑을 낀 주먹으로 하얀 대지를 내리쳤다. "'여긴 후기였단 말이지! 빌어먹을 작가 녀석, 잘도 이런 짓을!'" 그 뒤에서 에르메스가 키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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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본문 중간에 다짜고짜 '후기'ㅡ독자들이 보내준 수많은 예상 범위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이것도 하나의 형태라고 할 수 있지." "캐릭터에게 이런 짓을 시키다니! 앞 권에서도 이래놓고!" 키노가 화를 내건 말건 후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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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된다. 그런고로 후기입니다. 늘 그랬듯이 내용에 대한 얘기는 없습니다. 이 뒤를 읽기 전에 읽어도 괜찮습니다. 키노도 드디어 10권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시리즈 열 권째라고 해도 2000년 7월 1권이 발매된 후로 6년이 흘렀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읽기 시작한 사람은 지금 고3입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제게도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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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경험과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값진 6년간이었습니다. 도중에 「키노의 여행」이 드라마CD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TV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TV 게임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엔터테인먼트 매거진' 이벤트에서 사인회를 하기도 하고, 타이완에서 사인회를 하기도 하고, 게임 2탄이 발매되기도 하고ㅡ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원래 제6회 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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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소설 대상 응모작이었던 이 작품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독자 여러분의 성원 덕분입니다. 이렇게 10권을 맞이하여 거듭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안타깝게도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해드리게 됐습니다. 이제 키노 시리즈도 소재가 바닥났습니다. 이번에도 필사적으로 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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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틀렸습니다. 더 이상 생각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후기가! 2006년 10월 내일을 꿈꾸는 후기 작가 시구사와 케이이치 추신·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제6화 티의 하루 ㅡa Day in the Girl's Lifeㅡ 내 이름은 리쿠. 개다. 나는 하얗고 길고 복슬복슬한 털을 갖고 있다. 언제나 즐겁게 웃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딱히 언제나 즐거워서 웃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태어날 때부터 이런 얼굴인 것뿐이다. 나의 주인은 시즈 님이다. 언제나 초록색 스웨터를 입고 있는 청년인데 복잡한 사정으로 고향을 잃고 지금은 버기를 타고 여행 중이다. "그럼 부탁한다." 시즈 님은 오늘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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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 해가 뜨기 전에 그 말을 남기고 외출했다. 얼마 전에 입국한 나라. 너무 시끄럽고 치안도 엉망이라 이주는 포기했지만 시즈 님은 꽤 짭짤한 일거리가 들어왔다며 돈을 벌기 위해 나갔다. 무슨 일인지는 듣지 못했지만 정성껏 손질한 칼을 들고 나간 것을 보면 그다지 건전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묻지 않았다. 그보다 문제는 아직 침대에 엎드려서 자고 있는 하얀 머리의 소녀 티파나, 티다. 그녀는 이 대륙으로 건너오는 도중 이런저런 사정으로 우리의 일행이 되었다. "부탁한다." 부탁을 받긴 했지만 솔직히 마음이 무거웠다. 오늘은 하루 종일 나와 티 둘뿐이다. 평소에는 시즈 님이 대화를 이끌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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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좋을까. 이곳은 싸구려 호텔. 시내에서 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낡고 오래된 건물의 한 방이다. 좁은 방은 여기저기 벽지가 벗겨져 있었고 어제 들어왔을 때에는 온통 거미줄투성이였다. 나란히 놓여 있는 두 개의 침대는 매트리스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지금 티는 빈말로라도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이불 위에 자신의 침낭을 깔고 그 위에서 자고 있었다. 늘 입고 있는 회색 반바지 아래로 막대기 같은 두 다리가 뻗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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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는 갈색 긴소매 라운드 셔츠. 다른 셔츠도 있건만 티는 잠잘 때도 깨어 있을 때도 기온이 허락하는 한 이 셔츠만 입곤 한다. 시간이 흘러 아침과 점심의 중간쯤에 접어들었다. 이대로 계속 밤까지 잠들어 있으면 얼마나 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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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한 순간 티가 눈을 떴다. "……." 티는 아무 말 없이 팔로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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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신이 10센티미터 정도 침낭에서 떨어졌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뒤덮인 머리가 요새의 포탑처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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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즉 침대 옆에 엎드려 쉬고 있던 나를 향했다. 잠이 덜 깬 것인지 평소의 버릇인지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에메랄드그린의 눈동자가 4초간 나를 바라보았다. "……."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 옆에 앉았다. 그리고 티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 "저, 시즈 님은 돈을 벌러 나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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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그거야? 그것도 아침에." 모토라도가 투덜거렸다.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잖아." "아…, 그렇지…." 제7화 가희가 있는 나라 ㅡUnsung Divasㅡ 단풍에 물든 숲이 있는 나라가 있었다. 나라 밖에도 안에도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물든 무성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하얗고 높은 성벽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나라를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성벽이 그리는 원이 너무나도 커서 반대편 성벽은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아 보이지 않았다. 나라 밖에는 멀리 보이는 산까지 숲이 이어져 있었다. 나라 안에는 숲 외에도 갈색 밭과 푸른 호수, 그리고 점점이 있는 회색 마을과 주택가가 보였다. 동쪽 성문 앞 광장은 거대한 성벽의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가을 아침 하늘은 연푸른색. 구름은 한 점도 없었다. 지나치게 춥지 않은 서늘한 공기가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광장은 건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호선을 그리며 이어져 있는 30채 정도의 2층 벽돌집. 중심부에는 넓은 길이 서쪽을 향해 숲 속으로 뻗어 있었다. 문지기 외에는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광장 한구석에서. "상당히 넓은 나라로군." 여행자는 지도를 눈앞에 펼치며 말했다. 나이는 10대 중반. 짧고 까만 머리카락에 단정한 얼굴. 머리에는 챙과 귀를 덮는 속대가 달린 모자를 쓰고 그 위에 고글을 얹고 있었다. 갈색 코트 아래 검은 재킷을 입고 허리에는 굵은 벨트를 매고 있었다. 오른쪽 허리에는 홀스터에 꽂은 리볼버 타입의 패스에이더를 차고 있었다. "지도 보여줘, 키노." 여행자 옆에 서 있는 모토라도가 말했다. 키노라고 불린 여행자는 커다란 지도를 뒤집어 뒷바퀴 옆과 위에 여행용 짐을 잔뜩 실은 모토라도에게 보여주었다. 지도에는 둥근 형태의 국토와 온통 숲으로 뒤덮인 영토, 중심부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도심부, 점점이 흩어져 있는 마을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좁은 길이 마을과 마을을 끈처럼 연결하고 있었다. "음, 넓네. 이렇게 넓은 나라는 오랜만이야. 아, 대충 파악했으니까 집어넣어도 돼. 그건 그렇고 오늘은 어떻게 할 거야? 수리점을 찾을 거야?" 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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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었다. 이번에는 티가 대답했다. "산책." "… 그건 알았다니까." 밖으로 나오자 역시 밭밖에 없었다. 때때로 작은 트럭이 오가고 포장이 여기저기 갈라진 길 하나. 양옆은 밭. 성벽까지 온통 밭. "어디로 갈 겁니까?" 내가 물었다. "……." 티는 아무 말 없이 성벽으로, 태양을 등지고 북동쪽으로 뻗어 있는 길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딱히 목적지가 없는 줄은 알았지만 길이 오른쪽으로 살짝 굽어 있는 곳에서 그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끝났다." 티가 느닷없이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멈췄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묻자 티는 발 밑을 응시하며 구두 끝으로 바닥을 톡톡 쳤다. 티의 그림자는 길가의 밭으로 이어지는 풀이 무성한 비탈 아래로 사라져 있었다. "설마 그냥 그림자를 밟으며 걸어온 겁니까?" 내가 그렇게 묻자 티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 까매." "그렇긴 하지만…." "사라졌어." "뭐 그렇긴 하지만…." "하지만 괜찮아." "아, 그렇습니까…." "이제 괜찮아." "……." "괜찮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티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호텔 앞을 지났다. 길 앞쪽에는 한동안 밭이 이어져 있었다. 이윽고 드문드문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앞은 둥근 형태를 지닌 이 나라의 중심부. 탑처럼 우뚝 서 있는 유달리 높은 빌딩들이 보였다. 저곳에는 웬만하면 가지 않는 편이 좋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 티는 아무 말 없이 길가에 방치되어 있는 오래된 벤치에 앉았다. 예전에는 버스정류장이었을 그곳에는 둥근 콘크리트 간판 토대만이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나는 티 옆에 앉았다. 눈앞에는 도심부. 티는 때때로 물통을 꺼내 물을 마셨다. 나도 조금 얻어마셨다. 그후로 티는 석양이 하늘을 물들일 때까지 그곳에 앉아서 거리를 바라보았다. 뭐가 재미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용히 앉아서 거리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태양이 성벽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빌딩숲에 불이 켜졌다. 일제히 켜졌다. 지금까지 아주 작게 보이던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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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수류탄을 좋아하는 티의 취미를 어떻게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지만 시즈 님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물통을 들고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다. 티는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플라스틱 물통에 물을 넣고 수건으로 감싸서 가방에 넣었다. 티는 가방을 어깨에 멘 후 '방에서 나갈 때는 잊지 말고 가져가도록'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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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 님의 메모가 붙어 있는 방 열쇠를 들고 문으로 걸어갔다. 티를 뒤따라가던 나는 가방에서 희미한 기름 냄새가 풍기는 것을 눈치 챘다. "티, 가방 밑에 들어 있는 게 뭐죠?" 티는 가방에서 쇠막대기 모양의 물체를 꺼냈다. "그것도 두고 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나는 말했다. 산책에 잭나이프는 필요 없다. "……." "꼬마 아가씨, 노려보기만 하면 알 수가 없잖아. 뭘 하고 싶은 거냐?" 호텔 프런트에서 긴 의자에 앉아 잡지를 읽고 있던 러닝셔츠 차림의 중년 남자가 참다못해 티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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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뒤에서 잠시 외출할 거라고 말하며 열쇠를 꺼내라고 일러주었다. "……." 티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겨우 열쇠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아, 산책 가려고. 잘 다녀와라." "……." 티는 그래도 남자를 노려보고, 또 노려보고, 계속 노려보았다. "또 뭐냐?" 남자가 또다시 참다못해 티에게 불빛과는 달리 빌딩 전체를 비추는, 마치 빌딩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처럼 빛나는 강렬한 빛. 아마 거대한 서치라이트일 것이다. 눈부시게 빛나는 빌딩숲. 어째서 저런 짓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한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 티가 일어섰다. 그리고 호텔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돌아가기에는 딱 좋은 시간이다. 내가 아무 문제 없이 산책이 끝날 것 같다 싶어 안심하고 있을 때 오늘따라 평소보다 말수가 많은 티가 또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저건 아니야." 이번에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호텔로 돌아갔다. "자." 우리는 열쇠를 받아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여담이지만 다른 손님은 없다. 과연 장사가 될지 걱정되는 호텔이지만 벽에 농사 달력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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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게 돌아올 예정입니다. 오늘 하루는 저와 함께 보내야 합니다." "……." "아시겠지요?ㅡ꾸엑!" 침대에서 내려온 티가 정면에서 나를 끌어안고 왼쪽으로 쓰러졌다. 무거웠다. 이리저리 몸을 흔들던 티는 몇 초 후 느닷없이 나를 풀어주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다가 어차피 대답은 기대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그만뒀다. 고개를 들자 티가 나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 이윽고 티는 세면실로 사라졌다. 수십 초가 지난 후 나는 그녀가 '잘 잤어'라고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즈 님은 어제 산 크루아상을 두고 갔다. 새로 산 마멀레이드 병도. 티는 그것을 아침식사와 점심식사 대신 먹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티가 커다란 숟가락으로 오렌지 마멀레이드를 퍼먹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자 티는 막 입에 넣으려던 산더미 같은 마멀레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독이야?" 물론 그런 건 아니지만. 커튼을 열자 창 밖은 무척이나 화창했다. 초여름의 태양이 세상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곳에서 보이는 것은 두렁이 기하학적 무늬를 이루고 있는 밭. 당근인지 뭔가를 키우고 있는 밭에서는 너덜너덜한 허수아비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회색 성벽 안쪽이 가로로 길게 뻗어 있었다. 티는 의자에 앉아서 계속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 나는 카펫 위에 편안한 자세로 엎드려서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창문이 북향이라 햇볕이 따갑지는 않았다. 그렇게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동안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다. 정오가 지났다. 이대로 평온하게 하루가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티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나가자." 그런 생각은 하지 말 걸 그랬나보다. "그건 놔두고 가는 게 어떨까요,티." 산책에 수류탄은 필요 없다. "……." 티는 잠시 나를 노려본 후 가방에 집어넣었던 다섯 개의 수류탄을 마지못해 시즈 님의 가방으로 되돌려놓았다. 옷이 들어 있는 곳에 아무렇게나 놓아두고 가는 것도 좀 그랬지만 레버에 테이프를 감아뒀으니 폭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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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번기에는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 투숙하는 모양이다. 저녁식사는 또 크루아상과 마멀레이드. 티는 반으로 자른 크루아상에 마멀레이드를 듬뿍 발라서 아무 말 없이 내게 내밀었다. "……." 내가 고민하는 동안 마멀레이드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차." 나는 허공에서 그것을 받아먹은 후 크루아상을 우물우물 먹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자 티는 나를 내려다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일행이야?" "네?ㅡ음, 글쎄요. 지금은 시즈 님이 없긴 하지만 우린 모두 함께 여행하는 일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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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됐어." "네." "불만 없어." "네에…." 오늘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투성이다. 밤늦게 시즈 님이 버기를 타고 돌아왔다. 이미 티는 아침처럼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나는 문 앞에서 시즈 님을 맞이했다. 초록색 스웨터 차림의 시즈 님은 조금 피곤한 얼굴로 양손에 나무상자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높이 30센티미터, 길이 1미터 정도의 상자였다. 뚜껑은 끈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시즈 님은 상자를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내가 그게 뭐냐고 묻자 시즈 님은 의자에 앉으며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오늘 일하고 받은 보수." 보수? 시즈 님은 티가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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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 경찰을 도와서 범죄조직 아지트를 괴멸시켰어. 보수는 현금으로 준다고 해놓고 막상 소탕이 끝나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더군. 결국 현장에서 입수한 물건을 보수로 받았어. 역시 문제가 있는 나라는 경찰도 문제가 있나봐." "그렇군요. 그래서 뭘 받아오신 겁니까?" "그게…,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은 이런 것밖에 없더군." 시즈 님은 그렇게 말하며 나무상자를 열었다. "뭡니까, 이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길이가 7센티미터쯤 되고 얼핏 보기에는 패스에이더로 보이는 물건이었다. 어깨에 걸치는 스톡과 방아쇠, 그리고 이상할 만큼 두꺼운 총신이 달려 있었다. "'유탄발사기'라고 하더군." "패스에이더입니까?" "일종의. 굵은 총신에서 전용 수류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발사된다더군." "……. 시즈 님이 사용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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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니까?" "아니, 티에게 주면 어떨까 해서. 수류탄을 좋아하는 건 좋지만 던지는 건 서툰 것 같아서." "……."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것보단 낫잖아?" 시즈 님이 남은 크루아상을 먹고 한숨 돌린 후 물었다. "오늘 어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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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단 무사히 보냈다고 대답한 뒤 티가 비교적 말수가 많았다는 것과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일에 대해 얘기했다. "…흐응." 시즈 님은 조금 놀라며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재미있군. 리쿠와 티가 하루 종일 단둘이 있었던 건 처음이지." "네." "어쩌면 티는 자신이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 "그럴까요? 하긴 전 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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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에는 믿음직스럽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나야 리쿠가 얼마나 믿음직스러운지 잘 알지. 다만 티는 몰랐을지도 모른다는 것뿐이야. 그건 그렇고 티와 리쿠가 단둘이 있을 때 티가 리더십을 발휘하려고 애쓴 거라면 재미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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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일행으로 생각해주는 것이 기쁘지 않은 건 아닙니다만…." "왜 그러지?" "전 시즈 님을 구하기 위해 키노 씨에게 티를 죽여달라고 부탁하려 했습니다." "신경 쓰지 마. 결과적으로 최악의 사태는 면했으니까." "티가 과연 그런 저를 일행으로 생각하고 있을지." "내가 보기에는 그럴 것 같은데. 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럴까요…. 유감스럽게도 저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 이상한 행동도 의미가 있었을지 몰라." "아, 네…. 어떤 의미요?" "먼저 얘기를 듣자마자 생각한 건데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림자를 밟으며 걸어간 것은 그 나라에서 티와 함께 살았던 검은 옷의 사람들이 이제는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싶었기 때문 아닐까. 그래도 자신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자신은 괜찮다는 것을." "그건…, 너무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계속할게. 나라 중심부의 빌딩숲. 티는 그걸 보며 그 나라의 중앙에 서 있던 탑을 생각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화려한 불빛이 켜진 것을 보고 언제나 캄캄했던 탑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은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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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 때는…, '일행'과는 음식을 나눠 먹어야 한다는 것을 티 나름대로 실천한 것 아닐까? 내게는 티와 리쿠가 오늘 하루 동안 무척 사이가 좋아진 것처럼 느껴져." "……."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티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뭐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한 걸지도 모르지만." 시즈 님은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버기를 타고 성벽 밖에 있었다. 날씨는 맑음. 일직선으로 뻗은 앞쪽에는 온통 초록색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자, 출발할까." 시즈 님이 운전석에서 고글을 쓰며 말했다. "응." 티가 조수석에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갑시다." 나는 티의 다리 사이에서 그녀의 손에 머리를 맡기며 말했다. 그러자 티가 내 머리를 끌어안고 뺨을 비비며 말했다. "응. 같이 가자. 리쿠는 일행이니까." 내 이름은 리쿠. 개다. 언제나 즐겁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딱히 언제나 즐거워서 웃는 것은 아니다. 그저 태어날 때부터 이런 얼굴인 것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즐거워서 웃고 있다. 나의 주인은 시즈 님이다. 언제나 초록색 스웨터를 입고 있는 청년인데 복잡한 사정으로 고향을 잃고 지금은 버기를 타고 여행 중이다. 일행의 이름은 티. 항상 말이 없고 수류탄을 좋아하는 소녀인데 복잡한 경위로 고향을 잃고 우리의 일행이 되었다. 버기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얇고 더러운 이불을 젖히고 커다랗게 기지개를 켰습니다. 아무도 없는 좁고 더러운 방에서 양쪽 뺨을 찰싹 두드리며. "좋았어! 오늘도 열심히 일하자!" 소년은 큰 소리로 씩씩하게 말했습니다. 그날 아침. 소녀는 조용히 눈을 뜨고 천개가 달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습니다. 넓고 깨끗한 방에서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며. "부디 오늘도 기분 좋게 노래할 수 있기를…." 소녀는 또렷한 어조로 기도했습니다. 그날 아침. 여행자는 모토라도를 타고 나라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 성문 앞 광장에서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깨끗한 시트를 깐 침대에서 자고 싶어!" 여행자는 외쳤다. "입국하자마자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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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마이드를 조금 낮은 위치로 내밀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12, 3세 정도의 소녀. 아름다운 소녀가 사진 속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여름 하늘처럼 짙은 푸른색 눈동자에 허리까지 닿을 듯한 긴 금빛 곱슬머리. 옷은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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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 만큼 새하얀 원피스. "이 애가 가희? 예쁜 소녀네요." 에르메스가 말했다. "그렇죠! 요정이 따로 없다니까요! 영화에서 움직이는 걸 보면 더 예뻐요!" 아주머니가 거친 콧김을 뿜으며 대답했다. "……." 키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사진을 응시했다. "분해?" "여자친구 삼고 싶어요?" 에르메스와 아주머니가 동시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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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는 일단 에르메스의 연료 탱크를 주먹으로 내리친 후, "아야." 아주머니에게 적당히 대답했다. "아뇨, 제겐 너무 과분한걸요." 그리고. "하지만 노래에는 정말 감동했어요. 여행을 하면서 들은 노래 중에 최고예요." 그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머나, 기뻐라! 정말 기뻐요!" 마치 자신이 미인이고 칭찬받은 것처럼 그렇게 말한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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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는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좀 전과는 정반대로 마치 장례식에서 인사를 하는 듯한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어쩌면 좋을지…." "왜요?" 아주머니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보고 에르메스가 물었다. 아주머니는 사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요즘…, 건강이 안 좋은 것 같아요." "가희가요?" "네. 요 몇십 일 동안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요. 신곡 얘기도 없고 말이죠. 지금까지는 국가에서 주최하는 사진 촬영회도 정기적으로 열리곤 했는데 지금은 예정조차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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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새로운 사진도 가게에 나오지 않는답니다. 영화 얘기도 못 들었어요." "흐응." "이건 소문이지만 얼굴을 다치는 바람에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게 되어서 영화에도 못 나오고 오랫동안 요양해야 된다더군요." "흐응." "그럼 안 되는데! 설마 이러다 은퇴라도 해버리면 우리는 어쩌면 좋아요!" 아주머니는 사진을 든 손을 떨며 탄식했다. "아아, 어쩌면 좋아…" 이윽고 아주머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비틀비틀 걸어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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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흘러나왔다. 소녀의 목소리였다. 노래는 아침의 풍경에 녹아들어갔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는 내용의 평범하고 흔한 사랑 노래였다. 그 때문에 노래하는 사람의 가창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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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목소리가 더욱 돋보이는 상큼한 노래였다. "……." 허리에 두 자루의 패스에이더를 찬 여행자는 모토라도의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거리에 늘어서 있는 집들의 창문이 차례차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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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노래가 끝났다. 『오늘도 멋진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멘트를 끝으로 방송은 끝났다. "체조가 아니었네."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린 후 에르메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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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는 시선을 내리며 대답했다. "멋진 노래였어. 노래도 좋지만 가수의 목소리와 창법이 정말 훌륭해. 마음에 들어." "오호, 키노가 그렇게까지 만족스러워하다니. 웬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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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끝난 직후 마치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광장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벽으로 걸어가는 사람, 가게 셔터를 여는 사람, 마차를 준비하는 사람, 자동차 시동을 거는 사람. 그 속에서 앞치마를 두른 중년 여자가 키노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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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님, 좀 전에 입국했죠? 노래 들었어요? 좋은 노래죠? 멋진 목소리죠?" "네, 무척." 키노가 네 가지 질문에 긍정을 표하자 아주머니는 몹시 흐뭇해하며 말했다.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가희의 노래예요. 국민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가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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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의 아이돌!" "흐응, 인기가 많나보네." 에르메스가 말했다. "물론이죠! 2년 전 어느 작은 회사에서 국민 모두에게 사랑받는 가수를 키우겠다며 오디션을 실시했어요. 그때 뽑힌 것이 바로 그녀죠. 데뷔하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인기를 얻어서 지금은 이 나라에 팬이 아닌 사람은 없을 정도랍니다! 이게 그녀의 사진이에요." 아주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브로마이드 한 장을 꺼냈다. "나도 보여줘요." 키노에게 보여주려던 아주머니는 에르메스의 말에 양쪽 다 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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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고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 그리고 본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비밀번호를 알려주라고 말이야." "그렇구나…." "그리고 우리에게는 돈을 받으면 인질의 안전을 지킬 의무가 있지. 이건 사업이야. 거꾸로 말하자면 돈을 주지 않고 우리를 공격할 경우 인질을 죽여도 상관없다는 뜻이지. 뭐 그런 경우는 없지만 말이야. 유괴한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사업이지만 몸값을 너무 세게 불러선 안 돼." "와, 그렇구나." 엘리어스가 감탄을 거듭하는 동안 유안과 사라 사이에서는 신사적인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유안이 말했습니다. 지금 몸값을 요구하면 돈을 받는 것은 빨라도 내일 저녁이라는 것. 따라서 인질을 풀어주는 것은 밤이나 다음날 아침이 될 테니 길면 하룻밤은 이곳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 이 거리는 위험한 곳이니까 방에서 도망치면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는 것. 유안이 정중한 어조로 교사처럼 주의사항을 일러준 후. "알겠어요. 얌전히 기다릴게요." 사라는 착실한 학생처럼 대답했습니다. 어딘가 어른스러운 말투였습니다. "그건 그렇고 사라ㅡ." 유안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까닥하여 뒤에 서 있는 엘리어스를 불렀습니다. 엘리어스는 앞으로 몇 걸음 나섰습니다. 순간 그와 사라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어머? 한 명 더 있네요?" 사라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러나 어딘가 즐거운 듯이 말했습니다. "……." 엘리어스는 그 올곧은 시선에 압도당해 조금 뒤로 물러섰습니다. '한 명 더'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유안이 말했습니다. "아니, 이 녀석도 일단 우리 동료다. 이제부터 널 감시할 거다." "어머, 세상에! 이렇게 약해 보이는 남자애가?" 사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척이나 놀란 듯이 말했습니다. 로브와 케인은 소리 없이 웃음을 지었고 엘리어스는 노골적으로 발끈 화를 냈습니다. 부끄러운 나머지 그 반동으로 화가 난 모양이었습니다. "뭐야! 인질 주제에 건방지게!" "어머? 인질은 소중한 존재야. 많은 돈과 교환해야 하니까! 네가 유괴당해봤자 그런 돈이 나올까?" 사라가 두 갈래로 땋은 머리를 흔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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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 사라졌습니다. 몇십 초 동안 창백하게 질려 있던 엘리어스가 유안에게 물었습니다. "굉장해…. 지금 그건? 지금 그건 어떤 정보로 그렇게 생각한 거죠?" "단순히 경험에 의한 감일 뿐이다." 유안이 대답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소녀의 눈에 비친 것은 얼룩투성이 천장이었습니다. 작은 전등 하나가 갓조차 없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창문으로 새어드는 저녁 햇살 덕분에 방 안은 나름대로 밝았습니다. "오, 눈을 떴군, 아가씨."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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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소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소녀는 먼저 자신이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방 안이 굉장히 좁고 지저분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누구…?" 그리고 낯선 남자 네 명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로브, 케인, 방금 전 말을 건넸던 유안, 그리고 뒤에 숨어서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엘리어스. "당황하지 말고 들어라. 우리는ㅡ." 유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괴범이죠? 그렇죠? 저 유괴당한 거로군요." 소녀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물었습니다. 맑은 목소리였습니다. 목소리도 태도도 유괴당한 사람치고는 묘하게 침착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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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어스는 어른들 뒤에서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래, 잘 아는군." 침대에서 일어선 소녀는 조용히 뒤로 물러선 유안 앞에 서서 꾸벅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전 사라 로렌스라고 해요. 주소는 동지구 2번 주택가 3번지 5. 전화번호는 동지구 299835. 비밀번호는 '하얀 옷과 모자'." "그럼 사라라고 부르지. 가정교육을 아주 잘 받은 것 같군. 덕분에 이쪽도 편하겠어." 유안과 사라라고 이름을 밝힌 소녀의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엘리어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로브의 귀에 입을 대고 어째서 이름과 주소를 순순히 밝힌 것인지, 그리고 비밀번호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로브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부자들의 자녀는 사건이 원만하게 해결되도록 유괴를 당하면 절대 저항하지 말고 풀어줄 때까지 기다리라고 배우거든. 냉정하게 대화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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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이었습니다. "의외로 소문이 맞을지도…. 요즘 너무 오래 쉬고 있잖아." 로브가 말했습니다. "아니야…." 엘리어스는 슬퍼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냥 소문일 뿐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정보가 너무 적어. 정보도 없는데 결론을 내리지 마라." 그런 엘리어스를 향해 유안이 마치 교사처럼 침착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엘리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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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저쪽이 왜 그런 가짜 연막탄 때문에 차를 세웠는지 아나? 유괴가 많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인데." 유안의 물음에 엘리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몇 초간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모르겠어요…." "그 고급차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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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차에는 구조상 결함이 있어. 배기관의 열 때문에 차체가 타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지. 심할 경우에는 차체 전체가 타기도 해. 제조 회사는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지만 부자 고객들 사이에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지. 그 때문에 뒷부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쉽게 속고 말아. 그리고 실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ㅡ, 차를 세우고 문을 여는 행동을 하는 거다." "그렇군요! 굉장하다…." 감탄하는 엘리어스를 바라보며 유안은 강의를 계속했습니다. "행동할 때에는 정확한 정보를 근거로 냉정하게 움직여라. '용기' 따위는 필요 없다. 내 생각에 그건 '무모함'과 똑같은 거야."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하는 유안의 수염 난 얼굴을 바라보며 엘리어스는 짧게 대답했습니다. "아, 알겠어요." 유안은 다시 입을 다물고 앞을 바라보았습니다. 차는 숲에서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넓은 포장도로로 나와 다른 자동차들 틈에 섞였습니다. 드문드문 가게와 집들이 보이는 길을 다른 차들과 함께 속도위반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달렸습니다. 그때. "경찰이다." 로브가 짧게 외쳤습니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앞쪽에서 푸른색 순찰차 몇 대가 달려왔습니다. "히익ㅡ." 엘리어스가 작게 비명을 질렀습니다. "당황하지 마. 이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달려라. 우리를 쫓아온 게 아니야." 유안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순찰차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맞은편 차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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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 그럴 리 없어요!" 엘리어스는 필사적으로 부정했습니다. 물론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의 바람일 야무지게 대꾸했습니다. 엘리어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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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어스는 분한 듯이 이를 악물었습니다. 유안이 그런 엘리어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습니다. "이 녀석은 엘리라고 한다." "어머, 여자같은 이름이네요. 실은 여자애인가요?" 그 말에 엘리어스는 또다시 발끈했습니다. 유안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아니. 이름은 물론 가명이다. 우리는 악당이니까 말이야. 풀려날 때까지 이 소년이 너를 감시할 테니까 사이좋게 지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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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알겠어요." "내일 아침에는 풀려날 수 있을 거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데리러 올 테니까 그때까지 이곳에서 도망치지 마라. 이곳에서 벗어나면 네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알겠어요." 야무지게 대답하는 사라를 바라본 후 유안은 엘리어스에게 시선을 던졌습니다. "부탁한다. 맡은 일을 잘 수행해다오. 약속할 수 있겠지?" "네." 엘리어스는 긴장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아." 유안은 몸을 돌리며 다른 두 사람에게 이만 가자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케인은 엘리어스와 사라를 물끄러미 바라본 후 그 뒤를 따랐습니다. "자." 로브가 엘리어스에게 커다란 종이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엘리어스는 봉투를 품에 안고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안에는 부드러워 보이는 빵과 비싸 보이는 잼 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엘리어스는 작게 침을 삼킨 후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부탁한다. 아까 계획한 대로 하면 돼. 여기서 연락을 기다려. 그리고 이제 그만 커튼을 닫아라." 로브의 말을 마지막으로 세 남자는 방에서 나갔습니다. 엘리어스는 일단 문을 잠갔습니다. 힘없는 빛을 뿌리는 전등을 켠 후 로브가 시킨 대로 서둘러 창문의 커튼을 닫았습니다. 넝마를 달아놓은 듯한 커튼이었지만 바깥에서 방 안이 보이지 않도록 가릴 수는 있었습니다. "휴우…." 엘리어스는 일단 마음을 가라앉힌 후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라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더 이상 바보 취급을 당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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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 의자에 앉아도 되고 침대에 앉아도 돼. 멀뚱멀뚱 서 있으면 거치적거리니까."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아…." 엘리어스는 깨달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의연하게 행동하던 사라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가늘게 떨고 있다는 것을. "넌 하나도 안 무서워!" 소녀는 울먹이며 느닷없이 물어뜯을 듯한 기세로 말했습니다. "어." 엘리어스는 당황했습니다. "아까 그 수염 난 사람이 무서워서 그래! '유괴범은 정중할수록 무서운 법이니까 절대 반항하지 말라'고 배웠단 말이야!" "아…, 응…." 엘리어스는 몇 번이나 작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알았어…. 이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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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 사람은 화나면 무서울 것 같더라." "도망치지 않는 건! 네가 무서워서가 아니야!" "그래, 알았어. 난 약하니까. 무기도 없고…. 휴우…." "그래! 너랑은 아무 얘기도 안 할 거야! 여기서 도망치진 않을 거지만 이제부터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무시할 거야!" "……." 엘리어스는 아무런 반론도 못 하고 그대로 침대 구석에 털썩 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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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도 울먹이며 반대편 구석에 털썩 앉았습니다. "……." "……."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리의 소음만이 작게 들려오는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꼬르륵. 누군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엘리어스는 오른쪽 옆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라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조금 화가 난 표정으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엘리어스는 머뭇거리며 말했습니다. "저기…, 빵 먹을래?" 사라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짧게 대답했습니다. "먹을래." "네, 알겠습니다. ㅡ네, 틀림없는 사라 아가씨입니다." 호화로운 응접실에서 집사가 전화를 받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소녀를 부르러 온 집사였습니다. 그의 주위에는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제복을 입은 경찰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자들은 모두 씁쓸한 얼굴로 집사와 범인의 통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창 밖은 노을에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푸르렀던 하늘에 오렌지색이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돌이 깔린 넓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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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않도록 조금 강한 어조로. 원도 천천히 석양에 물들어갔습니다. 『우리를 우습게 보지 말기 바란다.』 유안이 전화를 통해 침착한 어조로 협박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와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귀에 들렸습니다. "네ㅡ. 저희도 멋진 수법을 보아하니 경험이 많은 프로의 범행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가씨의 안전을 위해 몸값은 말씀하는 대로 지불하겠습니다ㅡ. 네, 말씀하신 금액은 곧 준비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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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는 두 손으로 수화기를 단단히 잡은 채 어디까지나 공손하고 정중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그럼 장소를 지정하겠다. 지금 통화하고 있는 사람. 너 혼자서 와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시간은 해가 진 직후.』 "네. 그럼 저는 어디로ㅡ." 집사가 장소를 물으려고 한 순간이었습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고 양복 차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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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남자가 다급한 표정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며 남자를 바라보았습니다. 남자가 말했습니다. "죽었어…. 방금 전에 연락이 왔다…." 남자의 얼굴은 땀투성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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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고 무겁게 내려앉았습니다. 몇 초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어이?』 유안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습니다. 모두가 이제야 생각난 듯이 스피커를 응시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전화 상태가 좋지 않아서." 집사가 거짓말로 둘러대며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방 안에 있는 남자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남자 한 명이 손가락으로 신호를 보냈습니다. 집사에게 검지를 향하며 엄지손가락을 세웠습니다. "……." 아무 말 없이 집사에게 패스에이더를 쏘는 동작. 그리고 손바닥을 자신의 목 언저리에서 수평으로 움직였습니다. 아무리 봐도 '죽이라'는 의미였습니다. "……." 집사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의 남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연락이 왔습니다. 돈을 준비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몸값은 밤에 드려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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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든 숲에 닿으려 하고 있을 때. 잠들어 있는 키노와 에르메스가 있는 방에 벨이 울린 직후 요란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우웅?" "손님이야, 키노." 엎드린 채 고개를 든 키노와 에르메스가 말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키노는 투덜거리며 오른손으로 홀스터에서 <캐논>을 뽑아들고 문으로 다가갔다. "저녁식사 서비스인가?" 에르메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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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는 그럴 리 없다고 중얼거리며 문으로 걸어갔다. 키노는 문을 열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물었다. "누구시죠?" "여행자님! 여행자님이시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그렇습니다만." "어제 입국한 상인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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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님이 굉장히 강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당신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제발! 시간이 없습니다!" "네?" 키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석양에 물든 엘리어스의 방. "응, 맛있게 잘 먹었다." "……." 사라는 잼을 바른 쿠페 빵을 두 조각 정도 먹어치운 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엘리어스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테이블에는 작은 빵부스러기와 반 이상 줄어든 잼 병, 그리고 차가 담긴 머그잔이 놓여 있었습니다. 잔이 하나밖에 업어서 차는 사라 혼자서 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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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끓인 것은 엘리어스였습니다. "부잣집 아가씨는 이렇게 많이 먹지 못하는 줄 알았어." 엘리어스가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아. 넌 부자에게 너무 편견이 많구나." 사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미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부자들의 생활 따위 알 게 뭐야…." 엘리어스가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너, 엘리라고 했지?" "그, 그런데." "부모님은 안 계시니?" "없어. 원래 엄마밖에 없었는데 2년 전에 돌아가셨어." "그렇구나." "동정 따윈 필요 없어. 혼자서도 열심히 일해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그때까지 열심히 노력할 거야!" "동정 따위 안 해. 나도 부모님이 안 계시니까." 사라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습니다. 엘리어스는 깜짝 놀라며 멍하니 입을 벌리고 사라를 바라보았습니다. "뭐야? 그렇게 놀라워?" "그럼…,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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녁. 태양이 오렌지색 덩어리로 변하여 노랗고 붉게 ?" "어른들과 함께 살고 있긴 하지만ㅡ, 실은 너와 똑같아." "무슨 뜻이지?" 엘리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사라는 잘난 척하며 가슴을 펴고 말했습니다. "내 힘으로 일해서 살고 있다는 뜻이야! 게다가 너보다 많이 번단다!" "잘난 척하지 마! 많이 버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 "그뿐만이 아니야! 나이도 내가 위잖아? 엘리, 너 몇 살이니? 열 살 정도?" "웃기지 마! 난 열두 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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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은?" "지난 달!" "그럼 내가 누나네! 난 다음날이면 열세 살이야!" 엘리어스는 더욱 발끈했지만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못 했습니다. "어머, 목이 마르네. 차 한 잔 더 줄래?" 사라가 여봐란 듯이 우아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엘리어스는 뾰로통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방구석에 놓여 있는 작은 전기스토브로 다가가서 주전자의 무게를 확인한 후 스위치를 켰습니다. 그리고. "돈을 받으면 레코드와 축음기를 사야지. 그때까지 참아야 돼."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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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뭐라고 했니?" 사라가 물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엘리어스는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밤. 태양은 서쪽 대지로 가라앉고 이미 잔광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동쪽 하늘에는 보름달이 빛나고 있었다. 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탁 트인 숲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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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남자가 서 있었다. 유안, 케인, 그리고 로브. 달빛이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숲 속에서 세 남자는 나무줄기에 등을 댄 채 각각 다른 방향을 향해 서 있었다. 주위에 집은 없었다. 인공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몇 겹으로 세 사람을 감쌌다. 케인이 손목시계로 흘낏 시선을 던진 후 아무 말 없이 팔을 내렸다. "어이. 서쪽이다." 유안이 말했다. 세 사람은 그가 말한 방향으로 시선을 향했다. 멀리서 헤드라이트 불빛 하나가 보였다. 때때로 숲 속의 나무들 사이로 숨으며 불빛은 확실하게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뭐지? 모토라도를 타고 온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로브는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소형 리볼버를 뽑았다. 총신이 극단적으로 짧고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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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체가 해머를 덮는, 여차하면 주머니 안에서도 쏠 수 있는 타입이었다. "내가 쏠 때까지는 쏘지 마라." 유안은 그렇게 못을 박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헤드라이트를 응시했다. 작게 들려오던 엔진소리가 차츰 커졌다. 모토라도는 숲 속의 풀들을 짓밟으며 천천히 세 남자에게 다가왔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나무 뒤에서 조용히 앞으로 나선 유안을 비췄다. 모토라도가 멈췄다. 엔진소리가 멈추고 헤드라이트가 꺼졌다. 숲 속은 또다시 벌레 울음소리와 달빛으로 가득 찼다. 모토라도 탱크가 달빛을 반사하여 둔탁하게 빛났다. 운전사가 사이드스탠드를 내리는 금속성 음이 유달리 크게 울려 퍼졌다. "저ㅡ, 실례합니다. 거기 계신 세 분." 키노가 옆집 사람이라도 부르는 듯 조금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 남자는 그 목소리가 무척 젊다는 것에 놀라며 서로를 흘낏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유안이 물었다. 키노가 대답했다. "'하얀 옷과 모자를 사러 왔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유안은 옆 나무 아래 서 있는 로브에게는 그곳에 있으라고, 케인에게는 따라오라고 손가락으로 지시를 내렸다. 두 사람은 풀을 밟으며 패스에이더를 품에 넣은 채 키노에게 다가갔다. 키노는 검은 재킷 차림에 모자를 쓰고 목에 고글을 걸고 있었다. 오른쪽 허리에는 <캐논>, 허리 뒤에는 <숲의 사람>이 꽂혀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온 두 남자를 바라보며 키노는 극히 평범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당신들이 '장사꾼'인가요?" 두 남자는 몇 미터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유안이 키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 너는 누구냐?" "저는 오늘 이 나라에 입국한 여행자입니다." "여긴 왜 온 거냐?" "의뢰를 받고. 이곳으로 가방을 들고 가서 남자들에게 건넨 다음 '하얀 옷과 모자'가 있는 곳을 알아오라더군요. 의뢰를 한 사람은 부잣집 집사라고 했습니다. 갑자기 올 수 없게 됐다는 말만 들었을 뿐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가방은 어디냐?" 케인이 물었다. 키노는 에르메스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짐받이에 고무 끈으로 묶어두었습니다. 이제 풀어도 될까요?" 유안이 고개를 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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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는 에르메스 뒤로 돌아가서 짐받이의 고무 끈을 풀었다. 금속 가방을 들고 남자들에게 천천히 다가가서 4미터 정도 앞의 풀 위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유안과 케인이 가방으로 다가갔다. 케인이 가방을 들고 그것을 열었다. 안에는 지폐 다발이 가득 담겨 있었다. 케인은 가방 안을 확인한 후 지폐 다발이 전부 진짜인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지폐 다발의 수를 세었다. "좋다." 케인은 케이스를 닫았다. 달칵 하는 소리를 내며 버클이 닫혔다. 그 순간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에르메스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ㅡ. 둘ㅡ." "'하얀 옷과 모자'가 있는 곳을 가르쳐주십시오." 키노의 말에 유안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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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구 15번가가 어딘지는 알고 있겠지? ㅡ그곳 18번지에 23호라는 판잣집이 있다. 그 판잣집 한 방에 있다." "어?" 유안의 말을 듣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브가 몹시 놀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안은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그곳에 같은 또래의 소년과 함께 있다. 그는 우리가 패스에이더로 협박해서 방을 빌렸다. 자신도 한패라고 우길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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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도록 협박한 것뿐이다. 그도 피해자니까 '하얀 옷과 모자'와 함께 보호하도록 경찰에게 전해라." 키노는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확인하겠습니다. 남지구 15번가 18번지 23호. 그곳에 있는 소년과 함께 보호하면 되는 겁니까?" "그래. 그럼 거래는 끝이다." 유안은 그렇게 말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로브가 키노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가운데 유안과 케인은 키노에게서 멀어져갔다. 키노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지켜보았다. 남자들은 숲의 어둠에 섞여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 안 씨. 어쩔 셈입니까." 로브가 아직 손에 리볼버를 든 채 두 사람을 맞이하며 물었습니다. 세 남자는 멀리 숨겨둔 자동차를 향해 어두운 숲 속을 빠른 걸음으로 걸었습니다. 유안이 대답했습니다. "어쩔 셈이긴. 그 꼬마의 일은 오늘로 끝이다." "그럼 처음부터ㅡ? 오직 우리가 도망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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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벌기 위해서, 방을 사용하기 위해서ㅡ?" 유안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꼬마는 그 정도밖에 도움이 안 되니까." "저한테 미리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로브가 그렇게 말하자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들고 있던 케인이 문득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미리 말하지 않아서."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였습니다. 로브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저, 녀석의 몫은? 우리가 가지는 겁니까?" "일단 계좌를 만들어서 돈을 넣어뒀다가 사태가 수습될 때쯤 가르쳐주려고. 그때 레코드와 함께 통장을 보내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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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이 대답했습니다. "참 느긋한 계획이로군요…. 뭐 상관없습니다만." 로브는 조금 어이없어하며 말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우린 어쩔 겁니까? 다음 일은?" 그리고 성급하게 그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유안이 말했습니다. "다음 일은 없다." "네?" "이게 우리의 마지막 일이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더러운 일을 했다. 사람도 죽였지. 하지만 이걸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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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에 물건이나 사러 와라." 유안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럼 싸게 팔아주십시오." 로브도 웃으며 말했습니다. "돈 많이 벌면 와서 팍팍 써라." 케인도 즐거운 듯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순간ㅡ. "200ㅡ." 에르메스가 그렇게 말한 순간ㅡ. 케인이 들고 있던 가방이 폭발했다. 가방 앞뒤와 양옆에서 불꽃과 폭풍(爆風), 그리고 작은 금속 파편이 무수히 튀어올랐다. 가방을 들고 있던 케인의 몸은 뒤로 날아가서 굵은 나무줄기의 상당히 높은 위치에 부딪힌 후 허공으로 튕겨나가 풀 위에 떨어졌다. 그때 이미 케인의 양팔과 양다리와 얼굴은 사라져 있었다. 남은 몸통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른쪽 옆에 있던 로브는 파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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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케인도 그만 손을 씻을 생각이다. 이 돈으로 고향에서 가게라도 시작해야지.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살 생각이다. 지금까지 거짓말로 가족들을 속여왔다. 이제야 겨우 늘 함께 지낼 수 있어." 로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인을 바라보았습니다. "미안하다. 미리 말하지 않아서." 케인이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으아ㅡ! 또 나만 쏙 빼고!" "로브ㅡ. 넌 젊지만 제법 쓸 만했다.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하려면 우리가 가르쳐준 것을 지켜라. 그럼 이쪽도 저쪽도 죽는 사람을 최대한 줄일 수 있을 거다.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거다. 알겠나?" "네!" 유안의 말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후 로브는 그래도 쓸쓸하다며 작게 중얼거렸습니다. 케인이 문득 웃으며 말했습니다. "오늘 밤 헤어지면 다음에 마을에서 만나더라도 아는 척하지 마라. 그때는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케인 씨. 유안 씨도.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악당에게 고맙다고 하면 어쩌냐?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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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정통으로 맞고 비명을 지르며 몸을 젖혔다. "크악!" 풀 위에 쓰러진 그의 왼쪽 손목에서 분수처럼 선혈이 뿜어올랐다. "으악! 커헉! 히익! 크헉!" 그는 8초 정도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허공을 쥐어뜯다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 뒤에 서 있다 폭발과 함께 엉덩방아를 찧은 유안은 한동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왼팔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위는 온통 불타고 있었다. 폭발과 함께 날아온 지폐에 불이 붙어서 마른 풀잎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숲 속이 조금 밝아졌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건가." 그 중얼거림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가슴에서 뿜어 나온 피는 여전히 기세를 늦추지 않고 왼팔뿐 아니라 복부에서 양다리로 흘러내렸다. 수염을 기른 남자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윽고 그는 지폐가 만들어낸 화톳불 속에 쓰러져서 코를 고는 것처럼 길고 커다란 숨을 내쉰 후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지폐가 대부분 재로 변하고 시체가 어둠에 녹아 사라지기 시작할 무렵 헤드라이트 불빛이 세 구의 시체를 비췄다. 키노는 사이드스탠드를 내려 에르메스를 세운 후 라이트를 켠 채 한 손에 <캐논>을 들고 세 구의 시체를 살펴보았다. "전부 죽었군." "꽤 강력한 폭약인데, 키노." "의뢰인은 이 사람들이 반드시 죽기를 바랬으니까." 키노는 오른손에 <캐논>을 든 채 왼손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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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모자를 벗어서 가슴 앞에 대고 묵념했다. 이윽고 키노는 눈을 뜨고 모자를 쓴 후 에르메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캐논>을 홀스터에 꽂았다. "흠ㅡ, 아까 저 사람들이 가르쳐준 곳까지 얼마나 걸릴까?" "음ㅡ, 숲을 지나서 도로로 나가면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그럼 가자." 키노는 에르메스를 타고 숲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건 한 명." 키노의 말에 에르메스가 동의를 표했다. "응ㅡ, 이제 한 명 남았어." 세 사람의 시체가 또다시 어둠에 감싸일 무렵. "……." 엘리어스는 다리를 벌리고 의자에 거꾸로 앉아서 자신의 침대를 점령한 채 잠들어 있는 사라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창문의 커튼은 닫혀 있었고 천장에는 힘없이 빛나는 작은 전등 하나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사라는 엘리어스의 침대에서 기분 좋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차에서 덮었던 담요를 둘둘 말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엘리어스가 애용하는 담요는 동그랗게 말려서 방구석에 팽개쳐져 있었습니다. "연락은 아직 멀었나…." 엘리어스는 작게 중얼거렸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아침이 오기 전에 로브가 와서 그녀를 데리고 갈 것입니다. 엘리어스의 역할은 그걸로 끝입니다. 그럼 사라와는 영원히 헤어져서 두 번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없게 되겠지요. 엘리어스는 또다시 사라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에 살짝 뒤덮인 주근깨투성이 얼굴. "……." 한동안 그 얼굴을 바라보던 엘리어스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앗, 뭐야! 내가 좋아하는 건 가희야." 그리고. "휴우…." 한숨을 쉬며 지친 얼굴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차츰 졸음이 밀려왔습니다. "자면 안 돼…. 깨어 있어야…." 그렇게 말한 직후 그는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시간이 흐른 후ㅡ. 둔탁한 빛이 실내를 비췄습니다. "웃!" 얼굴을 어루만지는 빛에 눈을 뜬 엘리어스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이 근처 골목을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였습니다. 빛은 커튼 틈새로 새어 들어와 바닥과 벽을 비추며 흘러갔습니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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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어스는 기뻐하며 의자에서 일어나 커튼을 살짝 열고 창 밖을 살펴보았습니다. 판잣집이 드문드문 서 있는 거리.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달빛. 그 빛에 섞여 50미터쯤 떨어진 골목에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였습니다. 엘리어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헤드라이트가 꺼졌습니다. 환한 빛이 사라지자 자동차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ㅡ." 엘리어스는 숨을 삼켰습니다. 그것은 로브의 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파란 차였습니다. 차에서 내린 것은 제복을 입은 경관들이었습니다. 뒷좌석 문이 열렸습니다. 네 명의 건장한 남자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허리의 벨트에서 경찰봉을 뽑아들었습니다. 하얀 떡갈나무 봉이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여, 여길 들킨 거야…." 엘리어스는 벽에 등을 기대고 창가에 주저앉았습니다. 주저앉은 채 이를 부딪치며 공포에 떨었습니다. "도, 도, 도망쳐야 돼…." 엘리어스는 천천히 침대를 바라보았습니다. 경찰에 쫓기는 원인인 소녀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엘리어스는 고개를 들고 커튼 아래로 밖을 살펴보았습니다. 경관들은 아직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한 경관이 근처의 집을 노크했습니다. 집주인이 귀찮다는 얼굴로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아직 이 집이라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나보지…. 하지만…. ㅡ!" 엘리어스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일어나!" 그리고 사라의 담요를 퍽퍽 내리치며 목소리를 죽이고 외쳤습니다. 몇 번쯤 내리치자 사라가 어렴풋이 눈을 뜨고 엘리어스를 쳐다보았습니다. "뭐야?" "이, 일어나! 도망쳐야 돼!" "왜…?" "아, 아무튼!" 스스로 생각해도 별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엘리어스는 잠에서 깨어난 사라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순간 프릴이 잔뜩 달린 분홍색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옷은 너무 눈에 띄어…." 엘리어스는 재빨리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상자에 들어 있는 자신의 옷을 꺼냈습니다. 갈색 바지와 초록색 재킷, 셔츠. 엘리어스는 그것을 사라에게 던지며 말했습니다. "갈아입어!" "왜?" "아무튼!" 공포에 질려 필사적인 엘리어스는 바깥의 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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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들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 험악한 기세에 눌린 사라는 역시 큰 소리로 외치며 대답했습니다. "아, 알았으니까 돌아서!" 순찰차에서 내린 경관들은 노크소리를 듣고 나온 잠옷 차림의 주인에게, "그럼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십시오." 그렇게 말한 후 다시 골목으로 돌아왔습니다. "여기도 아니야. 벌써 여섯 집째인데. 정말 이 거리 맞아?" 한 경관이 동료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습니다. "그 도난당한 옷장을 숨겨뒀다는 곳이." "잘못된 정보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전부 찾아봐야지." 다른 경관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꽤 가까워진 엘리어스의 방이 있는 판잣집을 가리켰습니다. 방은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저기는? 방이 있는데." "아, 저기는 제일 나중에 조사해도 돼." 경관은 동료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유를 물었습니다. "저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엘리어스라는 꼬마뿐이야. 보기 드물게 성실한 녀석이지. 도둑질 따윌 할 리가 없어." 그 대답을 들은 경관들은 다른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금이야! 빨리 뛰어!" "대체 뭐야…." 옷을 갈아입은 사라와 엘리어스는 판잣집 옆에서 뛰어나와 어둠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엘리어스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것은 동그랗게 만 담요와 도시락통 크기의 나무상자. 사라가 들고 있는 것은 남은 빵을 넣은 종이봉투. 시간은 심야. 하늘 높이 보름달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엘리어스라는 꼬마, 방에 없는데? 창문으로 들여다봤는데 방에는 아무도 없어. 옷장도 없고." "밤놀이라도 배웠나? 돌아가자." 경관들은 순찰차를 타고 달빛에 잠긴 골목에서 떠났다. 순찰차의 미등이 사라짐과 동시에 판잣집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 총총걸음으로 골목을 가로질렀다. 모자를 쓰고 얼굴에 검은 천을 감은 키노였다. 키노는 발소리를 죽이고 엘리어스의 방이 있는 판잣집으로 다가갔다. 판잣집 옆에 도착한 키노는 현관 옆에 적혀 있는 주소를 확인한 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어둡고 짧은 복도를 소리 없이 걸어서 엘리어스의 방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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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는 아무 말 없이 왼손으로 <숲의 사람>을 뽑았다. 안전장치를 풀고 그립에 붙어 있는 작은 스위치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조준용 레이저사이트가 한순간 문에 빨갛고 작은 점을 새겼다. 키노는 문으로 오른손을 뻗어 손잡이를 조용히 돌렸다. 잠겨 있지는 않았다. 키노는 <숲의 사람>을 든 채 천천히 문을 밀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커튼 틈새로 희미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어두운 방에 빨갛고 작은 불이 켜졌다. 책상. 침대와 침대 밑. 방구석. 문 뒤. 좁은 방 안에 사람이 숨을 만한 곳은 없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키노는 레이저사이트 스위치를 껐다. 빨간 점이 사라졌다. "으…, 한 발 늦었군." 키노는 작게 중얼거렸다. "보다시피 놓쳤어. 방금 전까지 분명히 이곳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어라라? 눈치 챘나? 어쩌냐, 키노." "아직 이틀 남았어." 방 한가운데에는 에르메스가 센터스탠드로 서 있었다. 키노는 천을 풀고 모자를 벗은 후 침대에 걸터앉았다. "피곤해." 그리고 그대로 벌렁 누웠다. 그 옆에는 키노가 담요 아래에서 발견한, 단정하게 접은 분홍색 원피스가 놓여 있었다. 달빛을 받아 프릴이 청백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떻게 할 거야, 키노? 지금부터 여기저기 찾으러 다닐 거야?" "아니, 에르메스를 타고 달리면 소리를 듣고 도망칠 게 뻔해. 하수도로 도망쳤다면 그것조차 무리야. 에르메스 너도 그런 곳을 달리고 싶진 않겠지?" "두말하면 잔소리." "뭐 그런 거지. 나도 좀 자고 싶으니까 오늘은 이만 끝." 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전까지 사라가 자고 있던 침대에 누웠다. "키노?" "범인이 돌아올 가능성도 아주 없진 않으니까 일단 눈 좀 붙일래. 날이 밝으면 다시 수색 시작." "아, 그러셔. 나야 상관없지만. 모처럼 호텔을ㅡ." "말하지 마." "네, 네. 그럼 누가 오면 깨워줄게. 잘 자, 키노." "응, 잘 자. ㅡ모처럼 호텔을 잡았는데." "안 됐다." 엘리어스와 사라는 짧은 돌다리 밑에 있었습니다. 밝은 달빛 덕분에 발 밑에서 흐르는 시냇물과 양옆에 펼쳐져 있는 밭이 뚜렷하게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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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습니다. 벌레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개구리 울음소리도 들렸습니다. 기온은 낮보다 상당히 떨어져 있었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멀리서 힘없이 빛나던 어느 집의 불빛 하나도 지금은 꺼져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집에서 도망쳐나와 오랫동안 달렸습니다. 아니, 사실 오랫동안 달렸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사라가 금방 숨이 차서 달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후로 쉬엄쉬엄 걷긴 했지만 결국 사라는 마을과 제법 떨어진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차가운 시냇물을 손으로 떠 마신 후에야 겨우 진정을 되찾은 사라는 돌다리에 머리를 기대며 오른쪽 옆에 앉아 있는 엘리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거의 노려보는 것 같았습니다. "왜? 어째서? 밤이나 아침에 풀어주겠다고 했잖아?" "나도 몰라ㅡ. 연락은 없고 경찰은 쳐들어오고." 영문도 모른 채 이런 곳까지 왔을 뿐더러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엘리어스는 힘없이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경관에게 구해달라고 소리 지를걸!" "그, 그런 짓을 했더라면ㅡ." "그런 짓을 했더라면?" "그, 그냥 놔두지 않았을 거야!" "뭐야! 건방지게! 너 하나쯤은 하나도 겁나지 않아!" "그럼 왜 안 도망쳤냐!" 이미 대화는 말다툼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사라는 엘리어스의 기분 따윈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물어뜯을 듯한 기세로 대꾸했습니다. "그 수염 난 사람이 무서워서 그랬다, 왜! 너 따윈 하나도 안 무서워!" "……." "그리고! 이런 곳에 있다가 나쁜 사람한테 습격당하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너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지켜줄 수 있어?" 그럼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 안 되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엘리어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힘없이 고개를 숙여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거북이처럼 머리를 감추고 도망치는 엘리어스의 모습을 보자, "……." 사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어스는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잠들어버렸습니다. 사라가 두 번쯤 말을 걸었지만 대답은 없었습니다.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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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라는 당연한 듯이 자기 옆에 놓여 있던 담요를 펼쳐서 엘리어스에게 반을 덮어주었습니다. 좀처럼 깨지 않는 엘리어스의 옆에 앉아서 사라는 나머지 반으로 자신의 몸을 감쌌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그대로 잠들었습니다. 아침. 서늘한 가을 새벽이 찾아왔습니다. 세상은 푸르스름한 어둠에 잠겨 있었습니다. 바람도 없고 새들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소리 없는 세계. "응…?" 엘리어스는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는 곧 자신이 눈을 감았던 장소에 눈을 감았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몸에 담요가 덮여 있다는 것도. "앗!" 허둥지둥 왼쪽 옆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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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옆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아…." 엘리어스가 절망에 빠져 반쯤 울먹이며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어머! 깼니?"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두 갈래로 땋은 머리가 거꾸로 늘어져 있었습니다. 위아래가 거꾸로 뒤집힌 주근깨투성이 얼굴이 보였습니다. 엘리어스는 멍하니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사라가 씩씩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오늘은 어떻게 할래? 네가 어떻게든 해줄 거지?" "뭐? 저기…." 잠시 혼란에 빠졌던 엘리어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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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래!" 라고 외치며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 세 사람을 찾아서 합류하는 거야! 쉽게 잡힐 사람들이 아닌걸! 만나면 지시를 내려줄 거야! 경찰에 잡히지 않았다고 다들 칭찬해줄 거야! 그리고 사라도 풀어줄 거야!" 엘리어스는 기쁜 듯이 말했습니다. 사라는 일단 머리를 거두고 다리 옆에서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엘리어스 앞에 서서 물었습니다. "그리고?" "어쨌든 가자! 그 사람들을 찾아보자!" "어디에서 무슨 수로? 이 나라는 넓어. 게다가 이동을 하려면 돈이ㅡ." "걱정 마!" 엘리어스는 그렇게 말한 후 입을 굳게 다물고 자신의 발 밑에 있는 작은 나무상자를, 자신의 방에서 가져온 나무상자를 물끄러미 응시했습니다. "……." 그리고 발로 힘껏 밟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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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가벼운 파괴음과 함께 나무상자는 쉽사리 부서졌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라의 눈앞에서 엘리어스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나무상자의 잔해에서 뭔가를 주워 모았습니다. 그것은 20개가 조금 못 되는 동전이었습니다. 대부분 싸구려 구리동전이었습니다. "내가 저금한 돈이야. 사고 싶은 게 있어서 열심히 모았어. 굉장하지?" 엘리어스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손 안에 있는 자신의 전 재산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며칠 동안 식비와 이동비로 쓸 수는 있겠지만 저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이걸로 아침을 먹고 마차를 타자!" "…괜찮겠어?" 엘리어스는 사라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가자고 말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재킷 안주머니에 동전을 넣으며. 사라는 잠시 산산조각 난 나무상자를 응시했습니다. "……." 그리고 엘리어스의 뒤를 쫓아 다리 아래에서 나왔습니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이 차츰 밝게 물들어갔습니다. 차츰 밝아오는 창 밖을 바라보며 키노는 작게 중얼거렸다. "헛짚었나보네…." 키노는 낡고 더러운 침대 위에 앉아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안 돌아오네." 에르메스가 말했다. 키노는 벌떡 일어서서 왼손에 들고 있던 <숲의 사람>을 홀스터에 꽂으며 말했다. "다음 행동 개시." 새벽에서 일출로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세상이 점점 밝아지고 하늘이 점점 푸르게 물드는 가운데. "역시 로브 씨의 차야." 엘리어스와 사라는 넓은 길에서 커브를 돌아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숲 속의 샛길에 세워놓은 검은 차 옆에 서 있었습니다. 차를 발견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습니다. 이쪽으로 왔을 거라는 생각에 요금을 지불하고 마차를 탄 두 사람은 모퉁이 앞쪽에서 차를 발견하고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습니다. 엘리어스는 차 문을 당겨보았습니다. 잠겨 있어서 열리지 않았습니다. "돈은 숲 속에서 받는다고 했어. 찾아보자" 차 안을 들여다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엘리어스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곤경에 처했을지 모른다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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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는 입을 다문 채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하지만 어디에서 무슨 수로? 사방이 숲이잖아." 엘리어스는 아무 말 없이 좌우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이쪽일 거야! 아마도!" 아무 근거도 없는 그 말에 사라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찾으러 가자!" 하지만 반론을 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성큼성큼 숲 속으로 걸어가는 엘리어스의 뒤를 쫓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한 것은ㅡ. 세 사람의 무참한 시체였습니다. 천을 찢는 듯한 높고 긴 비명이었다. 엘리어스와 사라가 앞쪽에 몰려 있는 새들을 발견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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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주저 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새들이 날아가고 그곳에서 뭔가 붉은 물체가 보였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반쯤 뜯어 먹힌 얼굴과 머리, 수염이 보였다. 유안이었다. 사라는 비명을 질렀다. "……." 엘리어스는 눈을 크게 뜨고 이를 딱딱 부딪히며 그 광경을 보았다. 눈앞에 반쯤 뜯어 먹힌 유안의 머리가, 오른쪽 옆에 팔다리도 얼굴도 없는 양복을 입은 인간의 몸통이, 그리고 왼쪽 옆에 얼굴이 새까맣게 타버린 로브가 쓰러져 있었다. 주위에는 온통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었다. 타고 남은 지폐의 잔해가 아침 이슬에 젖어 낙엽에 섞여 있었다. "어, 째서ㅡ. 왜…?" 엘리어스가 중얼거림과 동시에 그의 뒤에서 사라가 털썩 주저앉았다. 정좌 자세에서 다리를 살짝 벌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비명 후에 처음으로 흘러나온 말은ㅡ. "역시…, 역시…." 그 말을 들은 엘리어스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사라를 돌아보았다. 아직 팔다리가 떨리고 어금니가 딱딱 부딪쳤다. 그래도 엘리어스는 사라에게 물었다. "'역시'? 그게 무슨 뜻이지?" 사라는 양손으로 앞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엘리어스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역시 죽이려는 거야! 내가 죽길 바라는 거야!" "무슨 소리야?" "'그녀'가 죽었으니까! 나도 죽길 바라는 거야! 난 필요 없어! 난 더 이상 필요 없어! 난 더 이상 필요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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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난 더 이상 필요 없는 거야! 필요 없는 거야! 필요 없는 거야!" 되풀이되는 외침. 앞머리를 쥐어뜯을 듯이 힘이 들어간 팔을 바라보며 엘리어스는 사라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 엘리어스는 다시 한 번 유안을 바라보았다. 떨림은 멈춰 있었다. 수염이 돋은 남자의 코 위는 원형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으로 뭉개져 있었다.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아래로 움직인 엘리어스는, "……." 유안의 양복 오른쪽 안에서 검은 물체를 발견했다. "이젠 필요 없는 거야…." 엘리어스는 헛소리처럼 중얼거리는 사라를 남겨두고 유안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일곱 걸음 정도 걸어서 그의 시체 앞에 섰다. "내가…, 지켜야 해…." 엘리어스는 시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피 냄새가 풍기는 안주머니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검은 물체를 움켜잡고 그것을 당겼다. 엘리어스는 숨을 내쉬며 그것을 응시했다. 소음기가 달린 가느다란 자동식 패스에이더. 그립이 가늘기 때문일까, 오른손에 쥐자 방아쇠에 손가락이 닿았다. 엘리어스는 왼손으로 안전장치를 내리고 오른팔을 들었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눈앞에 있는 작은 나무줄기를 겨눴다. 방아쇠를 당기자 피융 하는 맥이 빠질 만큼 작은 소리와 함께 탄환이 발사되었다. 탄환은 대충 엘리어스가 겨눴던 곳에 맞았다. 손에 작은 반동이 느껴졌다. 금색 탄피 하나가 오른쪽 옆으로 날아갔다. "……."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움찔 떨긴 했지만 엘리어스는 이윽고 손 안의 무기를 힘껏 움켜쥐었다. 엘리어스는 몇 번이나 실패한 후 안전장치를 걸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유안의 오른쪽 안주머니를 뒤졌다. 그곳에는 탄환을 넣은 묵직한 예비 탄창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오른손에 패스에이더, 왼손에 두 개의 탄창을 든 채 엘리어스는 몸을 일으켰다. 거의 동시에 태양이 숲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숲 속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엘리어스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사라를 향해 외쳤다. "도망치자!" 십자선이 그려진 렌즈 안에서 엘리어스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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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를 건너 수백 미터 떨어진 숲 속에서 몇 배로 확대된 엘리어스의 모습을 십자선의 중심에 맞추며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역시. '범인은 범행현장에 돌아오는 법이다'." "그거 누가 한 소리야?" "언제였더라, 어디선가 읽은 책에 나온 말이야. '어쩌구저쩌구 살인사건'." "좀 별로네. 무엇보다도 이 경우 살인범은 키노잖아. 게다가ㅡ." 엘리어스를 지켜보고 있던 것은 키노였습니다. "모토라도를 사격대로 쓰다니 너무해. 삼각대를 써." 검은 재킷 차림의 키노는 센터스탠드로 세워둔 에르메스의 시트에 <플루트>를 얹고 한쪽 무릎을 세운 자세로 표적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키노는 왼쪽 눈을 뜬 채 오른쪽 눈으로 저격용 스코프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거치적거리는 모자챙은 살짝 구부려서 위로 올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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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지금 엎드리면 아침 이슬 때문에 배가 축축하게 젖는단 말이야." 키노가 말했습니다. "프로 저격수가 들으면 울겠다." 에르메스는 진심으로 기가 막혀했습니다. 키노와 에르메스는 엘리어스가 있는 곳과 늪을 사이에 끼고 수백 미터 떨어진 숲 속에 있었습니다. 세 사람이 폭발로 사망한 곳이 수많은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기적처럼 절묘한 위치였습니다. 또한 유일한 저격 포인트이기도 했습니다. 땅에는 마른 낙엽이 융단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에르메스는 저쪽에서 보이지 않도록 나뭇가지를 여러 개 얹어서 위장해놓았습니다. <플루트>의 총신에도 낙엽을 붙이고 키노의 모자 위에도 잔뜩 올려놓았습니다. "아무튼…, 기다린 보람이 있군." 둥근 스코프 안에서 소년이 움직였습니다. 태양이 떠올라 주위가 밝아진 덕분에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소년은 시체의 주머니를 뒤져서 지갑을 꺼내고 있었습니다. "함께 있는 건 역시 그 소년인 것 같군. 협박했다는 건 역시 거짓말인가?" "내 생각엔 속아서 이용당하는 것 아닐까 싶은데ㅡ." 키노는 소년의 움직임을 따라 십자선을 움직였습니다. 검지가 방아쇠로 다가갔지만 아직 닿지는 않았습니다. 소년의 뒤에는 소녀가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소년과 체격은 비슷했지만 두 갈래로 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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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때문에 소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에르메스가 작게 말했습니다. "실수로 먼저 쏘지 마. 체격이 비슷하니까." "걱정 마. 이런 경우 패스에이더를 들고 있는 쪽이 범인이고 들고 있지 않은 쪽이 인질이야." "그거 참 알기 쉽군." "저건 22 LR탄 패스에이더로군. 나중에 탄환을 뺏을까? ㅡ지금은 살짝 겹쳐 있어서 쏘기 힘들군. 뼈에 맞아서 엉뚱한 방향으로 튕기기라도 하면 곤란하거든." 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또다시 표적을 조준했습니다. 시체를 뒤지던 소년이 이윽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첫발이 빗나가서 엎드리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져. 한 발로 끝낼 수 있으면 좋은데…." 소년이 소녀의 옆에 서서 뭔가를 말했습니다. 키노의 시야에서 겹쳐 있던 두 사람이 떨어졌습니다. 어느 한쪽을 겨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키노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닿았습니다. 키노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동그란 렌즈의 십자선이 살짝 움직여 표적인 인간의 가슴에 정확히 멈췄습니다. 그리고ㅡ. 갑자기 새까매졌습니다. "?" 키노는 당황하며 왼쪽 눈을 떴습니다. 그러자 황당한 광경이 눈에 비쳤습니다. <플루트>의 총신 끝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서 쉬고 있었습니다. "이봐, 비켜." 키노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플루트>를 가볍게 흔들었습니다. 새는 3초 후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틀렸어…." 또다시 스코프를 들여다본 키노의 눈에 비친 것은 거의 하나로 겹친 채 숲 너머로 사라져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키노는 한숨을 쉬며 <플루트>를 올렸습니다. 머리와 총신에서 낙엽이 팔랑팔랑 떨어졌습니다. "또 놓쳤어, 키노?"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던 키노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대답했습니다. "에르메스가 늪 위를 달릴 수 있으면 쫓아갈 수 있는데." "그건 무리야." 키노는 또다시 작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아지트로 돌아가진 않을 테고 다른 빈민가로 도망칠지도 몰라…. 사람이 많은 곳으로 도망치면 찾기 힘든데." "까딱하면 내일 저녁까지 일이 끝나지 않을지도."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피하고 싶어." 키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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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 위로 오른팔을 어루만졌다. "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셔츠에 새빨간 얼룩이 번져갔다. "어? 아…? 으아아!" 단숨에 아픔이 퍼졌다. 자신이 패스에이더에 맞았다는 사실이 겨우 이해가 되었다. 그는 피가 흐르는 오른팔을 누르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마, 맞았어…. 제기랄! 맞았다!" 앞부분은 신음, 뒷부분은 외침. 소년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특히 엘리어스에게 다가가던 소년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리더에게 모여드는 동료들을 보고 곧 발걸음을 돌렸다. 즉 도망쳤다. 엘리어스는 양손으로 패스에이더를 겨눈 채 소년들에게 다가갔다. 다섯 소년은 한 덩어리로 뭉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괴물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엘리어스를 바라보았다. 엘리어스는 패스에이더를 겨눈 채 3미터 정도 다가갔다. "사라져주세요. 부탁합니다." 네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는 리더의 양쪽 겨드랑이와 다리를 각각 붙잡았다. "아야! 아파! 그만둬, 이 자식들아! 내려줘!" 그리고 그런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그를 들고 줄행랑을 쳤다. 다섯 명의 소년이 사라진 후 엘리어스는 패스에이더에 안전장치를 걸었다.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안주머니에 넣고 유령처럼 묵묵히 서 있는 사라의 손을 꼬옥 잡은 후. "도망치자. 얘기는 그 다음에 들을게." 다섯 명의 소년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정오가 지난 시각이었습니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는 태양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쪽 하늘은 구름의 양이 조금 늘어 있었습니다. 바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불고 있었습니다. 곧 날씨가 나빠질 것이 분명한, 그런 가을의 오후였습니다. "열두 살 정도의 소년과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소녀? 지저분한 몰골의? 이 거리에는 그런 애들이 우글우글한데." 모토라도를 타고 사람을 찾아다니는 여행자의 질문에 아주머니는 귀찮은 듯이 대답했습니다. 산더미 같은 빨래를 머리에 인 아주머니는 키노와 에르메스의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이곳은 빈민가 중앙 거리. 코트를 걸치고 모토라도를 탄 키노는 사람들 속에서 무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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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어?" 리더가 오른쪽 아래로 얼굴과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왼손을 들어 눈에 띄었습니다. "이쪽으로 도망쳤다면…, 빈민가는 여기밖에 없는데ㅡ. 찾기가 힘들 것 같군…. 사람들에게 물어도 소용없고." 키노가 말했습니다. 그 아래에서 지금은 엔진이 꺼져 있는 에르메스가 그러게 하고 동의를 표했습니다. 에르메스의 뒷부분 짐받이에는 앞뒤를 분해한 <플루트>가 천으로 싸여서 묶여 있었습니다. 에르메스가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키노가 대답했습니다. "배도 고프고ㅡ, 이 일 포기할까." "벌써 포기냐!" "그치만, 응?" "'응?' 좋아하네. 아무리 사격술이 서툴러도 마구 쏘다보면 언젠가는 맞는 법!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 수사의 기본은 착실한 탐문이야." 키노는 나 참, 이럴 땐 꼭 안 틀리더라 하고 중얼거리며 에르메스의 시동을 걸려고 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응?" 키노는 눈치 빠르게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팔에서 가늘게 피를 흘리며 거리 옆에 주저앉아 있는 한 소년. 그리고 그를 걱정스럽게 지켜보는ㅡ이라고 말하면 듣기에는 좋지만 실은 어쩌면 좋을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네 명의 소년들이었습니다. "……." 키노는 모토라도에서 내렸습니다. 에르메스를 밀며 다섯 명의 소년에게 천천히 다가갔습니다. 총에 맞은 소년은 피에 젖은 셔츠를 걷고 짜증스럽게 상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작은 상처 자국을 누르고 있다가 피가 멎었나 싶어서 손을 떼면 다시 흘러나오는 바람에 또 누르기를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습니다. 이러다 죽는 것 아니야? 병원에 가자! 경찰에 알려! 하며 우왕좌왕하는 다섯 소년들의 앞으로 키노는 에르메스를 밀며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찰칵 소리를 내며 센터스탠드를 내렸습니다. "저, 실례합니다." 키노가 말을 건넨 후에야 소년들은 겨우 자신들을 바라보는 젊은 여행자의 존재를 깨달았습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한 소년이 물었습니다. 팔을 누르고 있던 소년도 고개를 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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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패스에이더에 맞은 상처죠. 22구경 저속 탄두의 상처 같은데. 맞은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군요." 키노가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배려하는 태도는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쨌다고!" 리더는 식은땀을 흩뿌리며 위엄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답했습니다. "가르쳐주십시오. ㅡ누가 쏜 겁니까?" "그,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혹시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소녀를 데리고 다니는 열두 살 정도의 소년 아니었습니까?" 키노가 그렇게 물은 순간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습니다. 소년들 모두 일제히 입을 다물었습니다. "정확히 짚었나보군. ㅡ키노는 항상 운 하나는 좋다니까." 에르메스가 기쁜 듯이 말했습니다. 키노는 멍하니 서 있는 다섯 소년들에게, 특히 패스에이더에 맞은 소년에게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리더가 필사적으로 말했습니다.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려고! 너랑은 상관없잖아! 난 지금 널 상대해줄 기분이 아니야! 꺼져!" "아, 배고픈 키노에게 그런 말을 해선 안 되는데. 지금 실수한 거야." 그러나 에르메스의 그런 발언에 소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기가 죽고 말았습니다. "뭐, 뭐야…." 그리고 키노가 왼손으로 <숲의 사람>을 뽑아 눈앞에 겨눴을 때 소년은 기가 죽는 것을 넘어 공포를 느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실 패스에이더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싫지만 빨리 끝내고 싶어서요ㅡ. 가르쳐주지 않으면 쏴도 될까요?" 키노가 길을 묻는 것처럼 태연한 어조로 물었습니다. 소년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습니다. "시, 싫어요. 돼, 됐어요…." "아, 그래! 그럼 빨리 아는 걸 모조리 불어, 베이비! 난 성질이 급해! 배가 고플 때에는 특히!" 에르메스가 말했습니다. 부들부들 떠는 소년들을 흘낏 바라보며, "……." 키노는 오른손으로 에르메스의 탱크를 내리쳤습니다. "아야." 엘리어스와 사라는 빈민가를 빠져나와 양쪽에 밭이 펼쳐져 있는 길을 걷고 있었다. 엘리어스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라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직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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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멀리 수확이 끝난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왔다! 저걸 타자. 어딘가 다른 곳으로, 안전한 곳으로ㅡ." 엘리어스는 겨우 나타난 소형 트럭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오른쪽 운전석에서 창문을 활짝 열고 팔꿈치를 괸 채 운전하고 있는 것은 사람 좋아 보이는 농부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두 사람 조금 앞에서 갓길에 트럭을 세우고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니?" "부탁드려요. 빨리ㅡ,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적지만 사례도 드릴 테니까 잠시만 저희를 태워 주세요!" 엘리어스의 필사적인 표정과 손가락 끝에 들고 있는 동전을 본 아주머니는 잠시 고민한 후 옆 마을에 데려다주면 되겠냐고 물었다. "그 정도면 돼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엘리어스는 그렇게 말하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조수석 문을 열고 먼저 사라를 태운 다음 자신도 트럭에 올라탔다. 문이 닫힌 후 트럭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엘리어스는 아주머니에게 동전을 내밀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래, 받아둘게." 아주머니는 동전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가출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ㅡ, 뭐 사정은 묻지 않으마. 나도 옛날에는 말썽쟁이였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윙크했다. 엘리어스는 또다시 고맙다고 인사했다. 트럭이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아주머니가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는 발에서 가볍게 힘을 뺐다. 빨라지기 시작했던 속도가 느려진 것과 다른 엔진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엔진소리는 오른쪽 뒤에서 옆으로, 그리고 오른쪽 앞으로 지나갔다. 즉 트럭을 추월했다. 별로 깨끗하지 않은 앞 유리창 너머로 엘리어스의 시야에 한 대의 모토라도가 들어왔다. 은색 탱크가 둔탁하게 빛나는 모토라도. 운전사는 검은 재킷을 입고 챙과 귀를 덮는 속대가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토라도 뒷부분 짐받이에는 갈색 코트로 감싼 뭔가가 묶여 있었다. 운전사가 모토라도를 몰며 뒤를 돌아보았다. 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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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있는 운전사의 눈과 엘리어스의 눈이 마주쳤다. "뭐야, 추월했으면 빨리 갈 것이지." 아주머니가 불쾌한 듯이 그렇게 말했지만 모토라도는 트럭 바로 앞에서 같은 속도로 달리기를 계속했다. "설마…" 엘리어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림과 동시에 운전사가 핸들에서 왼손을 뗐다. 그리고 등에서 패스에이더를 뽑았다. 조금 전의 일입니다. "저거 아니야?" "그런 것 같은데." 에르메스와 키노가 양옆에 밭이 펼쳐져 있는 길을 달리며 말했습니다. 길 앞쪽에 작은 트럭이 서 있었습니다. 그 트럭에 소년과 소녀가 올라타는 것이 보였습니다. 꽤 멀었지만 두 갈래로 땋은 소녀의 머리가 보였습니다. "한 사람은 소년, 한 사람은 두 갈래 머리. 정보대로야." 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에르메스의 액셀러레이터를 당겨 속도를 높였습니다. 고개를 돌려 다른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달리기 시작한 트럭을 뒤쫓았습니다. 그리고 추월했습니다. "일단 확인해봐야지. 다른 사람이면 큰일이니까." 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트럭을 추월한 직후 속도를 늦췄습니다. 트럭과 같은 속도로 달리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빈말로라도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는 앞 유리창 안으로 두 갈래로 머리를 땋은 소녀와 소년의 보였습니다. 소년과 키노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2초 정도 서로를 응시한 후. "날 원망하지 말아라." 키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쪽에 차가 없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핸들에서 왼손을 떼고 등에서 <숲의 사람>을 뽑았습니다. 재빨리 안전장치를 풀고 에르메스를 트럭 오른쪽 앞으로 움직이며 발포. 탄환은 운전석 옆의 사이드미러에 구멍을 뚫었습니다. 작은 불꽃이 튀었습니다. "히익!" 아주머니의 얼굴이 공포로 얼어붙었다. "멈춰요!" 키노는 있는 힘껏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히익ㅡ!" 아주머니의 발이 액셀러레이터에서 떨어졌습니다. "멈추지 마!" 엘리어스는 큰 소리로 외치며 오른손으로 패스에이더를 뽑아 아주머니를 겨눴다. 동시에 왼손으로 가운데 앉아 있는 사라의 머리를 눌러 인사를 하는 것처럼 머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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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가서 그녀의 팔을 난폭하게 움켜쥐며 고개를 치켜들게 했다. "역시 여자였군! ㅡ어이! 여자다, 여자!" 거의 반응이 없는 사라의 얼굴을 바라보며 소년은 묘하게 기쁜 듯이 말했다. 소년은 넋을 놓고 있는 사라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 후 그대로 어깨를 끌어안았다. "꼬마! 이 계집애 잠깐 빌린다!" 소년은 쓰러져 있는 엘리어스에게 그렇게 외친 후 웃는 얼굴로 리더를 바라보았다. "꽤 귀엽습니다! 우리 애인으로 삼죠!" "우리? 리더가 먼저 맛보고 다음은 나 아니냐?" 다섯 명의 소년은 멋대로 지껄이며 사라의 어깨를 안은 채 그녀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그만둬요." 뒤에서 엘리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한 소년이 굵은 목소리로 위협했다. 다섯 명의 소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공허한 눈빛으로 여섯 명을 바라보는 엘리어스였다. "지금 네가 지껄인 것 맞냐?" 엘리어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애를 데려가지 마세요." 리더가 가볍게 고개를 저어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까불지 마. 혼나고 싶냐?" 한 소년이 그렇게 말하며 엘리어스에게 다가왔다. 깍지를 낀 손에서 우두둑 소리가 울렸다. 소년이 세 걸음 정도 다가왔을 때 엘리어스는 재킷 아래에서 유안의 유품을 꺼냈다. 그리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엘리어스는 천천히 그것을 들어 소년을 겨눴다. "난 그 애를 지켜야 해요….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과 약속했어요…. 약속했어요…. 약속했어요. 그 사람은 나를 믿고 맡겨줬어요." 엘리어스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으로 소년을, 그리고 그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라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그거 패스에이더 아니냐?" 소년이 걸음을 멈췄다. "야, 쫄지 마! 어차피 장난감일 게 뻔해!" "그것도 뺏어 와!" 그 뒤에서 다른 소년들이 무책임하게 떠들었다. 리더가 오른팔을 흔들며 명령했다. "빨리 처리해라. 저 장난감도 가져와." 다음 순간 그의 팔에 구멍이 뚫렸다. 발포음은 거의 없었다. 엘리어스에게 다가가는 소년의, 돌을 밟는 발소리만뻗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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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난 필요 없으니까! 이젠 쓸모없으니까!" 겨우 대답이 돌아왔지만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엘리어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뭐야? 그게 무슨ㅡ." "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엘리어스의 물음을 중단시켰다. 엘리어스는 흠칫 놀라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1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다섯 소년이 서 있었다. 이 거리에 사는, 별로 품행이 좋지 않아 보이는 소년들. "……." 엘리어스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다섯 명의 불량소년은 토대 안으로 들어왔다. 가운데 서 있는 조금 어른스러워 보이는 키가 큰 소년이 리더인 듯했다. 그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있었다. 빈말로라도 호의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너, 이 근처에서는 못 보던 얼굴인데." 소년은 조용히 말하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엘리어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뭡니까?"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사라를 흘낏 바라보면 퉁명스러운 얼굴로 짧게 물었다. "지금 '뭡니까'라고 했냐, 이 얼간아! 네가 지금 누구랑 얘기하고 있는지 알아?" 리더 옆에 있는 부하 소년이 느닷없이 굵은 목소리로 외쳤다. 다른 소년들도, "까불지 마! 먼저 머리부터 숙여!" "여긴 우리의 신성한 장소야. 누구 허락을 받고 여기 들어온 거냐?" 등등 큰 소리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위압적인 말을 되풀이했다. 그들의 목적은 명백했다. 엘리어스를 위축시키는 것이었다. "……." 엘리어스는 아무 말 없이 다섯 명의 소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야? 피를 보고 싶냐?" 그 말에 엘리어스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눈앞에 소년들이 아닌, 피투성이 고깃덩이로 변해버린 유안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생각대로 위축되지 않는 엘리어스를 바라보며 네 소년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소년들은 그렇게 말하며 대답을 하기도 전에 체격에서 열세인 엘리어스를 힘껏 밀쳤다. "앗ㅡ. 크윽!" 돌투성이 바닥에 등을 부딪힌 엘리어스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른 소년이 고개를 숙인 채 그들의 존재를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사라에게 숙이게 했다. 바로 옆에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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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외쳤다. "신을 겨누고 있는 패스에이더와 그 작고 검은 구멍을 본 순간 아주머니의 얼굴이 또다시 공포로 일그러졌다. "멈추지 마! 계속 달려!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밟아ㅡ!" 엘리어스는 핏발 선 눈으로 아주머니를 노려보며 절규했다. "히익!"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 있는 패스에이더에 공포를 느낀 아주머니는 반쯤 발을 뗐던 액셀러레이터를 난폭하게 밟았다. 트럭은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덜컹덜컹 흔들리며 난폭하게 속도를 높였다. "어라?" 트럭에 뒤처진 에르메스가 중얼거렸다. "저쪽도 필사적인가보군." 키노가 <숲의 사람>을 홀스터에 넣으며 말했습니다. 트럭은 부서지지 않을까 싶을 만큼 무모하게 속도를 높였습니다. 키노는 다시 왼손으로 핸들을 잡았습니다. 에르메스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할 거야, 키노?" "타이어를 쏠까 했지만 관계없는 사람을 말려들게 할 수는 없어." "그럼?" "저기 타고 있다는 건 알았으니까 저쪽이 지쳐서 멈출 때까지 계속 뒤를 쫓아야지." "알았어." "솔직히 그만 경찰에 맡기고 싶어." 키노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투덜거린 후 창 밖으로 패스에이더를 내밀고 쏠 수 없도록 조금 거리를 두고 트럭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뭐, 뭐야? 난 이런 건 질색이야…. 제발 그만해…." 운전석의 아주머니가 반쯤 울먹이며 말했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ㅡ죽고 싶지 않으면 도망쳐!" 엘리어스는 패스에이더를 겨누며 인정 사정 없이 외쳤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사라는 마치 죽은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어느 정도 속도를 높인 뒤부터 트럭은 엔진 소리만 요란하게 울릴 뿐 더 이상 빨라지지 않았다. 엘리어스는 왼쪽 사이드미러로 시선을 던졌다. 모토라도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트럭을 따라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엘리어스는 몸을 돌려 아주머니를 겨누고 있던 패스에이더를 창 밖으로 내밀었다. 모토라도를 겨누려고 한 순간 모토라도가 미끄러지듯 움직여 시야에서 사라졌다. "틀렸어, 틀렸어, 틀렸어." 엘리어스는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어, 어쩌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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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아주머니가 울먹이며 외쳤다. "계속 달려!" 엘리어스는 반사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이대로는 틀렸어…." 사이드미러를 쳐다보자 또다시 추격자가 비쳤다. 엘리어스는 고개를 앞으로 향했다. 그의 눈앞에는 왼쪽에서 오른쪽 앞으로 얕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길은 앞쪽에서 약 10미터 길이의 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엘리어스가 외쳤다. "다리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뭐?" "잔말 말고!" 아주머니는 난폭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트럭의 속도가 갑자기 떨어졌다. 엘리어스는 앞으로 고꾸라지는 사라의 몸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트럭은 다리 앞에서 급정지했다. 그리고 왼쪽으로 가파르게 꺾어서 차 한 대 정도의 넓이밖에 안 되는 강의 제방을 달리기 시작했다. 엘리어스는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뒤를 돌아보았다. 모토라도가 막 방향을 바꿔 트럭을 바싹 쫓아오고 있었다. "모토라도라면 강을 건널 수 없을 거야…." 트럭은 울퉁불퉁한 제방을 계속해서 달렸다. 오른쪽 약 1미터 아래에는 중간 크기의 돌이 잔뜩 굴러다니는 강변. "좀 더 빨리, 좀 더 빨리!" 트럭은 수십 초 동안 질주했다. 뒤를 돌아봐도 길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주위가 온통 밭으로 변할 때까지 달렸을 무렵. "강으로 내려가요!" 엘리어스는 조금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뭐? 뭐라고?" 아주머니가 되물었다. "단숨에 강으로 내려가서 그대로 강을 건너요! 트럭이라면 가능할 거예요! 전에 화물 트럭이 건너는 걸 본 적이 있어! ㅡ저 모토라도를 따돌리면 우린 내릴 테니까! 사라질 테니까!" 아주머니는 투덜거리며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아아, 나도 몰라!" 트럭은 비탈에서 비스듬하게 기울어 거꾸로 뒤집히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 제방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난폭하게 흔들리며 조약돌 위를 달렸다. 트럭은 곧 강으로 돌진해서 요란한 물보라를 튀겼다. 그리고 그대로 강 위를 달렸다. 타이어가 젖은 돌 위에서 헛되이 돌았다. 엔진 소리가 급격하게 높아졌다. 트럭은 잠시 속도를 줄였다가 또다시 마찰력을 되찾고 덜컹거리며 속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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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었다. 첨벙첨벙 물보라를 튀기며, 앞뒤양옆으로 세차게 흔들리며, 트럭은 조금 비스듬한 각도로 강을 건넜다. 타이어는 거의 물에 잠겨 있었고 활짝 열린 창문으로 물보라가 운전석까지 들이쳤다. "더 빨리! 더 빨리!" 엘리어스가 외쳤다. 아주머니는 자포자기 상태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트럭은 드디어 완전히 강을 건넜다. 그리고 강변에서 다시 속도를 높여 제방을 단숨에 올라갔다. 너무 속도를 내는 바람에 제방을 뛰어넘어 밭으로 떨어질 뻔했지만 그 직전에 간신히 버텼다. "됐다! 아주머니! 도망쳐요! 밭 안으로!" 트럭은 조금 앞으로 달려간 후 밭두렁으로 꺾어졌다. 강을 등지고 밭 안을 달려서 앞쪽에 펼쳐져 있는 숲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쩌지…. 큰일났네…. 너무 방심했어." 키노는 멀어져가는 트럭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말했습니다. "굉장해. 저렇게 작은 트럭으로 강을 건너다니. 액셀러레이터를 조금이라도 늦췄더라면 배기관에 물이 들어갔을 거야. 배짱 있는 멋진 운전사야. 적이지만 연탄스러워." 에르메스도 찬사를 보냈습니다. 키노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하늘에는 조금 전보다 구름이 더욱 두껍게 깔려 있었습니다. "…'경탄'?" "그래, 그거!" 에르메스는 그렇게 말한 후 입을 다물었습니다. 한 사람과 한 대는 제방 위에 덩그러니 서 있었습니다. "에르메스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기능이 좀 더 높았더라면 쫓아갈 수 있었을 텐데." "모토라도를 탓하지 마. 잽싸게 타이어를 쐈으면 됐을 거 아니야." 이미 지난 일을 따져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법. "놓쳤어." "놓쳤네." 키노와 에르메스는 일단 사실을 인정한 후 다음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일단 다리로 돌아가서 강을 건넌 다음 타이어 자국을 뒤쫓는 게 좋겠어." "그럴 수밖에 없겠네." 초록색 잎사귀가 남아 있는 침엽수 숲 입구. 밭과 숲의 경계에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거 받으세요. 이런 걸로 기분이 풀리시진 않겠지만…." 엘리어스는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들어 갖고 있던 지폐를 전부 건넸다. 죽은 사람에게서 빼앗은, 피가 묻지 않은 지폐였다. 엘리어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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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트럭 운전석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 아주머니는 아무 말 없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엘리어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그녀는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사람처럼 줄곧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도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조금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너, 이걸 내게 주면 앞으로 쓸 돈은 있어?" "아뇨…." "앞으로 어쩔 거니?" "이 애를 데리고 도망칠 거예요." "어디로?"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 이 애를 지켜야 해요. 약속했어요!" "그럼ㅡ, 그 돈은 네가 갖고 있으렴." "네? 하지만ㅡ." "잔말 말고!" 마지막으로 화가 난 듯이 소리를 지른 후 아주머니는 문득 미소를 지었다. "가출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ㅡ, 뭐 사정은 묻지 않으마. 나도 옛날에는 말썽쟁이었으니까. 이렇게까지 막나가진 않았지만." 그리고 가볍게 윙크를 던졌다. 엘리어스는 감사와 사죄의 말을 되풀이했다.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 말을 들으며 아주머니는 트럭을 출발시켰다. 트럭은 두 사람을 남기고 도망칠 때와 똑같은 속도로 달려서 곧 작아져갔다. 그 위에 펼쳐진 하늘에는 아까보다 두꺼운 구름이 깔려 있었다. 바람도 아까보다 강했다. "가자, 사라." 엘리어스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녀에게 말을 건넸다. "……."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사라는 손을 잡아끌자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어두운 숲 속으로 들어갔다. 부드러운 흙 위에 발자국이 남았다. "여기야. 타이어 자국, 작은 발자국. 두 사람의." "응, 분명해." 키노와 에르메스는 숲 앞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에르메스는 센터스탠드로 서 있었고 키노는 발자국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하늘은 이제 반쯤 먹구름에 뒤덮여 있었습니다. 서쪽으로 반쯤 기울어 있을 태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르메스 넌 여기서 기다려. 쫓아갈 수 있을 때까지 쫓아가볼래." 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에르메스의 센터스탠드를 다시 한 번 단단히 세운 후 뒷부분 짐받이의 고무 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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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었습니다. 갈색 코트에 감싸여 짐받이에 묶여 있던 것은 앞뒤를 분해한 <플루트>였습니다. 키노는 앞부분과 뒷부분을 끼운 후 고정시켰습니다. 뒷부분에 달려 있는 어깨끈을 앞부분에 걸었습니다. 앞부분 옆에 붙어 있는 원통형 소음기는 전체 길이가 길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대로 두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코프 앞뒤의 커버를 열었습니다. 키노는 코트를 둥글게 말아서 짐받이에 묶었습니다. 뒷바퀴 양옆의 상자에서 탄환이 아홉 발 들어 있는 <플루트>의 탄창 네 개를 꺼낸 후 세 개는 분해해서 벨트의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하나는 <플루트>의 기관부에 끼웠습니다. "그럼 다녀올게. 실패해도 저녁때까지는 여기로 돌아올 거야." 키노는 <플루트>를 눈앞으로 들어올리며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사슴을 사냥하는 게 아니니까 잡은 다음 토막내면 안 돼, 키노." 에르메스가 끔찍하기 짝이 없는 농담을 던졌습니다. 키노는 오른손으로 <플루트>의 볼트를 당기며 말했습니다. "알았어. 조심할게." 그리고 손을 뗐습니다. 찰칵 하는 딱딱한 금속음이 울렸습니다. 맞으면 머리가 반쯤 날아가는 무시무시한 위력의 고속 라이플 탄. 그 한 발이 탄창에서 약실로 이동했습니다. "다녀올게." 키노는 <플루트>를 몸 앞에 들고 발자국을 눈으로 따라가며 걷기 시작했습니다. "다녀와. 선물은 필요 없어." 에르메스는 숲 속으로 사라져가는 키노를 향해 말했다. "아ㅡ, 심심해." 그리고 키노가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곧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벌써 심심하냐!" 어두운 숲 속에서 기가 막힌 듯한 키노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침엽수가 우거진 숲 속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인 듯한 다리가 있었다. 폭이 좁은 개울을 건너기 위해 통나무 몇 개를 엮어 만든 다리. 다리의 폭도 두 사람이 간신히 건널 수 있을 정도였다. 엘리어스와 사라는 이끼가 잔뜩 낀 통나무 아래에 있었다. 어두운 개울가에 앉아 있었다. "또 다리 아래로군." 엘리어스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사라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엘리어스는 몇 초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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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다문 후 이윽고 결심한 듯이 말했다. "사라! 가르쳐줘!" 엘리어스는 그렇게 말하며 사라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사라의 몸이 움찔 떨렸다. "어째서 사라 주위의 어른들이 사라를 버렸는지ㅡ, 사라는 알고 있겠지? 이유를 알고 있겠지?" "……." 사라는 고개를 들고 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죽은 사람 같은 눈으로 엘리어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르는 편이 좋을 거야…." 그녀의 입에서 오랜만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힘없는 목소리였다. 사라는 다시 한 번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모르는 편이 좋을 거야, 엘리." 엘리어스는 한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엘리어스야!" "…뭐?" "내 이름. 엘리어스. 본명이야. 엘리는 유안 씨가 지어준 가짜 이름이야. 어차피 비슷하지만. 이제부터 엘리어스라고 불러줘." "……." 사라는 잠시 진지한 표정의 엘리어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아주 살짝 가늘게 휘었다. 입가에는 웃음기가 없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천천히 부드러워졌다. "이상해. 유괴범이 인질에게 본명을 말하다니…. 이상해." "이상해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가르쳐줘. ㅡ부탁이야." "……." 사라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엘리어스를 응시했다. 그리고 몇 번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는 자신의 어깨에 놓여 있는 엘리어스의 양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어깨에서 떼어냈다. 사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통나무 다리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도록 허리를 굽히고 다리 옆으로 나왔다. 하늘은 흐리고 숲 속은 어두웠지만 사라가 서 있는 곳에는 빛이 있었다. 엘리어스는 다리 아래에서 사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가르쳐줄게ㅡ. 내가 왜 버림받았는지." 사라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 키노는 발자국을 따라 신중하게 숲 속을 걷고 있었습니다. <플루트>를 주의 깊게 겨누고 스코프로 적이 잠복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며, 그리고 발자국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발 밑과 전방과 주위를 살피며 걷고 있었습니다. 아직 키노와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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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키노에게는 그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라는 노래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오직 엘리어스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래하고 있었다. 맑디맑은 높은 목소리.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는 내용의 평범하고 흔한 러브 송이었다. 그 때문에 노래하는 사람의 가창력과 아름다운 목소리가 더욱 돋보이는 상큼한 노래였다. "……." 엘리어스는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뜬 채 그 노래를 듣고 있었다. 분명 사라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은 라디오에서 몇 번이나 들었던ㅡ. 도저히 잘못 들을 리 없는 가희의 노래였다. 그것은 하루 전의 일이었습니다. 지금 숲 속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키노와 지금 숲 밖에서 "심심해ㅡ." 라고 투덜대고 있는 에르메스는 그때 양복을 입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장소는 호텔 식당. 키노는 양복 차림의 남자들 몇 명과 중앙 부분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습니다. 다른 손님은 없었습니다. 호텔 종업원들도 물리쳐둔 상태였습니다. "제게 유괴범을 처치해달라 이 말씀입니까?" 키노가 물었습니다. 양복 차림의 남자들은 모두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괴범에게는 몸값을 지불하고 인질이 풀려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데?" 테이블 위에 서 있던 에르메스가 물었습니다.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으니 대답하겠습니다. 하지만 절대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 약속해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어차피 이틀 후에는 출국할 테니까요." "그럼 대답하겠습니다. ㅡ이번에 유괴된 소녀는 단순한 부잣집 아가씨가 아닙니다. 우리 회사의 매우 중요한 기밀을 알고 있는 소녀입니다. 유괴범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납치한 것 같습니다만…. 눈에 띄지 않도록 최소한의 경호원만 붙여뒀던 것이 이런 결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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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밀이란 뭐죠? 비밀인가?" "에르메스 씨도, 키노 씨도 모르는 편이 좋을 겁니다." "뭐 그건 묻지 않겠습니다. 흥미도 없으니까요. ㅡ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의뢰대로 유괴범을 처치하면 그 아이의 목숨도 위험해지겠죠? 그래도 좋습니까?"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었습니다. 양복 차림의 남자들은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음." "그렇군." 키노와 에르메스는 거의 동시에 눈치 챘습니다. 에르메스가 말했습니다. "입막음을 원하나보네. 아저씨들은 그 인질이 죽기를 바라는 거죠. 유괴범을 처치해달라고 의뢰하긴 했지만 목적은 그게 아니야. 인질을 없애는 게 목적인 거야." 에르메스는 인정 사정 없이 말을 이었습니다. "키노가 요란하게 유괴범을 처치하고 나서면 초조해진 유괴범들은 도망치기 위해 인질을 죽이겠죠. 그게 아저씨들이 바라는 것 아닌가. 그 애가 기밀과 함께 죽어버리는 거. 하지만 표면상, 어쩌면 심정적으로 누구도 그런 잔인한 짓을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유괴범을 죽여달라'고 의뢰한 게 아닌가요." 이번에도 대답은 침묵이었습니다. 사실상 긍정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키노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스승님의 얘기가 떠오르는군…. 그것도 비슷한 상황이었지…." 그리고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양복 차림의 남자들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키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일을 받아들일 경우 제가 얻는 것은 뭔가요?" "……." 남자들은 아무 말 없이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습니다. 머그잔 정도 크기의 나무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었습니다. "……." 상자 안을 본 키노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남자가 에르메스에게도 보이도록 상자의 각도를 바꿨습니다. "휘유ㅡ!" 에르메스는 휘파람을 부는 시늉을 하며 큰 소리로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곳에는 보석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보석은 작고 가벼운데다 어느 나라에서도 비싸게 팔리기 때문에 여행자가 갖고 다니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성공하면 이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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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 씨에게 드리겠습니다. 전부." "스승님의 얘기가 떠오르는군…." 키노는 작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의뢰의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거절하고 싶습니다." 남자들은 한순간 당황했습니다. "그럼 이것도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들은 다시금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작은 금속 덩어리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습니다. 그것을 본 키노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습니다. "아ㅡ, 이거 놀랍군." 에르메스는 호들갑스럽게, 그러나 진심으로 놀라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키노 씨가 입국하자마자 자동차 수리공장을 여기저기 찾아다녔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마모되어가는 에르메스 씨의 엔진 부품을 찾고 있다는. 하지만 이 나라에는 규격품이 없습니다. 직접 주문해서 만들려면 엄청난 돈이 들지요." "그렇습니다만…. 그럼…." 키노는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바로 그거야. 어쩌면 좋죠." 에르메스가 말했습니다. "키노 씨는 할 수 없이 부품을 포기하고 다음 나라에 희망을 걸고 있다지요?" 남자가 물었습니다. 키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다음 나라에 부품이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없을 가능성이 높지요. 만약 있다 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이라면? 완성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 지금 여기에서 손에 넣어두면 앞으로 계속 안심하실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죠." "이걸 보수로 드려도 부족하십니까?" "……." 키노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나야 대환영이지만ㅡ. 결정은 키노가 해." 에르메스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습니다. 이윽고 엘리어스의 감각을 모조리 사로잡은 채 숲 속에 울려퍼지던 가희의 노래가 끝났다. 사라는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은 후 눈을 떴다. 엘리어스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며 사라는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어째서…? 가희의 노래…? 하지만…? 아니야…." 엘리어스가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사라는 그의 앞에 서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희' 따윈ㅡ, 사실은 없어." "무슨 소리야…? 그게…. ㅡ뭐?" "실은 가짜 가희가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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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 불러올 줄이야."사람 있을 뿐이야. 한 사람은 사진을 찍거나 라디오에 출연하거나 영화 속에서 노래 부르는 시늉을 하는 가희." "……." "그리고 또 한 사람은ㅡ." 사라는 주근깨투성이 얼굴에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지었다. "노래를 부르는 가희. ㅡ그게 나야." "……." "나는 원래 고아였어. 기억은 없지만 어렸을 적 교회 앞에 버려져 있었대.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어느 자선가가 날 키워주셨어. 나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잘 불렀대. 내 기억 속에서 나는 언제나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 "……." "2년 전에 열렸던 가희 오디션은 전부 가짜야. 열심히 응모했던 소녀들에게 합격할 기회는 처음부터 없었어. 인형처럼 예쁘고 귀여운 소녀가 뽑힐 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애는 나처럼 노래할 수 없었기 때문에ㅡ." "사라가 노래한 거구나. 노래만 하는 가희가 된 거야…." "그래. 노래할 사람은 이미 나로 정해져 있었어. 그 애와 목소리가 굉장히 비슷했으니까. 난 그 애처럼 예쁜 얼굴도, 머리카락도 갖고 있지 않아. 주근깨투성이 프리마돈나 따윈 우스울 뿐이지. 하지만 그 애는 이렇게 말해줬어. '난 너처럼 노래할 수 없어. 그러니까 이걸로 충분해. 우린 둘이서 하나야. 열심히 하자'고. 그후 우리는 둘이서 한 사람의 가희가 됐어. 우린 열심히 일했어.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도록. 행복을 줄 수 있도록 노력했어. 즐거웠지. 어른들도 모두 우릴 응원해줬어. 도와줬어. ㅡ왜냐하면 우리가 필요했으니까." 엘리어스는 사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쪽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이윽고 턱 아래로 떨어져 사라졌다. 눈물은 계속되지 않았다.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사라를 버린 거지?" 엘리어스가 분개하며 물었다. 사라는 짧게 대답했다. "죽었으니까." "뭐?" "그 애가 죽었으니까. 요즘 가희의 새로운 사진을 본 적 없지? 어째서인지 알아?" "아! 설마…." 유안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엘리어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그 애, 요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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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고 있었어. 내게는 '별것 아니야 금방 나을 거야'라고 했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던 거야…." "아아…." 엘리어스는 몸을 일으켜 어두운 다리 아래에서 밝은 세상으로 나왔다. 구름이 두껍게 깔린 숲 속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애는 죽었어. 아마도 내가 유괴당했을 때 죽었을 거야. 그러니까 난 이제 필요 없게 된 거야.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거야. 필요했던 건 '우리'였으니까. '나'는 이제 필요 없는 거야." 엘리어스는 담담하게 말하는 사라에게 다가갔다. "그러니까 그들은 아마 나를 죽일 거야. 사람들이 알면 엄청난 소동이 일어날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누군가에게 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해. 수염 난 아저씨들을 죽인 건 나머지 유괴범을 화나게 해서 날 죽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야." "……." "그럼 나를 직접 죽이지 않아도 되니까. 다들 착하니까 나를 직접 죽이고 싶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난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좀 더 살고 싶어."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사라 앞에 서서 엘리어스는 양손을 뻗었다. "안 죽어. 죽게 내버려둘 줄 알고." 엘리어스는 그렇게 말하며 사라를 끌어안았다. 두 갈래로 땋은 머리와 함께 사라를 힘껏 끌어안았다. "걱정 마. 안심해. ㅡ사라는 내가 지켜줄게." "이젠 인질이 아닌데도?" 사라가 엘리어스의 품에 안긴 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가희의 반쪽'도. '인질'도 아니야. 나는 '사라'를 지킬 거야. 알겠지?" 사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그대로 막대기처럼 서 있던 사라는 이윽고 엘리어스의 얼굴 옆에서 몇 번이나 작게 코를 훌쩍였다. 엘리어스는 사라와 반대 방향을 노려보며, 어두운 숲 속을 노려보며, "절대 죽게 두지 않을 거야."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말했다. 사라가 손을 들어 엘리어스의 등을 안았다. 숲 속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또냐…." 키노는 작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 엘리어스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거기, 소년ㅡ. 넌 죽이고 싶지 않아. 필요 없으니까. 나는 빨리 그 소녀를 죽이고 이 일을 끝내고 싶어. 그런데 어째서 넌 몇 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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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나를 방해하는 거지?" 300미터쯤 떨어진 위치에서 키노는 흙 위에 엎드려 <플루트>를 삼각대에 얹고 지면에 닿을락 말락 한 높이로 겨눈 채 스코프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조금 전, 키노는 발자국을 신중하게 뒤쫓아 두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몰래 사정거리로 다가간 키노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흙 위에 엎드려서 라이플을 겨누고 스코프의 십자선 너머에 있는 소녀의 가슴을 조준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방아쇠를 당기는 것뿐이었습니다. "못살아…." 그러나 엘리어스가 방해를 했습니다. 키노는 방아쇠에서 손을 뗐습니다. 소녀를 겨눈 채 기다렸습니다. 스코프의 동그란 시야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두세 마디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키노는 기다렸습니다. 스코프 안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습니다. "빨리." 키노가 아무리 그렇게 중얼거려도 계속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습니다. "작작 좀 해라."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 키노는 기다렸습니다. 소녀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야기가 끝난 모양입니다. 키노는 숨을 들이마신 후 가볍게 내뱉었습니다. 두 갈래 소녀의 머리를 정확하게 조준한 후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습니다. "응…?" 순간 시야가 느닷없이 부옇게 흐려졌습니다. 두 사람이 떨어지기 전에 하얀 안개가 급격하게 시야를 뒤덮었습니다. 두 사람의 모습이 키노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 비 때문이었습니다. 갑자기 쏟아진 차가운 가을비는 숲을 회색 물안개로 감쌌습니다. 시야는 단숨에 악화되었습니다. 이제는 50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코프는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키노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플루트>를 몸 앞에 들고 빗줄기를 헤치며 숲 속을 달렸습니다.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는 300미터. 점점 미끄러워지는 발 밑을 조심하며 키노는 계속해서 달렸습니다. 다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키노는 <플루트>를 허리 높이로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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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방아쇠를 당길 기세로 주위를 경계하며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습니다. 드디어 두 사람이 있던 다리에 도착했을 때. "……." 두 사람은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키노는 <플루트>를 겨누며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보이는 것은 물안개 속에 서 있는 나무들뿐이었습니다. 비는 점점 세차게 쏟아져 키노의 모자를 적시고 챙으로 흘러내려 눈앞을 가로막았습니다. 키노는 다리 주위에서 두 사람의 발자국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찾을 수 없었습니다. "……." 세차게 쏟아지는 비가 흙을 무너뜨리고 발자국을 지운 것입니다. 두 사람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조차 이미 알 수 없었습니다. 빗소리만이 들려오는 가운데 키노는 눈앞의 통나무 다리를 노려보았습니다. "휴우…." 그리고 한숨을 쉬며 다리를 건너지 않고 에르메스가 기다리는 숲 입구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거센 빗줄기를 헤치고 키노는 에르메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모자도 재킷도 양말도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키노는 살짝 고개를 숙여 챙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등에는 총신을 아래로 향해 <플루트>를 메고 있었습니다. "어서 와, 키노. 물에 빠진 생쥐 꼴이네. ㅡ처치했어?" "……." "키노?" 키노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오늘은 그만둘래. ㅡ호텔로 돌아가자." 그리고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래도 괜찮아?" 에르메스가 물었습니다. "내일이 있잖아." 키노가 즉각 대답했습니다. "확증은?" "없어." 밤입니다. 비는 날이 저물기 전에 멎었습니다. "그때가 제일 세차게 쏟아질 때였나보네…." 키노는 투덜거리며 샤워를 하고는 젖은 옷을 말리며 호텔 잠옷 차림으로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실례합니다." 양복 차림의 두 남자가 들어왔습니다. 키노는 남자들에게 앉을 것을 권했습니다. 남자 한 명이 의자에 앉았습니다. 키노도 작고 동그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키노 씨, 언제 의뢰를 완수하실 겁니까?" 남자가 조금 화난 어조로 잠옷 차림의 키노에게 물었습니다. 키노가 대답했습니다. "내일 안에. 오늘은 어차피 밤이라 뒤쫓을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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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보이면 즉성공하실 수 있겠지요?" "그럴 생각입니다." "실패할 경우 보수는 지불할 수 없습니다. 아시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실패하더라도 내일 저녁에는 조용히 이 나라를 떠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그 소녀는 중요한 기밀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그 사실을 발설하기라도 하면 우리 회사는 끝장입니다.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목을 매고, 몇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앉게 될 겁니다. ㅡ일단 그럴 가능성이 있는 곳은 우리 쪽에서 사람을 보내 감시하고 있지만 아직 그녀를 발견했다는 연락은 없습니다." "뭐 발견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방 입구 근처에 서 있는 에르메스가 말했습니다. 남자들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잠시 후. "더러운 일이기는 하지만ㅡ." 한 남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구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다들 당신께 무척 감사하고 있습니다. 성공하면 더욱 감사할 겁니다." 남자는 말을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키노는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은 채 문으로 걸어가는 남자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만큼?" 마지막으로 에르메스가 물었습니다.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만큼." 여행자가 호텔의 하얀 시트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을 무렵 엘리어스와 사라는 농기구 창고 안에 있었다. 비가 그친 후 두 사람은 숲 속을 걸어 밭 옆으로 나왔다. 밭 근처에서 농기구 창고를 발견한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오늘 밤에는 그곳에서 밤이슬을 피하기로 했다. 식사는 수확하기에는 조금 이른 당근. 흙에서 뽑은 당근을 엘리어스가 오두막에 있던 칼로 길게 잘라서 둘이 나눠 먹었다. 두 사람은 딱딱한 널빤지 위에 나란히 앉아 벽에 기대어 멀리서 울려 퍼지는 벌레 소리를 듣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키노가 입국한 지 3일째 되는 날 아침. 아직 태양도 뜨기 전부터 키노와 에르메스, 그리고 호출을 받고 달려온 양복 차림의 남자들은 작전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장소는 아무도 없는 호텔 식당. 입구에는 보초가 있고 테이블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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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습니다. 키노는 축축함을 간신히 참을 수 있을 정도로 마른 재킷을 입고 있었습니다. 에르메스에는 여행용 짐이 전부 끈으로 묶여 있었습니다. 코트도 걸려 있었습니다. 키노가 남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 소녀가 중요한 비밀을 공표하면 큰일이라고 하셨죠? 증거가 될 만한 물건은 어디에 있습니까?" 남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소리냐고 물었습니다. "생각해봤는데 만약 제가 그 소녀라면ㅡ,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결정적인 물적 증거를 확보해서 어디론가 가져가지 않을까 싶더군요. 입으로만 떠들어봤자 믿어주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일단 그 말을 납득한 남자들은 증거가 있을 만한 곳은 사무실이나 소녀가 살던 집 정도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양쪽 다 많은 사람들이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접근할 리가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럼 당장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내보내십시오. 집을 비워주세요." 키노가 말했습니다. 남자들은 깜짝 놀라며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습니다. 키노가 덧붙였습니다. "그럼 증거를 가지러 집으로 올 테니까요. 전 그곳에 잠복해 있겠습니다. 나중에 증거가 될 만한 물건의 목록도 알려주세요. 집이 어디에 있는지 표시한 약도도." 남자들은 과연 생각대로 될까 하며 의문을 표시했습니다. "이 넓은 나라에서 한 사람과 한 대로 어디에나 있을 법한 소년과 소녀를 찾는 것보다는, 그것도 오늘 하루 안에 찾는 것보다는 훨씬 성공률이 높다고 봅니다." 그 말을 들은 남자들은 마지못해 키노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당장 수배할 것을 약속한 다음 키노에게 그 짐의 위치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남자들이 연락을 하러 사라진 후. "과연 생각대로 될까?" 에르메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글쎄." 키노가 대답했습니다. 키노가 에르메스에게 대답한 것과 같은 시각ㅡ. "증거야! 사라가 가희의 노래를 불렀다는 증거만 있으면 돼! 뭔가 증거가 될 만한 것 몰라?" 엘리어스가 당근을 씹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있는 창고 주위에서는 아침 안개가 세상을 연회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사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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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여 엘리어스와 나란히 앉아서 당근을 씹으며 말했다. "집에 갈 수만 있다면…. 하지만 난 서류 같은 건 모르는데…." 그리고 몇 초간 생각에 잠긴 후. "있어!" "정말? 뭔데?" "레코드! 그때 녹음에 실패해서 사용할 수 없게 된 음원이 있어. 일단 레코드에 녹음하긴 했는데 내가 기념으로 받았거든. 그 레코드에는 내가 또 다른 가희와 얘기를 나누는 목소리랑, 내가 어떻게 노래하면 좋을지 노래 선생님께 물어보는 목소리랑, 주위에 있던 어른들의 목소리랑 이런저런 말소리가 담겨 있어. 그거라면 증거가 될 거야…" "집에는 누가 있지?" "평소에는 집사랑 하녀 몇 명뿐이야. 회사 사람들은 데리러 오기만 했고…." "좋았어! 찾으러 가자! 그리고 그걸 라디오 방송국이나 신문사에 보내서 발표해버리는 거야!" "하지만…, 그럼 회사 사람들이ㅡ." "그딴 건 신경 쓰지 마! 사라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어! 난 절대 사라가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엘리어스의 손 안에서 먹으려고 들고 있던 당근이 부러졌다. 사라는 시선을 떨구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별안간 눈을 크게 떴다. "아앗! 하지만! 그럼 엘리어스는 붙잡히고 말 거야! 유괴범이 되고 말 거야!" 사라는 엘리어스를 보았다. 엘리어스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상관없어." "…하지만! 유괴범은 잡히면 종신형이란 말이야! 평생 교도소에ㅡ." "사라가 죽는 것보다는 나아." "……." 엘리어스는 바닥에 앉은 채 몸을 틀어서 사라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사라의 어깨에 양손을 얹으며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왜 나쁜 어른들의 꾐에 넘어가서 한패가 됐는지 아직 말하지 않았지…. 나는 레코드를 갖고 싶었어. 가희의 레코드. 하지만 라디오도 축음기도 레코드도 죽도록 일해봤자 몇 년이 걸려도 살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그래서 한패가 된 거야." "……." "아무리 많은 돈을 손에 넣어도 가희가 죽으면 의미가 없어. 괜찮아. 교도소에서도 라디오는 들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난 사라가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 "절대로 사라를 죽게 둘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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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이 줄줄이 그러니까 증거를 찾으러 가자!" 사라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는 소년에 얼굴을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습니다. 엘리어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습니다. "그럼 그 다음에는 내가 엘리어스를 구해줄게! 내 이름으로 노래를 불러서 돈을 잔뜩 벌 거야! 그래서 엘리어스를 구해줄게! 약속해!" 사라는 눈물을 흘리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후암…." 키노는 커다랗게 하품을 했습니다. "긴장감 제로." 에르메스가 작게 빈정거렸습니다. 키노와 에르메스는 굉장히 넓고 호화로운 저택의 중앙 정원에 있었습니다. 하얀 돌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만든 정원에는 분수와 화단이 있는 넓은 계단식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런 호화로운 공간 옆에는 더욱 호화로운 저택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뒤쪽에는 잘 손질된 단풍에 물든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키노는 계단 아래의 정원 한가운데에, 지금은 멎어 있는 분수 옆에 있었습니다. 긴 의자에 편안하게 누워서 비늘구름이 떠 있는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짐을 실은 에르메스는 그 옆에서 센터스탠드로 서 있었습니다. 일단 집에서는 보이지 않는 위치였습니다. 이곳은 사라가 살던 호화로운 저택. 보이는 범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택 안에도 인기척은 없었습니다. 모두 저택에서 떨어진 곳으로 옮겨가 있었습니다. 키노는 긴 의자 옆의 테이블에 놓여 있는 비싸 보이는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습니다. "맛있어. 역시 좋은 찻잎이야." "우아한 생활. 좋은데."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이야. 솔직히 아무도 안 와도 상관없어. 오늘은 날씨도 좋겠다. 저녁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다 아무도 안 오면 상인들과 합류해서 이 나라를 떠날 거야." "의욕이 없군. 여기서 구하지 못하면 영영 손에 넣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부품인데. 뿐만 아니야. 저쪽에서 의뢰 계약 불이행으로 고소할지도 몰라." "그때는 그때고." "그 회사 사람들이 키노를 붙잡을지도 몰라." "그럼 상대를 모조리 처치하거나 에르메스를 두고 하수도로 들어가서 악취에 시달리며 도망칠 수밖에 키노의 여행 11권 이 팔로 사람을 때리고 이 팔로 사람을 안는다. ㅡFarewell to Arms?ㅡ 목차 컬러페이지 아이의 나라 ㅡBurn Upㅡ 꽃밭의 나라 ㅡFlower Arrangementㅡ 프롤로그 카메라의 나라·b ㅡPicturesque·bㅡ 제1화 이어져 있는 나라 ㅡStand Aloneㅡ 제2화 실망의 나라 ㅡHope Against Hopeㅡ 제3화 아진(중략)의 나라 ㅡWith Youㅡ 제4화 국경 없는 나라 ㅡAsylumㅡ 제5화 학교의 나라 ㅡAssignmentㅡ 제6화 길 이야기 ㅡPassageㅡ 제7화 싸우는 사람들 이야기 ㅡReasonableㅡ 에필로그 카메라의 나라·a ㅡPicturesque·aㅡ 컬러페이지 아이의 나라 ㅡBurn Upㅡ 굉장히 굉장히 추운 어느 계절. 키노라는 이름의 여행자가 에르메스라는 이름의 모토라도를 타고 어느 나라를 찾아왔습니다. 키노와 에르메스는 그 나라에서 제일 큰 공원에 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성대한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많은 어른들이 모여 차례차례 그곳에 여러 가지 물건들을 던져넣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TV와 연결하여 게임을 할 수 있는 기계와 만화만 실린 책, 여러 장을 모아서 즐기는 카드 게임이었습니다. "……." 그런 어른들을 아이들은 XXXXX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장갑을 벗고 잠시 손을 녹인 키노는 모닥불에 물건을 던지다 잠시 쉬고 있는 한 어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뭘 하는 겁니까 하고. 어른은 대답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비뚤어졌지 뭔가. 그건 우리가 어릴 적에는 없었던 저 물건들 때문이지. 그래서 전부 빼앗아서 처분하고 있는 거라네. 이제 우리 아이들은 우리가 아이였을 때처럼 순수하고 말 잘 듣는 아이다운 아이로 돌아올 거야." 모닥불은 계속 타올랐습니다. 완전히 몸을 녹인 키노가 다시 출발하려고 했을 때였습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데려와서 키노의 앞에 나란히 세웠습니다. 5, 6세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유치원 선생님이라고 밝힌 어른들이 키노에게 말했습니다. "여행자님, 모토라도님. 모처럼 이 나라에 오셨으니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눠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외부인과의 교류는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서요." 키노는 일단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자, 여행자님께 뭐든 질문을 해보렴." 어른들이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XXXXX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어른들이 누구 없니? 하고 물었습니다. "뭘 물어봐야 되나요?"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뭐든 좋단다. 네가 정말로 궁금한 걸 물어보렴. 이 나라의 어른들에게는 물어볼 수 없는 걸 물어보는 건 어떨까?" 한 어른이 대답했습니다. 아이는 그럼 하고 입을 열며 키노를 올려다보았습니다. 키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습니다. "여행자님, 제발 가르쳐주세요ㅡ." 아이는 진지한 태도로 키노에게 물었습니다. "이 나라의 어른들을 전부 불태워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이들이 모두 키노의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어른들이 다시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키노의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아이들 중에서 조금 전 질문을 했던 아이는 없었습니다. 꽃밭의 나라 ㅡFlower Arrangementㅡ 어느 봄날. 산에 쌓여 있던 눈이 차가운 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그 물이 숲의 녹음에 활력을 주기 시작할 무렵. 키노와 에르메스는 아침 햇살을 등지고 어느 나라가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길을 내려가서 성문을 지나 숲에 둘러싸인 넓은 성벽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들어가긴 힘들 것 같은데, 키노." 에르메스와 키노는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라 안 곳곳에서 타오르는 불길이었습니다. 많은 집들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희미한 연기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바람을 타고 실려 왔습니다. 키노는 스코프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좁은 나라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을 때리고, 베고, 때로는 쏘며 아침 햇살과 푸른 하늘 아래서 끝없이 살육을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키노와 에르메스가 차를 마시며 잠시 기다리고 있을 때 뭔가가 머리 위를 지나갔습니다. 그것은 호비(호버 비클. 부유 차량을 말함) 무리였습니다. 줄을 지어 소리 없이 날아온 호비 무리가 그 나라를 향해 날아갔습니다. 그중 한 대가 키노의 옆에 착륙했습니다. 그곳에서 내린 것은 멋진 군복을 입은 중년 여성과 젊은 부하였습니다. 계급장을 보니 높은 사람인가봅니다. "안녕하세요, 여행자님, 모토라도님. 저 나라에 입국하려고 오셨지요? 운이 나쁘시네요." 중년의 여군이 친근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키노는 그녀에게 인사를 한 후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물었습니다. "저 나라는 원래 서로 다른 세 민족이 함께 살던 나라였답니다. 오랫동안 잘 지내왔는데 요즘 갑자기 사이가 나빠졌지요. 누군가가 이렇게 주장하기 시작했거든요. '우리가 제일 우수하다'고." "그래서 셋이 죽고 죽이기 시작한 건가?" 에르메스가 물었습니다. "네. 이웃과 친구들끼리 피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살육이 연이어 되풀이됐죠. 이젠 손쓸 방도가 없어요." 군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문제를 전부 해결할 거라고, 자신들은 그러기 위해 옆 나라에서 왔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수로?" "보면 알아요." 그렇게 말한 후 군인은 손을 가볍게 앞으로 휘둘렀습니다. 키노와 에르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호비 군단이 나라 위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무수한 탄환의 비를 쏟아 부었습니다. 탁한 폭발음이 산 위까지 들려왔습니다. 나라 전체가 검은 연기에 휩싸였습니다. 낮이 될 무렵에는 모든 것이 끝난 뒤였습니다. 연기가 걷힌 후 그 나라에서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비명도, 절규도, 웃음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학살을 마친 호비가 귀환을 위해 공중에서 대열을 편성했습니다. 그리고 그와는 별도로 호비 몇 대가 나라 위에서 뭔가 작은 물체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저게 뭐지?" 에르메스가 물었습니다. "저건 꽃씨입니다." 군인이 대답했습니다. "여러 종류의 꽃씨.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부터 비가 온다고 하더군요. 영양을 듬뿍 먹고 자라서 여름이 되면 초록빛 숲 속에 둥근 꽃밭이 생길 거예요. ㅡ분명 아름답겠죠." 모든 호비가 사라진 후 키노는 에르메스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키노와 에르메스는 나라의 흔적 옆을 지나 곧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람이 부는 하늘에 검은 구름이 끼기 시작했습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여름이 끝나갈 무렵. "멋진 곳이로군." "아름답군요, 시즈 님, 티." "음." 그곳에 다른 여행자들이 찾아왔습니다. 버기를 타고 온 두 사람과 한 마리는 색색깔의 둥근 꽃밭을 바라보며 그 광경에 감격했습니다. "정말 멋지군.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면 방랑도 그렇게 나쁘진 않아…." 그렇게 말한 후 여행자 청년은 작게 중얼거렸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꽃밭을 만든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하고. 프롤로그 카메라의 나라·b ㅡPicturesque·bㅡ 그리고 그 후로 온 나라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사진을 찍게 되었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한 대밖에 없는 카메라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끝난 사람과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사람은 키노와 에르메스의 뒤에 서서 함께 구도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한 사람당 한 번씩 각각 원하는 구도로 키노와 사람들을 파인더에 담고 정성껏 초첨을 맞췄다. "그럼 웃어주세요!" "전 모두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좋아요!" "다들 만세 해주세요!" "다 함께 뛰어오르는 순간을 찍는 건 어떨까요? ㅡ하나, 둘, 셋!" "옆 사람이 안 들어가네…. 그럼 여행자님들만!" 그리고 셔터를 눌렀다. "고마워요! 여행자님, 정말 멋진 추억이 됐어요!" "고마워요. 잊지 않을게요!"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참가한 사진 찍기는 낮까지 화기애애하게 계속되었고ㅡ. 결국 키노는 점심식사를 얻어먹은 후 나라를 떠났다. 제1화 이어져 있는 나라 ㅡStand Aloneㅡ 모토라도(주: 이륜차. 하늘을 날지 않는 것을 가리킴.) 한 대가 겨울 길을 달리고 있었다. 풀 한 포기 없이 갈색 바위산만 길게 이어져 있는 대지. 그 길은 바위산을 누비듯 커브를 되풀이하며, 그리고 완만한 내리막을 그리며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모토라도는 얼어붙은 것처럼 단단한 흙길을 달리고 있었다. 뒷바퀴 양옆에 상자가 붙어 있고 위에는 가방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침낭과 물, 연료 깡통이 끈으로 묶여 있었다. 하늘은 맑은 푸른색. 둥근 태양은 북쪽 낮은 위치에서 힘없이 빛나고 있었다. 낮이 지나고 저녁에 가까운 시각. 세계를 감싼 공기는 너무나도 차갑고 너무나도 건조했다. "춥다…." 모토라도 운전사가 작게 투덜거렸다. 운전사는 위아래로 두꺼운 초록색 방한복을 입고 허리에는 리볼버 타입의 핸드 패스에이더(주: 패스에이더는 총기. 이 경우에는 권총)가 꽂힌 홀스터를 차고 있었다. 머리와 귀를 덮는 속대가 달린 방한모를 쓰고, 눈에는 노란색 렌즈의 고글을 쓰고, 얼굴에는 천을 몇 겹이나 감고 있었다.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토라도와 운전사의 오른쪽 옆을 약한 빛이 비추고 있었다. "낮보다 훨씬 추워진 것 같은데. 지금 기온을 말해줄까, 키노?" 모토라도가 운전사에게 물었다. "아니, 됐어. 괜히 더 춥게 느껴질 것 같아." 키노라고 불린 운전사가 즉각 대답했다. 목소리가 천 너머에서 조금 탁하게 들렸다. "그보다 슬슬 '목적지'에 도착할 시간인데…. 아직 안 보여? 에르메스한테도?" 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속도를 늦추고 조금 가파른 커브를 돌았다. 뒷바퀴가 살짝 옆으로 미끄러져 흙먼지를 일으켰다. 커브를 지난 후. "아직 안 보여." 에르메스라고 불린 모토라도의 말대로 길고 일직선으로 뻗은 길 앞쪽으로는 다음 커브가 보일 뿐이었다. 키노는 또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당겼다. "지금 가고 있는 나라는ㅡ." 에르메스가 도중에 말을 멈췄다. "아니, 이제는 '나라'가 아닌가? 지금 가고 있는 곳은." 그리고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라였던 곳'이라고 할 수 있지. 귀찮으니까 '나라'라고 해도 상관없지만ㅡ. 4년 전 버림받아서 지금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 그곳에 살던 사람이 가르쳐준 거니까 틀림없어." "그 이유가 뭔지는 아직 못 들었는데. 대체 왜 버린 거래, 키노?" "음, 나도 그 사람한테 물어봤는데…. 이상한 대답을 하더군." "뭐라고 대답했는데?" "'불길해서'래." "으잉?" "그 사람들은 굉장히 오랫동안 그곳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떠돌이 점술가'라는 아주머니가 나타나서 점을 쳐줬대.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더군. '이 나라의 건물과 거리의 배치가 불길해서 언젠가 국민들이 불행해질 것이다. 언젠가 모두 땅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겨우 그것 때문에?" 에르메스가 깜짝 놀라며 되묻자 키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나라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것보다 이사를 가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각각 여기저기 다른 나라로 이주해버렸습니다. 다른 나라보다 과학이 발달되어 있던 그 나라의 국민들은 환영을 받으며 여러 나라에 무사히 정착했습니다. 해피엔딩, 해피엔딩." "후…. 인간들이란 참 각양각색인 것 같아. 그렇게나 쉽게 다른 사람더러 불행해질 거라고 단언하는 사람, 그렇게나 쉽게 나라를 버리는 사람, 일부러 먼 길을 돌아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며 그런 나라를 보러 가는 사람." 에르메스가 감탄한 것인지 기가 막힌 것인지 알 수 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건 그래. 하지만 그 사람이 행복하다면ㅡ, 즉 '우리는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키노가 대답했다. 모토라도는 또다시 커브를 돌았다. 바위산 하나가 옆으로 지나갔다. 그리고 가파른 내리막길. 그 나라는 내리막길 아래에 자리잡고 있었다. 분지 밑바닥에 돌로 쌓은 둥근 성벽이 넓은 나라를 둘러싸고 있었다, 거대한 나라였다 높은 성벽 안에 대지와 똑같은 색의 집들이 마치 세밀한 모형처럼 늘어서 있었다. "입국합니다." 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에르메스를 타고 반쯤 열린 성문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높은 성벽에 뚫린 커다란 창문. 바위 한 장을 깎아서 세공한 멋진 성문은 어중간하게 열린 채 모래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키노는 에르메스를 타고 희미한 석양에 잠긴 나라 안을 달렸다. 그대로 성문 앞 광장을 가로질러 넓은 길을 따라 나라 중심부로 향했다. 거리 양옆에 늘어서 있는 것은 5층 높이의 석조 건물들. 창문에 못질을 해놓은 널빤지는 아직 전부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키노와 에르메스는 석양에 잠긴 아무도 없는 거리를 천천히 달렸다. 에르메스의 엔진 소리가 건물에 부딪혀 메아리치며 하늘로 사라져갔다. "굉장히 깨끗하군. 물론 폐허가 되긴 아직 이르지만." 에르메스가 말했다. 키노도 동의를 표했다. 길에는 쓰레기 하나 없었다. 마치 바로 어제 사람이 사라진 것처럼 깨끗했다. "아…, 저거 때문이군." 키노가 그렇게 말하며 교차로 앞에서 에르메스를 멈췄다. 작은 트럭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교차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바퀴 양옆에 청소용 브러시가 달려 있고 차체 뒤쪽에서 작게 물을 뿌리고 있었다. 운전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둥근 핸들이 자동으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우와." 에르메스가 조금 놀라며 말했다. "키노, 운전사가 없어. 소문대로 과학이 발달한 나라였나봐." "나라를 관리 운영하는 시스템과 기계는 스위치를 끄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고 왔다고 들었어." 키노가 에르메스에게 대답하며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왜?" "누군가 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대로 살 수 있도록." "친절하셔라. ㅡ아, 불이 켜졌다." 에르메스가 말하던 도중 길 양옆의 도로와 보도 사이에 서 있는 가로등이 차례차례 켜졌다. 빛은 마치 거리를 질주하는 것처럼 키노와 에르메스를 추월했다. "아직 나라의 기능은 살아 있어. 나한테도 살고 싶으면 살아도 된다고 하더군. ㅡ지옥에 떨어지는 게 무섭지 않다면." "어떻게 할래, 키노? 이제 와서 '지옥'에 떨어지는 게 무섭진 않겠지?" 에르메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키노가 대답했다. "글쎄…. 그것도 괜찮겠군. 에르메스는 아무 데나 적당히 쓰러뜨려놓으면 청소차가 방치 차량으로 인식하고 치워줄 테니까." "그러지 마. 어느 훌륭한 사람이 그랬어. '모토라도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그럼 무서우니까 그만두도록 하지. 적당히 잘 곳을 찾아서 오늘은 이만 잘래. 내일은 하루 종일 나라를 둘러보고 그 다음 날 출발하자." 길가에 서 있는 한층 크고 훌륭한 건물을 발견한 키노는 그곳으로 들어가서 안을 살펴보았다. 상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백화점인 듯했다. 키노는 창고에 처박혀 있던 침대를 넓고 텅 빈 플로어로 끌어냈다. 휴대식량으로 저녁식사를 마친 후. "바람과 지면의 냉기를 막아주기만 해도 훨씬 낫군. ㅡ잘 자, 에르메스." 키노는 방한복을 입은 채 리볼버가 들어 있는 홀스터를 머리에 베고 매트리스 위에서 두꺼운 겨울용 침낭으로 몸을 감쌌다. 아무도 없는 조용하고 추운 거리에서 가로등만이 나란히 빛나고 있었다. 그 위에서는 그보다 눈부신 별들이 하늘 가득 밝게 빛나고 있었다. 다음 날, 키노는 날이 밝자마자 잠에서 깨어났다. 하늘은 맑았다. 매섭게 차가운 공기 속에서 키노는 젖은 천으로 가볍게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땀을 흘리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운동을 되풀이했다. 고체연료로 물을 끓여서 설탕을 듬뿍 넣고 뜨거운 차를 마셨다. 휴대식량을 우물우물 먹고 있을 때 에르메스가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키노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자 에르메스는 가끔 이럴 때도 있다고 대답하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키노, 오늘 예정은?" "하루 종일 관광과ㅡ." "관광과?" "쓸 만한 물건 찾기." 키노가 대답했다. 에르메스가 몇 초 후 물었다. "혹시 그게 이 나라에 온 목적이야?" "응, 그것도 있지." "궁상맞다고 해야 할지, 빈티가 줄줄 흐른다고 해야 할지. 달리 표현할 말이 없군." "부정하진 않겠어." 키노가 대답했다. 키노와 에르메스는 짐을 싣고 아무도 없는 거리를 달렸다. 때때로 마주치는 자동 청소차 외에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얼어붙은 세계에는 살아있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나라의 중심부에 도착하자 인공 호수가 보였다. 지금은 꽁꽁 얼어붙은 호숫가에는 넓은 공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국민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커다란 비석이 있었다. 비석에는 그들이 나라를 버린 이유가 자세하고 솔직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뒤에는 『이게 뭐야.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지나가던 여행자』라는 글이 페인트로 커다랗게 휘갈겨져 있었다. 낮이 되기 조금 전, 나라의 북쪽 끝에서 끊임없이 김이 피어오르는 거대한 시설을 발견한 키노는 에르메스가 보고 싶어했으므로 안을 견학했다. 그곳은 발전소였다. 원자력에 의해 지금도 발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키노는 그곳에서 아직 멀쩡하게 쓸 수 있는 욕실을 멋대로 사용했다. "아직 멀었어? 키노." "벌써 '100'이 지났어, 키노." "이제 충분하지 않아? 키노." "빠져 죽은 건 아니겠지? 키노." "더 있으면 몸이 퉁퉁 불지도 몰라, 키노." 시간을 듬뿍 들여서. 그 후 거리를 돌아다니다 발견한 식량 저장고 안으로 들어가자 나라를 버리고 도망칠 때 미처 가져가지 못한 곡물이 대량으로 보존되어 있었다. "좋았어!" "도둑!" 키노가 커다랗고 무거운 자루 하나를 가져와서 에르메스에게 실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에르메스는 앞으로 뒷바퀴가 몇 번이나 펑크 나도 좋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키노는 자루를 원래 있던 곳에 되돌려놓았다. 저녁이 되기 조금 전, 키노는 기름을 발굴하고 정제하는 시설을 발견했다. "좋았어!" "나도 좋아!" 그리고 그곳에 있는 연료를 에르메스의 탱크와 연료 캔에 넣을 수 있을 만큼 넣었다. 저녁. 키노와 에르메스 이외에 아무도 없는 거리에 음악이 울려 퍼졌다. 거리에 있는 스피커에서 조용한 선율과 함께 『귀가 시간입니다. 착한 어린이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세요』라는 메시지가 두 번 흘러나왔다. 키노는 주택가의 아파트 1층을 오늘 밤 숙소로 정했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 에르메스를 밀어 넣고 살짝 먼지를 뒤집어쓴 의자를 몇 번 내리쳐서 장작으로 만든 후 재 한 톨 남아 있지 않은 난로에 불을 피웠다. 불을 피운 후 시험 삼아 복도에 있는 전원 스위치를 켜보자 방 안이 불이 켜지고 난방 장치가 작동했다. 방에는 나무틀에 모니터를 끼워놓은 TV 한 대가 놓여 있었다. 키노가 이리저리 만져봤지만 TV는 모래바람 영상을 2초 정도 내보낸 후 침묵했다. "뭐 할 수 없지. 그만 자야겠다." 키노는 커다란 소파를 침대 삼아 따뜻한 방에서 얇은 옷을 입고 침낭으로 몸을 감쌌다. "음, 꽤 즐거웠어.' "그러게. 아무도 없는 나라는 오랜만이지만." "내일 출발하자. 잘 자, 에르메스." "잘 자, 키노." 다음 날 아침. 출발 전, 키노는 뭔가 팔 거나 쓸 만한 물건은 없는지 아파트를 뒤졌다. 그리고. "응?" 목을 매어 죽은 시체를 발견했다. 시체는 옆집의 좁은 창고 안에 있었다. 밧줄이 느슨하게 풀리고 발도 바닥에 거의 닿아 있어서 마치 고개를 숙이고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중년 남자인 듯한 시체는 정장을 입은 채 미라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건조한 기후 탓에 부패하지는 않은 듯했다. 창고 벽에는 남자가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 적혀 있었다. "뭐라고 쓰여 있어?" 방으로 돌아온 키노에게 에르메스가 물었다. "『나는 이 나라를 떠나기 싫다. 지옥에 떨어지기도 싫다. 나는 천국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것은 나의 의지다. 미련 따윈 없다』ㅡ고." "흐응, 무사히 천국에 갔을까?" "글쎄. 어쨌든ㅡ." "어쨌든?" "이런 걸 남기고 갔어. 근처에 떨어져 있더군." 키노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책만 한 크기의 접이식 기계였다. 키노는 에르메스의 옆에 앉아서 그것을 보여주었다. 색은 검은색. 기계를 열어보자 뚜껑 부분에 모니터 화면이, 그 앞에 키보드가 달려 있었다. "뭘까?" "안테나 같은 부품이 있는 걸 보니까 들고 다닐 수 있는 통신 단말기 같은데. 아마 화면으로 문자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을 거야." 에르메스가 말했다. 키노가 아무렇게나 다뤄도 폭발할 위험은 없냐고 묻자 에르메스는 아마 그럴 거라고 대답했다. 키노는 먼저 전원 버튼을, 그 다음에는 키보드를 적당히 눌렀다. 전원이 켜지고 화면이 몇 번 움직인 후 날짜인 듯한 숫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멈췄다. "뭘 눌러도 소용없어. 어떻게 쓰는지 알아, 에르메스?" "나도 모르겠는데.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뭐 됐어." 키노는 스위치를 껐다. 기계를 덮고 천으로 감싸서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어쩌려고?" "가져가려고." "역시." 키노와 에르메스는 서쪽 성문을 향해 달렸다.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키노는 방한복을 입고, 고글을 쓰고, 얼굴에 천을 감고 있었다. 힘없는 아침햇살이 내리깔린 거리에서 때때로 부지런히 청소를 계속하는 차와 마주쳤다. 이윽고 거리 양옆에 서 있던 아파트가 사라지고 학교나 병원 같은 커다란 건물이 늘어선 구역에 도착했다. 넓은 길 끝에 높은 성벽 안쪽이 보이기 시작했다. 키노가 힘껏 액셀러레이터를 당겨 속도를 높이려고 한 순간. "왼쪽 안쪽에 뭔가 이상한 게 있어." 에르메스가 느닷없이 말했다. 키노는 액셀러레이터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브레이크는 당기지 않았다. 에르메스는 관성의 법칙에 의해 잠시 앞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인 후 멈췄다. 왼쪽에 있는 크고 하얀 건물을 돌아보며 키노는 에르메스에게 물었다. "이상한 거라니, 뭐?" "뭘까?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땅에 파묻힌 계란 같은 낮은 돔 모양의 콘크리트. 이상한 건물이었어. 저 건물 사이로 얼핏 보였는데." "나도 찾아볼게." 키노는 에르메스를 빙글 돌려서 조금 뒤로 돌아간 후 건물 부지로 들어갔다. 주차장인 듯한 공간을 지나 건물 사이를 빠져나왔다. "저거." 건물 사이를 빠져나오자 에르메스의 말대로 콘크리트 덩어리 앞에 도착했다. 마치 분묘나 묘당 같은 커다란 돔이 넓은 중앙 정원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기 위한 차 한 대 폭의 슬로프가 보였다. 그 끝에는 굳게 닫힌 철문도 있었다. 키노는 고글을 방한모 위로 올리고 얼굴의 천을 내렸다. 그리고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뭐지…? 무덤인가? 앞까지 가볼까." 키노는 천천히 에르메스를 몰고 슬로프를 내려갔다. 철문 앞에 멈추자 곧, 『어서 오세요.』 옆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에서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키노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 안녕하세요. 여긴 대체ㅡ." 뭔가요? 그렇게 물으려고 했던 키노의 말을 가로막으며 목소리가 일방적으로 말했다. 『주인님과 면회를 희망하신다면 그대로 기다려주세요. 용건이 없으면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뭐지?" "글쎄?" 키노와 에르메스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주인님께서 손님과 만나겠다고 하십니다. 들어오세요,』 그 말과 동시에 철문이 소리 없이 옆으로 열렸다. 열린 문 안에 펼쳐진 것은 엘리베이터 같은 네모난 공간. 차를 탄 채로 내려갈 수 있을 듯한 커다란 상자였다. "어떻게 할래? 키노." "어쩌고 자시고…, 영문을 모르겠어." "주인님이 있다는 걸 보니 누군가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 나라에는ㅡ." 이제 아무도 없잖아, 키노가 그렇게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아아! 어서 오세요! 들어오시죠. 환영합니다, 여행자님! 모토라도님도 함께 들어오세요!』 조금 전과는 분명히 다른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키노는 에르메스를 느린 속도로 몰았다. 그리고 네모난 상자 안에 들어가서 엔진을 껐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괜찮을까? 키노, 함정일지도 몰라." "흥미가 생겼어." 문이 닫히자 상자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작동음도 거의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수십 초에 걸쳐 하강을 계속했다. "되게 깊다." 에르메스가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겨우 정지하고 탔을 때와는 반대쪽이, 조금 전까지 하얀 벽이었던 부분이 열렸다. 열린 문 밖으로 보인 것은 실내였다. 그곳은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의자와 테이블, 옷장 듯 가구가 놓여 있고 벽에는 그림이 장식되어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커다란 TV 모니터가 받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높은 천장에는 밝게 빛나는 조명이 매달려 있었다. 넓이도, 모습도 다른 집 거실과 똑같았다. 하지만 창문은 하나도 없었다. 꽉 막힌 벽이 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여행자님."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는 한 청년이 서 있었다. 마른 체격에 2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긴 바지에 옷자락을 늘어뜨린 하얀 긴팔 셔츠 차림. 부스스하고 짧은 회색 머리에 뺨이 움푹 꺼진 얼굴. 창백한 피부가 병자를 연상시켰지만 본인은 기운차게 총총걸음으로 키노와 에르메스에게 다가왔다. "저,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키노. 이쪽은 에르메스." 키노가 인사와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 아까 그 목소리의 사람이네." "맞았어. 어서 와. ㅡ일단 안으로 들어오지그래. 차를 끓여 올게." 키노는 청년의 말대로 에르메스를 밀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열려 있던 하얀 벽이 소리 없이 닫혔다. 안쪽에서 보자 평범한 벽과 똑같았다. 키노는 작고 둥근 테이블 옆에 에르메스를 스탠드로 세우고 위아래로 입고 있던 방한복을 벗었다. 방이 무척 따뜻해서 검은 재킷까지 벗고 셔츠 차림으로 의자에 앉았다. 홀스터는 바지 벨트에 걸었다. 방 옆에는 부엌이 있었고 안쪽에 침실인 듯한 다른 방이 있었다. 평범한 집의 1층을 그대로 지하실에 옮겨놓은 듯한 공간이었다. 남자는 부엌에서 차를 끓여 포트에 담아서 들고 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자신의 것인 듯한 머그컵과 손님용 새 컵을 올려놓았다. 남자가 차를 따르며 물었다. "키노 군, 혹시 서쪽 성문으로 출국하려던 참이야? 그럼 내가 괜히 붙잡은 건가?" 키노는 첫 번째 질문에 긍정을, 두 번째 질문에 부정을 표한 후 오늘 안으로 출국하면 되니까 시간은 있다고 말했다. "아, 다행이다!" 남자가 의자에 앉아서 키노에게 차를 권했다. "재미있는 향이로군요. 무슨 차죠?" 키노는 그렇게 물으며 남자의 반응을 살폈다. 남자는 평범한 차라고 대답하며 차를 마셨다. 그 모습을 본 후에야 키노도 차를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맛있군요 하고 감상을 말했다. "손님이 찾아온 건 오랜만이야. 정말 기뻐." 남자의 말을 들으며 키노가 말했다.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만…." "그야 그렇겠지. 내가 왜 이런 지하에서 혼자 살고 있는지 궁금할 거야. 물론 가르쳐주지! 뭐부터 얘기하지? 와, 흥분된다!" 남자는 웃으며 어린애 같은 말투로 말했다. "먼저 내가 왜 여기에서 혼자 살고 있느냐 하면ㅡ." "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병에 걸렸거든." "병?" "응. 게다가 다른 사람한테 감염될 위험이 있거든." "그럼 격려 중?" 에르메스가 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키노가 물었다. "…'격리 중'?" "그래, 그거!" 에르메스도 그렇게 말한 후 입을 다물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남자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허둥지둥 고개를 저었다. "아, 하지만! 키노 군은 괜찮아. 이 나라 사람이 아니니까. 외부인은 감염되지 않거든. 외부인과의 면회만큼은 금지되어 있지 않아." "대체 무슨 병인데?" 에르메스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남자는 곧 즐거운 듯이 대답했다. "내 몸은 조금이라도 햇빛을 받으면 큰일이 나거든. 그래서 이렇게 지하에 살고 있는 거야. 여행을 하면서 비슷한 병에 대해 들어본 적 없어?" 키노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있어요. 하지만ㅡ, 남에게 감염되는 병이라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감염돼. 이 나라 사람에게만. 왜냐하면ㅡ." "왜죠?" "그런 전설이 있으니까! 옛날 우리 선조들이 뜨거운 햇빛 때문에 괴로워할 때 당시 수장이었던 사람이 '평생 태양을 보지 못해도 좋으니 비를 내려주세요'라고 필사적으로 기도했다더군. 기도가 통해서 비가 오긴 했지만 수장은 햇빛을 받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지. 가족들에게도 전염돼서 수장 일가는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밖으로 나갔다 죽고 말았지. 수장은 비통한 눈물을 흘렸지만 그 후로 뜨거운 햇빛에 의한 피해는 사라졌다더군. ㅡ이게 우리나라에 내려오는 전설이야! 전설대로 이 나라 사람 중에는 가끔씩 나 같은 사람이 생기곤 하지! 다른 사람한테 전염되면 큰일이니까 격리하는 거야! 이제 알겠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키노는 작게 중얼거렸다. "흐음, 그렇군요…." 에르메스가 말했다. "전설의 유래도 알았고 키노한테는 전염되지 않는다니까 됐다고 쳐도ㅡ." "그래서 말이지! 난 8년 전부터 여기에서 혼자 살고 있어!" 에르메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처음에는 괴로웠지만 지금은 전혀 괴롭지 않아! 물론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엘리베이터로 운반되지!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것만! 아, 처음엔 싫었지만 지금은 먹을 수 있게 된 것도 많아! 예를 들면 건포도 같은 거! 밖은 1년 내내 춥지만 여긴 따뜻하지! 쾌적하다는 말은 여길 위해서 있는 말일 거야! 하루도 심심하질 않아! 이유는 나중에 설명해줄게!" 남자는 말하는 것이 기뻐서 견딜 수 없는 듯 묻지도 않은 얘기를 일방적으로 떠들어댔다. "이 나라 사람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전화로 얘기를 나누지도 않는단 말인가요?" "안 해! 옮으면 큰일이니까!" "……." 키노는 아무 말 없이 에르메스를 흘낏 바라보았다. "키노한테 맡길게." 에르메스가 짧게 대답했다. 키노는 남자를 돌아보며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뭐든지, 뭐든지!" "그럼 묻겠습니다." 키노는 맛있는 듯이 차를 전부 마신 후 머그컵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나라에ㅡ, 당신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있나요?" 키노의 질문을 들은 남자는 2초 후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20초 동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하하하하하하! ㅡ또 시작이군! 정말 재미있어! 여행자들은 다들 재미있다니까!"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또다시 20초 동안 배를 잡고 웃었다. "……." 키노는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웃음이 멈춘 후. "여행자들은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 위에 날 깜짝 놀라게 하려는 기획이라도 있나? 아, 웃겨!" 남자가 손가락으로 눈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말할 수 없는데." 에르메스가 평소와 똑같은 어조로 말하자 남자는 그야 그렇겠지 하고 말하며 웃었다. "4년 전부터였나. 여행자들을 이곳에 초대하면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 '이 나라에는 이제 아무도 없다'는 둥, '아직도 모르겠어? 넌 버림받은 거야!' 라는 둥. 표정도 어찌나 진지한지 매번 웃음이 터진다니까!" "……." 키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서?" 에르메스가 즐거운 듯이 맞장구를 쳤다. "나를 속이려고 해도 그렇게는 안 될걸. 재미있으니까 상관없지만 내가 '믿어주질 않으니까' 대개는 포기하지만 개중에는 정말 화를 내는 사람도 있더군. '진실을 보여줄 테니까 함께 밖으로 나가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 그것도 막무가내로. 결국 포기하고 가버렸지만." 키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 나라에 아무도 없다'는 말을 절대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ㅡ." "아하하! 물론이지! 믿을 리가 없잖아." "그 이유는 뭡니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가르쳐주세요." "역시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물론 가르쳐주지! 간단해!"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벌떡 일어섰다.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TV로 다가가서 그 위에 놓여 있는 리모콘을 들고 스위치를 켰다. 곧 넓은 광장에 모여 있는 젊은 남녀와 칠판을 등지고 떠들어대는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화면에 비쳤다. 『즉 이 수치를 공식에 대입하면ㅡ.』 "공부는 딱 질색이야." 남자가 즉각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바뀌고 연주회장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드레스 차림의 여성이 비쳤다. "……." 키노는 아무 말 없이 남자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남자는 열 번 이상 채널을 바꿨다. 그때마다 다른 영상이 비쳤다. 공을 차는 스포츠를 하는 영상, 요리를 만드는 영상. 흑백 영상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피아노 연주를 하는 화면에서 채널을 멈췄다. "나도 저 정도 칠 수 있다면 연주가 재미있을 텐데." 멋진 연주를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린 후 키노와 에르메스를 돌아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때? TV 방송은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어." 키노가 생방송 뉴스 같은 건 없냐고 묻자 남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없어. 이 나라에는 원래 생방송 같은 건 없어. TV로 방영되는 건 전부 녹화된 영상뿐이야." "그럼 역시 녹화한 영상을 기계적으로 방영하는 것뿐 아닐까? 사람이 있다는 증거는 못 되는 것 같은데." 에르메스가 말했다. 남자가 기쁜 듯이 대답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실은 지난번 여행자도 똑같은 말을 하더군. ㅡ뭐 그 여행자도 이걸 보여줬더니 잠자코 물러섰지만." 남자는 벌떡 일어서서 부엌 반대편에 있는 옆방으로 사라졌다가 곧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책만 한 크기의 접이식 기계가 들려 있었다. 색은 옅은 파란색. 뚜껑 안쪽 부분에는 모니터 화면이, 그 앞에는 키보드가 달려 있었다. "아, 그거 우리도 알아." 에르메스가 말했다. 키노는 아파트에서 주웠던 똑같은 기계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어라? 이걸 갖고 있는 여행자는 처음 봤어! 오늘은 멋진 날이군! 키노 군, 이거 어디에서 난 거야? 이건 우리나라의 신분증명서 대신이라 도저히 구할 수 없을 텐데." "시체 옆에 떨어져 있는 걸 들고 왔습니다." 키노가 그렇게 대답하자 남자는 또다시 10초 정도 웃음을 터뜨렸다. "키노 군은 다른 여행자보다 훨씬 재미있군!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하다니 정말 굉장해!" "그보다 이 기계로 대체 뭘 하는 건데?" 에르메스가 물었다. 남자는 "참, 그렇지"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파란색 기계를 열었다. 그러자 피아노 연주를 비추던 TV 화면이 바뀌고 작은 글자가 화면을 꽉 메우듯 일제히 나타났다. 키노는 자신의 기계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저게 뭐죠?" "글쎄, 뭘까?" 남자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키노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에르메스였다. "정보 통신 화면이로군. 그 단말기로 조작하는 거야." "정답! 역시 훌륭해! 설명할 수고를 덜었군! 이건 이 나라에서 발명한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도구야. 이 기계를 통해서 이 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문자 정보로 '교류'를 할 수 있지. TV로는 정보를 받을 수밖에 없지만 이건 달라. 서로 통신을 주고받을 수 있어." "흐응. 키노, 이해할 수 있어?" "그럭저럭." "기계 안쪽 화면으로 봐도 상관없지만 TV 화면이 훨씬 크고 보기 편하니까. ㅡ키노 군, 글자 보여? 조금 가까이 당길까."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TV 받침대가 키노와 에르메스를 향해 다가왔다. 모터 소리와 함께 아래에 달린 커다란 바퀴를 움직이며 다가와서 둥근 테이블 앞에 멈췄다. "자, 올린다." 남자가 키보드를 조작했다. 받침대 위의 네모난 상자가 소리없이 올라와 테이블 위에 걸칠 수 있는 높이에서 멈췄다. 키노와 에르메스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환영합니다』, 『장르를 선택해주세요』라는 커다란 글자가 보였다. "이걸 보여주고 싶었어. 여기에서 장르를 선택하고 대화에 참가하는 거야." 그 아래에는 수백 개가 넘는 장르 리스트가 줄줄이 있었다. 『이 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인생을 이야기한다』, 『고민 상담』등의 거창한 장르로부터 『삶은 채소에 마요네즈』, 『요즘 벨트가 꽉 끼어』등의 소소한 장르까지 무서울 만큼 많은 숫자였다. "그럼 당신은 지금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과 기계를 통해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단 말인가요?" 키노가 물었다. 남자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직접 해보는 게 좋을 것 같군. 내가 자주 가는 『심심한 사람, 다 모여라』에서 키노 군 얘기를 해볼게. 발신자는 실명이나 익명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지. 나는 병이 탄로 나면 곤란하니까 익명을 사용하고 있어. 참고로 화제도 검색할 수 있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키보드 소리가 하나로 이어져서 들릴 만큼 빠른 속도였다. 손가락이 30개쯤 되어 보였다. "굉장하군." 에르메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화면에 맹렬한 속도로 문자가 지나갔다. 『지금 우리 집에 모토라도를 탄 젊은 여행자가 놀러왔는데 흥미 있는 사람?』 그런 문자가 검은 화면 제일 위에 떠올랐다. 10초도 되지 않아 단숨에 문자가 늘었다. 『나!』 『불렀음?』 『좋겠다. 왜 우리 집에는 안 오는 거지?』 『얘기를 들려줘!』 『진짜라면 굉장하군.』 『어떤 사람?』 『뻥이면 화낸다! 심심한 건 맞지만.』 『됐으니까 계속 얘기해봐.』 『부럽다!』 『최대한 자세히 얘기해줘.』 『여자? 미인?』 아래에서 올라온 문자가 위의 문자를 밀어냈다. "굉장하지? 전부 이 나라의 '심심한 사람들'이야! 대답 하나가 한 사람의 의견이지. 이렇게 많은 사람과 바로 이 순간ㅡ, 나는 모두와 이어져 있는 거야." 청년은 기쁜 듯이 말하며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만한 속도로 또다시 대답을 입력했다. 『지금부터 설명할 테니까 다들 눈을 크게 뜨고 기다려!』 대량의 문자가 맹렬한 속도로 화면을 채웠다. 남자는 그것을 전부 순식간에 읽은 후 정확한 대답을 입력했다. 키노와 에르메스에 대한 설명이 대충 끝난 후 남자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잠깐 시험해볼까." 그리고 키노가 다른 여행자들처럼 '이 나라에는 너말고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거짓말을 했다고 썼다. 몇 가지 대답이 올라왔다. 『진짜 웃긴다! 그럼 지금 여기 있는 우리는 뭐지?』 『귀신인가봐! 아하하!』 『들은 적이 있어! 여행자들은 거짓말을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버릇이 있다더군.』 『그런데 그렇게 뻔한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뭘까?』 『여행자를 만났다는 너 말이야, 혹시 시골에 살고 있냐? 주위에 사람이 없어? 그런 거짓말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정말 굉장하다.』 『집에 처박혀 있을 때 여행자가 왔을지도 모르지. 가끔은 커튼을 열지그래. 그럼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다들 심심한가보군.』 『너도 그렇잖냐.』 『싸우지 마.』 『오늘은 휴일도 아닌데 다들 일 안 해?』 『해서는 안 될 말을….』 『땡땡이치는 중이야!』 『주부를 우습게 보지 마.』 남자는 대화에 참가한 사람들 모두에게 인사를 한 후, 『난 이만 여행자와 얘기를 계속하러 갈게. 또 보자! 나중에 이것저것 대답해줄게!』 통신을 마치고 기계의 스위치를 껐다. 화면에서 대량의 문자가 사라졌다. TV가 자동으로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싸늘하게 식은 차를 마시고 있던 키노를 돌아보며 남자가 말했다. "어때? 봤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이어져 있는데 아직도 내가 속을 것 같아?"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아뇨." 키노의 대답을 들은 남자는 더할 나위 없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그리고ㅡ." "그리고?" 에르메스가 물었다. 남자가 대답했다. "심심하지 않은 이유도 알겠지! 난 여기 있으면서도 이 나라의 모든 사람과 이어져 있어. 가끔 싸우기도 하지만 함께 살아가고 있어! 쓸쓸할 리가 없잖아!" "차가 식었군. 새로 따라줄까?" 키노와 에르메스가 입을 다물고 있자 남자가 물었다. 키노는 이제 곧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그리고 자신이 주운 기계를 남자에게 건네며 물었다. "이 기계, 저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들 수 없나요?" 남자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 잠깐 기다려봐." 그리고 케이블을 자신의 기계와 연결해서 몇 번인가 양쪽을 조작했다. 수십 초 후. "다 됐다. 이제 이 기계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젠 키노 군의 것이야. 화면에서 시키는 대로 조작하면 아까 나처럼 대화에 참가할 수 있어." 키노는 남자가 내민 기계를 받아들었다. "고맙습니다. 나중에 해보도록 하죠." 그리고 그것을 에르메스의 뒷바퀴 옆에 달린 상자에 넣었다.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키노가 물었다. 남자는 뭐든지 물어보라고 흔쾌히 대답했다. "그럼 먼저ㅡ. 이 기계로 나라 밖에 있는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나요?" "아니, 그건 무리야. 이 나라에 있는 사람들하고만 할 수 있어." "그렇군요." 키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나라에서 이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요?" "그게 말이지, 이상하게도 여행자들이 거짓말을 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ㅡ." 남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4년 전이야." 차가운 공기 속에서 키노는 에르메스를 타고 서쪽 성문 앞에 도착했다. 반쯤 열려 있는 성문 앞은 역시 광장이었다. 깨끗하게 청소된 벤치가 여럿 있었고 침묵을 계속 유지하는 분수와 물이 말라버린 연못이 보였다. 키노는 에르메스를 멈추고 시동을 껐다. "왜 그래?" 에르메스의 물음을 들으며 키노는 사이드스탠드를 내리고 에르메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상자에서 기계를 꺼내 장갑을 벗고 스위치를 눌렀다. 기계가 작동 상태로 들어가는 동안. "그거 말인데." 에르메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래 제조년월일이 적혀 있는데 읽어보니 6년 전에 만들어진 거야." "그렇다면…." "그때부터 그 '대화'는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뜻." "……. 그렇군. 알겠어." 작은 화면에 문자가 나타났다. 키노는 조금 전 남자가 썼던 글을 찾았다. 그곳에는 여행자에 대한 남자의 대답이 적혀 있었다. 여행자가 찾아와서 아무도 없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믿지 않았다는 말과 이번에도 속지 않았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던 키노가 서툰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키노?" "이걸로 됐어." 키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랜 시간을 들여 새로운 글을 적었다. 『나도 아까 서쪽 성문에서 출국 직전의 여행자를 만났어. 아마 같은 사람일 거야. 그쪽이 거짓말에 속지 않은 걸 굉장히 분해하더군.』 그 기계 옆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기계는 아무도 없는 광장 벤치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열려 있는 뚜껑 안쪽 화면에 키노가 쓴 문장에 대한 남자의 대답이 나타났다. 『역시 그렇지?!』 제2화 실망의 나라 ㅡHope Against Hopeㅡ "여행자님! 여행자님!" "저 말인가요? 네, 무슨 일이시죠?" "출국 준비로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오, 뭔데뭔데? 키노가 대답할 수 있는 거야?" "여행자님밖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ㅡ부디 이 나라에 대한 감상을 들려주세요!" "글쎄요…. 굉장히 쾌적하게 지냈습니다. 멋진 나라더군요." "맞아, 맞아. 목숨을 노리는 사람도 없고 모토라도 도둑도 없고."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셨고ㅡ. 개인적으로는 식사가 무척 즐거웠습니다. 닭고기 튀김에 식초를 뿌려서 타르타르소스를 얹어 먹는 요리는 일품이더군요. 그걸 먹으러 또 오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군요…. 만족하신 것 같아서 기쁩니다…." "칭찬한 건데 얼굴이 어둡네.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요?" "아…, 네. 뭐…." "뭔데뭔데?" "저…, 조금 이상하게 들리실지도 모르지만…. 여행자님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뭐죠?" "여행자님이 다른 나라에 갔을 때 누군가가 이 나라에 대해서 물으면ㅡ." "네." "잔뜩 험담을 해주실 수 없습니까?" "네?" "험담 말입니다. '그 나라는 여행자에게 불친절하다'거나 '음식이 맛없다'거나 '굉장히 불편하다'거나…." "이유가 뭐죠?" "실은 말이죠…, 우리나라에는 많은 여행자와 상인들이 찾아옵니다. 덕분에 나름대로 유명한 편이죠…. 그런데 자꾸 좋은 소문만 퍼져서ㅡ, 국민들은 모두 친절하고 항상 입국자들을 환영하며 대접해주는 멋진 나라로 알려졌지 뭡니까." "오, 저런." "계속하시죠."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긴 하죠. '모처럼 찾아온 손님이니까'라며 자기 돈을 털어서까지 환대하는 사람이. 하지만 외부인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일부러 피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기대하고 찾아온 사람들은 실망하기 마련이죠." "실망이라." "네. 무척 실망해서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곤 하지요. 개중에는 '이런 나라일 줄 몰랐어! 모처럼 찾아왔는데!' 라며 진심으로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런." "우리는 그저 우리의 일상을 매일매일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뿐입니다. 기대가 너무 커도 곤란할 따름이지요. 그래서 앞으로는 이곳에 찾아오는 여행자분들께 일부러 안 좋은 소문을 퍼뜨려달라고 부탁하기로 했습니다. 제발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저는…, 거짓말을 잘 못해서 물어보면 사실대로 말할지도 모릅니다. 죄송하지만 기대에 응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있죠있죠, 생각해봤는데 여행자들에게 나쁜 소문을 퍼뜨리려면ㅡ." "네." "입국할 때부터 떠날 때까지 일부러 불친절하게 대하면 되잖아. 그럼 자연스럽게 나쁜 소문이 퍼질 텐데." "그, 그런 실례는 저지를 수 없습니다! 결코!" 출국한 후. "조금 전까지는 '제법 멋진 나라'였지만ㅡ." 여행자가 자신의 모토라도에게 말했습니다. "'굉장히 멋진 나라'로 정정하겠어." 제3화 아진 다ㅡ와 이엘 다ㅡ와 파체 다ㅡ와 아게 다ㅡ와 젝스 다ㅡ와 제제 다ㅡ와 이쿠에 다ㅡ와 케인 다ㅡ와 세브레 다ㅡ와 나미 다ㅡ와 니미지 다ㅡ와 노노에 다ㅡ와 하킴 다ㅡ와 하트 다ㅡ와 하레하 다ㅡ와 히미레 다ㅡ와 미진 다ㅡ와 미미르 다ㅡ와 야기에 다ㅡ와 요제스 다ㅡ와 로론 다ㅡ와 로에레 다ㅡ와 프리테 무ㅡ와 플레에 무ㅡ와 파와테 무ㅡ와 이엠 무ㅡ와 세브 무ㅡ와 다단 무ㅡ와 다에느 무ㅡ와 나미레 무ㅡ와 누에 무ㅡ와 노자무 무ㅡ와 하토 무ㅡ와 하마 무ㅡ와 미욘 무ㅡ와 무비에 무ㅡ와 야파 무ㅡ와 요제이 무ㅡ와 라에느 무ㅡ와 라란 무ㅡ와 리린 무ㅡ와 리리 무ㅡ와 렌드 무ㅡ와 로유이 무ㅡ와 아츠 무ㅡ와 아제 무ㅡ와 토세느 무ㅡ와 우토에 무ㅡ와 케미레 제ㅡ와 사포우 제ㅡ와 슬렌 제ㅡ와 슬레 제ㅡ와 솔레브 제ㅡ와 니아에 제ㅡ와 니니지 제ㅡ와 노렌 제ㅡ와 노구레 제ㅡ와 바아레 제ㅡ와 헤지미 제ㅡ와 호토에 제ㅡ와 호머 제ㅡ와 미에느 제ㅡ와 미야 제ㅡ와 무피 제ㅡ와 모제 제ㅡ와 린다 제ㅡ와 리이에 제ㅡ와 베노르 도ㅡ와 카츠 도ㅡ와 카치오 도ㅡ와 쿠므니 도ㅡ와 사포에 도ㅡ와 스브레 도ㅡ와 타케우 도ㅡ와 타아타 도ㅡ와 토메 도ㅡ와 토마 도ㅡ와 나크 도ㅡ와 네파 도ㅡ와 노잔 도ㅡ와 노미르 도ㅡ와 보브지 도ㅡ와 미나 도ㅡ와 모블레 도ㅡ와 요웨 도ㅡ와 링크 도ㅡ와 리스트 도ㅡ와 루루 도ㅡ와 루아이 도ㅡ와 레메아 도ㅡ와 모제 도ㅡ와 와코 도ㅡ와 와키 도ㅡ와 미미니 루ㅡ와 토테츠 루ㅡ와 카레이 루ㅡ와 우밈 루ㅡ와 엘레니 루ㅡ와 사베레 루ㅡ와 스제 루ㅡ와 소프 루ㅡ와 단테 루ㅡ와 톨 루ㅡ와 나지 루ㅡ와 네무미 루ㅡ와 바질 루ㅡ와 히지비 루ㅡ와 보우노 루ㅡ와 마미에 루ㅡ와 마비오 루ㅡ와 마가레 루ㅡ와 메가노 루ㅡ와 모이즈 루ㅡ와 요드 루ㅡ와 리리스 루ㅡ와 우드 구ㅡ와 오토 구ㅡ와 소느레 구ㅡ와 소아에 구ㅡ와 타아 구ㅡ와 네아카 구ㅡ와 히비니 구ㅡ와 호무에 구ㅡ와 막스 구ㅡ와 마트 구ㅡ와 미미 구ㅡ와 무에이 구ㅡ와 메이메 구ㅡ와 루피 구ㅡ와 레트 구ㅡ와 카친 스ㅡ와 이미즈 스ㅡ와 오미즈 스ㅡ와 코미세 스ㅡ와 코드 스ㅡ와 스레트 스ㅡ와 타레브 스ㅡ와 치지에 스ㅡ와 나자에 스ㅡ와 네오이 스ㅡ와 페우 스ㅡ와 보머 스ㅡ와 데론 스ㅡ와 무치 스ㅡ와 메미르 스ㅡ와 모데르 스ㅡ와 요메이 스ㅡ와 라아라 스ㅡ와 레레토 스ㅡ와 워지 스ㅡ와 키마 유ㅡ와 에미제 유ㅡ와 오로테 유ㅡ와 오제레 유ㅡ와 사메츠 유ㅡ와 스브 유ㅡ와 소이에ㅡ유ㅡ와 치무이 유ㅡ와 트레느 유ㅡ와 나젬 유ㅡ와 나레레 유ㅡ와 하진 유ㅡ와 푸푸 유ㅡ와 호에이 유ㅡ와 마진 유ㅡ와 무아우 유ㅡ와 사얀 유ㅡ와 모드 유ㅡ와 레안 유ㅡ와 바이미 아ㅡ와 밀레이 아ㅡ와 오레가 아ㅡ와 키온 아ㅡ와 키즈 아ㅡ와 키타제 아ㅡ와 크레 아ㅡ와 사유 아ㅡ와 지오그 아ㅡ와 세프미 아ㅡ와 소짐 아ㅡ와 타쿠이 아ㅡ와 다미 아ㅡ와 치타미 아ㅡ와 테라 아ㅡ와 나아레 아ㅡ와 누아에 아ㅡ와 노웨 아ㅡ와 후미 아ㅡ와 헤기 아ㅡ와 헤트 아ㅡ와 호타이 아ㅡ와 마포 아ㅡ와 무큐 아ㅡ와 메즈르 아ㅡ와 마즈르 아ㅡ와 모키오 아ㅡ와 모크 아ㅡ와 유이키 아ㅡ와 요쥬 아ㅡ와 라오이 아ㅡ와 리미에 아ㅡ와 료키 아ㅡ와 루제 아ㅡ와 루지에 아ㅡ와 레라 아ㅡ와 레란 아ㅡ와 와트 아ㅡ와 와킴 아ㅡ와 아게제 오ㅡ와 이오키 오ㅡ와 시아미 오ㅡ와 세무레 오ㅡ와 타코네 오ㅡ와 세오우 오ㅡ와 소브오 오ㅡ와 소레레 오ㅡ와 체이 오ㅡ와 드렌 오ㅡ와 니레 오ㅡ와 뇨키 오ㅡ와 네브 오ㅡ와 바지 오ㅡ와 네스트 오ㅡ와 하멜 오ㅡ와 후비레 오ㅡ와 헤아아 오ㅡ와 헬렌 오ㅡ와 미나미 오ㅡ와 무지나 오ㅡ와 모웨 오ㅡ와 요쟈 오ㅡ와 류크 오ㅡ와 루베 오ㅡ와 로트 오ㅡ와 룩스 오ㅡ와 올가 오ㅡ와 워렌 오ㅡ와 와타스 오ㅡ와 우미즈 오ㅡ와 부후미 투ㅡ와 사에오 투ㅡ와 이에지 투ㅡ와 우제 투ㅡ와 소유이 투ㅡ와 투이에 투ㅡ와 도도 투ㅡ와 니코지 투ㅡ와 히트 투ㅡ와 야에지 투ㅡ와 미라이 투ㅡ와 리마 투ㅡ와 미나이 투ㅡ와 와아무 투ㅡ와 다가츠 베ㅡ와 그레이 베ㅡ와 쿠느 베ㅡ와 이지오 베ㅡ와 세르르 베ㅡ와 타브레 베ㅡ와 투투 베ㅡ와 누트 베ㅡ와 누제 베ㅡ와 하아 베ㅡ와 헤아에 베ㅡ와 마제 베ㅡ와 매트 베ㅡ와 라유오 베ㅡ와 리간 베ㅡ와 로지아 베ㅡ와 우즈 베ㅡ와 사게르 후ㅡ와 코바제 후ㅡ와 사메레 후ㅡ와 세아우 후ㅡ와 타미우 후ㅡ와 투미즈 후ㅡ와 도미 후ㅡ와 바미미 후ㅡ와 버드 후ㅡ와 포프 후ㅡ와 프렌 후ㅡ와 미브레 후ㅡ와 라에오 후ㅡ와 로쥬 후ㅡ와 로스트 후ㅡ와 와지 후ㅡ와 비미트 케ㅡ와 비트 케ㅡ와 세브 케ㅡ와 다레아 케ㅡ와 투브니 케ㅡ와 네브레 케ㅡ와 바트 케ㅡ와 바바에 케ㅡ와 하지 케ㅡ와 비호보 케ㅡ와 보진 케ㅡ와 마에로 케ㅡ와 마키나 케ㅡ와 미기아 케ㅡ와 와파 케ㅡ와 메이즈 케ㅡ와 메트 케ㅡ와 메이미 케ㅡ와 유메레 케ㅡ와 토드 케ㅡ와 라지프 케ㅡ와 란조 케ㅡ와 루안 케ㅡ와 루소 케ㅡ와 와프 케ㅡ와 미구에 카ㅡ와 케제미 카ㅡ와 단레 카ㅡ와 즈즈미 카ㅡ와 네미비 카ㅡ와 네트라 카ㅡ와 바짐 카ㅡ와 폰조 카ㅡ와 홈 카ㅡ와 호브지 카ㅡ와 무가에 카ㅡ와 유메아 카ㅡ와 람 카ㅡ와 레암 카ㅡ와 와무지 카ㅡ와 와조와 카ㅡ와 하미레 카ㅡ와 노노 카ㅡ와 샤티 카ㅡ와 카레느 에ㅡ와 콜레트 에ㅡ와 세렌 에ㅡ와 소렌 에ㅡ와 즈아 에ㅡ와 나나에 에ㅡ와 누제트 에ㅡ와 모지 에ㅡ와 호고니 에ㅡ와 챠치 에ㅡ와 메미 에ㅡ와 모기 에ㅡ와 유진 에ㅡ와 라드 에ㅡ와 리느 에ㅡ와 로란 에ㅡ와 아마르 타ㅡ와 카지스 타ㅡ와 키아노 타ㅡ와 코레 타ㅡ와 코렌 타ㅡ와 이짐 타ㅡ와 사제테 타ㅡ와 타타미 타ㅡ와 치지르 타ㅡ와 테테 타ㅡ와 니브레 타ㅡ와 네가미 타ㅡ와 네이트 타ㅡ와 하조 타ㅡ와 바비 타ㅡ와 마마 타ㅡ와 에미 타ㅡ와 야이즈 타ㅡ와 로파 타ㅡ와 와셀 타ㅡ와 워드 타ㅡ와 와키오 타ㅡ와 웨브 키ㅡ와 이이니 키ㅡ와 카츠 키ㅡ와 바네메 키ㅡ와 바트로 키ㅡ와 에로 키ㅡ와 콘레 키ㅡ와 콘 키ㅡ와 시트 키ㅡ와 손조 키ㅡ와 타레츠 키ㅡ와 치즈루 키ㅡ와 바안 키ㅡ와 테튼 키ㅡ와 톰 키ㅡ와 하민 키ㅡ와 마제 키ㅡ와 마린 키ㅡ와 마프스 키ㅡ와 미지카 키ㅡ와 포 키ㅡ와 핀 키ㅡ와 호토 키ㅡ와 마가에 키ㅡ와 라진 키ㅡ와 란지 키ㅡ와 라켈 키ㅡ와 림 키ㅡ와 리쿠에 키ㅡ와 루덴 키ㅡ와 로아트 키ㅡ와 와크 키ㅡ와 와레브 키ㅡ와 모튼 키ㅡ와 미그미 지ㅡ와 메메토 지ㅡ와 메렌 지ㅡ와 이프무 지ㅡ와 오톰 지ㅡ와 카렌 지ㅡ와 콜린 지ㅡ와 산레 지ㅡ와 산드 지ㅡ와 시에에 지ㅡ와 시에라 지ㅡ와 슬러 지ㅡ와 스코우 지ㅡ와 소니에 지ㅡ와 미브 지ㅡ와 토마스 지ㅡ와 누키오 지ㅡ와 노트 지ㅡ와 하지레 지ㅡ와 포테 지ㅡ와 호뷰 지ㅡ와 무쥬 지ㅡ와 무가 지ㅡ와 마지나 지ㅡ와 모파 지ㅡ와 모프 지ㅡ와 야나 지ㅡ와 야코지 지ㅡ와 유노 지ㅡ와 유에바 지ㅡ와 유유에 지ㅡ와 요에느 지ㅡ와 요힘 지ㅡ와 라그미 지ㅡ와 리미즈 지ㅡ와 루파르 지ㅡ와 완레 지ㅡ와 안조 야ㅡ와 카무에 야ㅡ와 코츠 야ㅡ와 스파츠 야ㅡ와 지온 야ㅡ와 데레느 야ㅡ와 가렌 야ㅡ와 쿠게제 야ㅡ와 코디 야ㅡ와 우메아 야ㅡ와 사간 야ㅡ와 시바 야ㅡ와 타타 야ㅡ와 트레 야ㅡ와 니니레 야ㅡ와 네코 야ㅡ와 노무에 야ㅡ와 하지트 야ㅡ와 포지 야ㅡ와 마에이 야ㅡ와 무이지 야ㅡ와 무간 야ㅡ와 무진 야ㅡ와 메지나 야ㅡ와 밀 야ㅡ와 모드 야ㅡ와 요진 야ㅡ와 요트 야ㅡ와 라피 야ㅡ와 루루에 야ㅡ와 루루바 야ㅡ와 로온 야ㅡ와 와코프 야ㅡ의 나라 ㅡWith Youㅡ 푸른 바다에 닿을락말락 한 대의 자동차가 달리고 있었습니다. 노랗고 작고 다 부서져가는, 당장이라도 분해될 것 같은, 달리는 것이 기적 같은 차였습니다. 뒷좌석에는 짐이 잔뜩 실려 있었고 지붕과 뒤쪽 짐칸에는 추가 연료 캔이 난잡하게 끈으로 묶여 있었습니다. 차는 새하얀 모래사장과 푸른 바다의 경계를, 알맞게 촉촉해서 타이어가 빠지지 않는 모래 위를 터덜터덜 달렸습니다. 자동차 오른쪽에는 대지가, 왼쪽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바다는 잔잔했습니다. 작은 파도의 하얀 선이 몇 겹이나 겹쳐서 밀려 왔습니다. 얕은 물이 깔린 긴 모래사장은 사막과 이어져 있었습니다. 사막이라고는 해도 모래가 아니라 바위와 딱딱한 흙뿐인 공간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었습니다. 산도, 나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습니다. 새하얀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눈부시게 빛나고는 있었지만 계절이 한겨울이라 기온은 그렇게 높지 않았습니다. 건조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육지에서 바다로 불어왔습니다. 자동차 운전석에는 길고 검은 머리의 젊은 여성이 핸들을 쥐고 있었습니다. 하얀 셔츠에 우아해 보이는 검은 재킷. 허벅지에는 대구경 리볼버 한 자루가 홀스터에 꽂혀 있었습니다. 왼쪽 조수석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갈색 짧은 재킷을 입은 조금 키가 작고 잘생긴 남자였습니다. 오른쪽 허리의 홀스터에는 네모난 배럴이 달린 핸드 패스에이더(주: 패스에이더는 총기입니다. 이 경우에는 권총입니다)가 꽂혀 있었습니다. 남자는 자동차 선루프 밖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소형 망원경으로 자동차 앞쪽을, 방향으로 말하자면 남쪽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입니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우와, 정말 긴 여정이었군요! 따분해 죽을 뻔했습니다." 남자가 기쁜 듯이 말하며 자리에 털썩 앉았습니다. 곧 자동차 앞 유리창에 섬이 작게 비쳤습니다. 초록빛 섬이었습니다. 그것은 육지와 연결된 섬이었습니다. 똑바로 뻗어 있는 해안의 앞바다 수백 미터 위치에 동그랗고 봉긋한 섬이 육지와 모래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육계도(陸繫島)'로군요. 주위에서 흘러온 모래로 인해 육지와 연결된 섬을 말하죠." 운전석의 여자가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조수석의 남자가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박식하시군요, 스승님. 전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기억해두지 않아도 아무 지장 없는 지식이니까요." "하긴…. 하지만 전 기억했습니다. '육계도'. 잊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다음에 언제 쓸지는 모르겠군요." "그럼 말이 나온 김에 가르쳐주죠. 모래가 흘러와서 바다로 이어지는 부분을 사취(砂嘴), 그것이 맞은편 기슭이나 섬과 이어진 것을 사주(砂州)라고 하죠." "흐음. ㅡ그거 시험에 나오는 겁니까?" "글쎄요. 학교에 다닐 생각이라도 있나요?" "전혀 없습니다. 참고로 전 어렸을 적 우등생이었습니다. 시험은 전부 만점이었죠. 장래를 촉망받는 신동이었습니다." "……."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됐나요?' 라고 묻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됐나요?" "잊어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은 금방 잊어버리는 성격이라서요." 그런 시답잖은 대화를 싣고 차는 섬으로 다가갔습니다. 섬은 무척 동그랗고 전체적으로 봉긋한 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온통 나무와 풀꽃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보면 그곳에만 초록색 점이 찍혀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요. 그리고 섬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증거도 보였습니다. 비탈 곳곳에 나무에 파묻힌 것처럼 집들이 서 있었고 바닷가 바위사장에는 작은 나무배가 몇 척이나 떠 있었습니다. 창고 같은 건물도 있었습니다. 성벽은 사주가 이어져 있는 위치에 차량 진입 방지용 바위가 적당히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긴 이런 외진 곳을 공격하러 오는 나라는 없겠죠. 절대로." 남자가 말했습니다. 차는 해안을 달려 섬 앞에 도착한 후 육지와 섬을 잇는 모래다리를 향해, 즉 왼쪽으로 꺾어 들어갔습니다. 모래 다리를 건너자 초록빛 산이 나타났습니다. 멀리서 볼 때에는 작아 보였지만 가까이에서 보자 제법 컸습니다. 직경 2킬로미터 정도는 될 것 같았습니다. 상록수가 우거진 섬에는 수많은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사주 끝에는 바위사장을 평평하게 만든 부분이 있었고 그곳에 집 몇 채가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 사람들 수십 명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반팔 셔츠와 반바지라는 무척 심플한 복장으로 신기한 듯이 다가오는 차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습니다. 차가 커다란 바위를 늘어놓은 성벽 앞에 도착하자 중년 남자 몇 사람이 무기도 들지 않고 차로 다가왔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했습니다. 그리고 입국 허가를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실로 1년 만에 찾아온 여행자의 방문을 환영하며 흔쾌히 받아들여주었습니다. 나라 안, 즉 섬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차는 성벽 앞에 세워둔 채 남자는 두 개의 가방을 들고 성벽 사이를 지났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응…?" 남자는 바위에 새겨져 있는 글자를 발견했습니다. 평평하게 깎여 있는 한 바위 표면. 그곳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길게. 바위 끝부터 끝까지 수천 자의 글자가 무서울 만큼 가지런히 새겨져 있었습니다. 마치 서류의 한 페이지 같았습니다. 남자가 걸음을 멈췄습니다. 여자도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건…. 이 글자는 뭡니까? 읽을 수가 없군요. 뭐라고 적혀 있는 겁니까?" 남자가 이 나라의 주민에게 묻자 그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건 이 나라의 이름입니다." "이름? ㅡ이 긴 게 전부 말입니까?" "네, 저기 새겨져 있는 글자 전부가 이 나라의 이름입니다. 옛날부터 사용해온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문자로 정확하게 새겨져 있죠." "……." 남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길군요." 남자가 말했습니다. "네, 깁니다." 섬나라의 주민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 여자가 짐을 들고 있는 남자를 흘낏 바라보았습니다. "왜 저렇게 긴지 물어봐도 될까요?" 남자의 물음에 섬나라의 주민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건 우리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것이 우리나라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다른 바위를 가리켰습니다. 길고 긴 나라 이름이 새겨져 있는 바위 바로 옆에 작은 바위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곳에도 뭔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쪽은 짧았습니다. "아, 저건 읽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1004'였습니다. "저게 지금 이 나라의 인구입니다. 변동이 생기면 저 바위에 새로 숫자를 새기죠." 섬나라의 주민이 말했습니다. 섬에 상륙한 두 여행자는 상륙하자마자 보이는 '공민관'이라는 이름의 제일 커다란 목조 건물로 안내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대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지도자인 어른들과 회식을 했습니다. 이 자리에 없는 1,004명의 국민 중 반 이상이 여행자를 보려고 몰려와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공민관 주위에 모여서 차례차례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여자는 어디까지나 쿨하게, 남자는 가끔씩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거나 젊은 여자에게 윙크를 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들였습니다. 장로라는 노인이 인사를 하러 나온 후 생선과 닭고기로 만든 식사가 운반되었습니다. 결코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가난하고 소박한 나라에서는 식량이 풍족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은 정중하게 감사를 표한 후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근처에 있는 나라의 동정은 어떤가 하는 질문을 받은 두 사람은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어느 나라가 제국을 이뤄서 이 나라를 공격하려고 획책 중이라거나, 전 세계가 수수께끼의 병원균에 감염되어 죽음의 세계로 변하고 남은 곳은 이곳뿐이라거나, 그런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안심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식사 후 두 사람은 안내를 맡은 주민들을 따라 이 섬을, 즉 이 나라를 산책했습니다. 한가한 주민들이 거리를 두고 뒤를 졸졸 쫓아왔습니다. 섬 전체가 산이라 길은 전부 비탈이었습니다. 좁은 길이 섬 전체에 뻗어 있었고 목조 집도 전부 비탈에 지어져 있었습니다. 숲이 울창하고 녹음이 우거진 나라였습니다. 새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습니다. 평화로운 오후였습니다. 산을 오르자 꼭대기에는, 즉 이 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는 깨끗한 물이 고인 연못이 있었습니다. 화산 분화구처럼 산꼭대기가 움푹 파여서 그곳에 물이 고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기에 내린 비를 반년 동안 저장해놓기 위한 연못이었습니다. 먼 옛날 누군가가 열심히 산을 깎아서 깊은 구덩이를 팠다고 합니다. 이 연못이 이 나라에 살고 있는 1,004명의 목숨을 지탱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굉장하군요. 절대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는데요." 남자는 장난스러운 말로 모두를 웃긴 후 연못가에서 떨어졌습니다. 섬을 둘러본 두 사람은 공민관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준비된 벤치에 앉아서 따뜻한 차를 마셨습니다. 하늘은 천천히 붉은빛으로 물들어 사막의 대지를 붉게 비추었습니다. 안내인이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몰려들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습니다. "왠지 스타가 된 느낌이군요. 내일 출국해야 하는데 다들 우리를 기억해줄까요?" 남자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곧 "그러고 보니"라며 말을 이었습니다. "기억이라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 나라는 이름이 굉장히 길지 않습니까? 다들 외우는 게 힘들지 않습니까? 좀 걱정이 되는군요." "아뇨, 다들 쉽게 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안내인 중 한 명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리고 증거를 보여주겠다는 말과 함께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주민들 가운데 한 소녀를 불렀습니다. "하얀 물고기 좋아야, 이리 와보렴." 그 이름을 들은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하얀 물고기 좋아'라고 불린 여덟 살 정도의 소녀가 기쁜 듯이 뛰어나와 벤치에 앉아 있는 여행자와 안내인들 앞에 섰습니다. "안녕하세요, 여행자님. 우리나라에 오신 걸 환영해요!" 소녀가 웃으며 기쁜 듯이 말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고맙다고 대답했습니다. 안내인이 소녀에게 부드럽게 물었습니다. "하얀 물고기 좋아야, 이 나라 이름을 외울 수 있지?" 소녀는 기쁜 듯이 또랑또랑하게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죠! 못 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걸요!" "여행자님들은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서 비석의 글자를 읽을 수 없단다. 그러니까 하얀 물고기 좋아가 두 분께 이 나라의 이름을 말해주지 않으련?" "네! 물론이죠!" 소녀는 독창이라도 하듯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우리나라 이름을 가르쳐드릴게요. 아진 다ㅡ와 이엘 다ㅡ와 파체 다ㅡ와 아게 다ㅡ와 젝스 다ㅡ와 제제 다ㅡ와 이쿠에 다ㅡ와 케인 다ㅡ와 세브레 다ㅡ와 나미 다ㅡ와 니미지 다ㅡ와 노노에 다ㅡ와 하킴 다ㅡ와 하트 다ㅡ와 하레하 다ㅡ와 히미레 다ㅡ와 미진 다ㅡ와 미미르 다ㅡ와 야기에 다ㅡ와 요제스 다ㅡ와 로론 다ㅡ와 로에레 다ㅡ와 프리테 무ㅡ와ㅡ." 술술 말하는 소녀를 바라보며, 그리고 그 비슷한 단어의 나열을 들으며 남자는 놀라움을 담아 가볍게 말했습니다. "와우." 여자는 소녀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습니다. 소녀는 중간중간 짧게 숨을 쉬며 계속해서 나라의 이름을 읊었습니다. "ㅡ플레에 무ㅡ와 파와테 무ㅡ와 이엠 무ㅡ와 세브 무ㅡ와 다단 무ㅡ와 다에느 무ㅡ와 나미레 무ㅡ와 누에 무ㅡ와 노자무 무ㅡ와 하토 무ㅡ와 하마 무ㅡ와 미욘 무ㅡ와 무비에 무ㅡ와 야파 무ㅡ와 요제이 무ㅡ와 라에느 무ㅡ와 라란 무ㅡ와 리린 무ㅡ와 리리 무ㅡ와 렌드 무ㅡ와 로유이 무ㅡ와 아츠 무ㅡ와 아제 무ㅡ와 토세느 무ㅡ와 우토에 무ㅡ와 케미레 제ㅡ와 사포우 제ㅡ와 슬렌 제ㅡ와 슬레 제ㅡ와 솔레브 제ㅡ와 니아에 제ㅡ와 니니지 제ㅡ와 노렌 제ㅡ와 노구레 제ㅡ와 바아레 제ㅡ와 헤지미 제ㅡ와 호토에 제ㅡ와 호머 제ㅡ와 미에느 제ㅡ와 미야 제ㅡ와 무피 제ㅡ와 모제 제ㅡ와 린다 제ㅡ와 리이에 제ㅡ와 베노르 도ㅡ와 카츠 도ㅡ와 카치오 도ㅡ와 쿠므니 도ㅡ와 사포에 도ㅡ와 스브레 도ㅡ와 타케우 도ㅡ와 타아타 도ㅡ와 토메 도ㅡ와 토마 도ㅡ와 나크 도ㅡ와 네파 도ㅡ와 노잔 도ㅡ와 노미르 도ㅡ와 보브지 도ㅡ와 미나 도ㅡ와 모블레 도ㅡ와 요웨 도ㅡ와 링크 도ㅡ와 리스트 도ㅡ와 루루 도ㅡ와 루아이 도ㅡ와 레메아 도ㅡ와 모제 도ㅡ와 와코 도ㅡ와ㅡ." "음…." 이즈음에서 남자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소녀 뒤에서 다른 주민들이 함께 입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 움직임은 소녀의 움직임과 똑같았습니다. 즉 소녀와 함께 계속 나라 이름을 정확하게 읊고 있었던 것입니다. 굉장하다. 남자의 입이 그렇게 움직였습니다. 나라의 이름은 계속되었습니다. "ㅡ와키 도ㅡ와 미미니 루ㅡ와 토테츠 루ㅡ와 카레이 루ㅡ와 우밈 루ㅡ와 엘레니 루ㅡ와 사베레 루ㅡ와 스제 루ㅡ와 소프 루ㅡ와 단테 루ㅡ와 톨 루ㅡ와 나지 루ㅡ와 네무미 루ㅡ와 바질 루ㅡ와 히지비 루ㅡ와 보우노 루ㅡ와 마미에 루ㅡ와 마비오 루ㅡ와 마가레 루ㅡ와 메가노 루ㅡ와 모이즈 루ㅡ와 요드 루ㅡ와 리리스 루ㅡ와 우드 구ㅡ와 오토 구ㅡ와 소느레 구ㅡ와 소아에 구ㅡ와 타아 구ㅡ와 네아카 구ㅡ와 히비니 구ㅡ와 호무에 구ㅡ와 막스 구ㅡ와 마트 구ㅡ와 미미 구ㅡ와 무에이 구ㅡ와 메이메 구ㅡ와 루피 구ㅡ와 레트 구ㅡ와 카친 스ㅡ와 이미즈 스ㅡ와 오미즈 스ㅡ와 코미세 스ㅡ와 코드 스ㅡ와 스레트 스ㅡ와 타레브 스ㅡ와 치지에 스ㅡ와 나자에 스ㅡ와 네오이 스ㅡ와 페우 스ㅡ와 보머 스ㅡ와 데론 스ㅡ와 무치 스ㅡ와 메미르 스ㅡ와 모데르 스ㅡ와 요메이 스ㅡ와 라아라 스ㅡ와 레레토 스ㅡ와 워지 스ㅡ와 키마 유ㅡ와 에미제 유ㅡ와 오로테 유ㅡ와 오제레 유ㅡ와 사메츠 유ㅡ와 스브 유ㅡ와 소이에ㅡ유ㅡ와 치무이 유ㅡ와 트레느 유ㅡ와 나젬 유ㅡ와 나레레 유ㅡ와 하진 유ㅡ와 푸푸 유ㅡ와 호에이 유ㅡ와 마진 유ㅡ와 무아우 유ㅡ와 사얀 유ㅡ와 모드 유ㅡ와 레안 유ㅡ와 바이미 아ㅡ와 밀레이 아ㅡ와 오레가 아ㅡ와 키온 아ㅡ와 키즈 아ㅡ와 키타제 아ㅡ와 크레 아ㅡ와 사유 아ㅡ와 지오그 아ㅡ와 세프미 아ㅡ와 소짐 아ㅡ와 타쿠이 아ㅡ와 다미 아ㅡ와 치타미 아ㅡ와 테라 아ㅡ와 나아레 아ㅡ와 누아에 아ㅡ와 노웨 아ㅡ와 후미 아ㅡ와 헤기 아ㅡ와 헤트 아ㅡ와 호타이 아ㅡ와 마포 아ㅡ와 무큐 아ㅡ와 메즈르 아ㅡ와 마즈르 아ㅡ와 모키오 아ㅡ와 모크 아ㅡ와 유이키 아ㅡ와 요쥬 아ㅡ와 라오이 아ㅡ와 리미에 아ㅡ와 료키 아ㅡ와 루제 아ㅡ와 루지에 아ㅡ와 레라 아ㅡ와 레란 아ㅡ와 와트 아ㅡ와 와킴 아ㅡ와 아게제 오ㅡ와 이오키 오ㅡ와 시아미 오ㅡ와 세무레 오ㅡ와 타코네 오ㅡ와 세오우 오ㅡ와 소브오 오ㅡ와 소레레 오ㅡ와 체이 오ㅡ와 드렌 오ㅡ와 니레 오ㅡ와 뇨키 오ㅡ와 네브 오ㅡ와 바지 오ㅡ와 네스트 오ㅡ와 하멜 오ㅡ와 후비레 오ㅡ와 헤아아 오ㅡ와 헬렌 오ㅡ와 미나미 오ㅡ와 무지나 오ㅡ와 모웨 오ㅡ와 요쟈 오ㅡ와 류크 오ㅡ와ㅡ." 이즈음에서 처음에는 무척 감탄했던 남자도 차츰 지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녀와 그 뒤에서 입을 맞추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력에 감탄하면서도, "……." 남자는 잠자코 뭐라 말할 수 없는 얼굴로 옆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자는 물끄러미 소녀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할 수 없이 소녀에게로 시선을 되돌렸습니다. 소녀의 목소리는 계속되었습니다. "ㅡ루베 오ㅡ와 로트 오ㅡ와 룩스 오ㅡ와 올가 오ㅡ와 워렌 오ㅡ와 와타스 오ㅡ와 우미즈 오ㅡ와 부후미 투ㅡ와 사에오 투ㅡ와 이에지 투ㅡ와 우제 투ㅡ와 소유이 투ㅡ와 투이에 투ㅡ와 도도 투ㅡ와 니코지 투ㅡ와 히트 투ㅡ와 야에지 투ㅡ와 미라이 투ㅡ와 리마 투ㅡ와 미나이 투ㅡ와 와아무 투ㅡ와 다가츠 베ㅡ와 그레이 베ㅡ와 쿠느 베ㅡ와 이지오 베ㅡ와 세르르 베ㅡ와 타브레 베ㅡ와 투투 베ㅡ와 누트 베ㅡ와 누제 베ㅡ와 하아 베ㅡ와 헤아에 베ㅡ와 마제 베ㅡ와 매트 베ㅡ와 라유오 베ㅡ와 리간 베ㅡ와 로지아 베ㅡ와 우즈 베ㅡ와 사게르 후ㅡ와 코바제 후ㅡ와 사메레 후ㅡ와 세아우 후ㅡ와 타미우 후ㅡ와 투미즈 후ㅡ와 도미 후ㅡ와 바미미 후ㅡ와 버드 후ㅡ와 포프 후ㅡ와 프렌 후ㅡ와 미브레 후ㅡ와 라에오 후ㅡ와ㅡ." 이즈음에서 남자는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패스에이더 배럴 아래 달려 있는 조준용 레이저사이트를 마지막으로 조정한 것은 언제였는지 머리를 쥐어짜서 간신히 기억해낸 후 꽤 오래됐으니 슬슬 다시 조정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ㅡ로쥬 후ㅡ와 로스트 후ㅡ와 와지 후ㅡ와 비미트 케ㅡ와 비트 케ㅡ와 세브 케ㅡ와 다레아 케ㅡ와 투브니 케ㅡ와 네브레 케ㅡ와 바트 케ㅡ와 바바에 케ㅡ와 하지 케ㅡ와 비호보 케ㅡ와 보진 케ㅡ와 마에로 케ㅡ와 마키나 케ㅡ와 미기아 케ㅡ와 와파 케ㅡ와 메이즈 케ㅡ와 메트 케ㅡ와 메이미 케ㅡ와 유메레 케ㅡ와 토드 케ㅡ와 라지프 케ㅡ와 란조 케ㅡ와 루안 케ㅡ와 루소 케ㅡ와 와프 케ㅡ와 미구에 카ㅡ와 케제미 카ㅡ와 단레 카ㅡ와 즈즈미 카ㅡ와 네미비 카ㅡ와 네트라 카ㅡ와 바짐 카ㅡ와 폰조 카ㅡ와 홈 카ㅡ와 호브지 카ㅡ와 무가에 카ㅡ와 유메아 카ㅡ와 람 카ㅡ와 레암 카ㅡ와 와무지 카ㅡ와 와조와 카ㅡ와 하미레 카ㅡ와 노노 카ㅡ와 샤티 카ㅡ와 카레느 에ㅡ와 콜레트 에ㅡ와 세렌 에ㅡ와 소렌 에ㅡ와 즈아 에ㅡ와 나나에 에ㅡ와 누제트 에ㅡ와 모지 에ㅡ와 호고니 에ㅡ와 챠치 에ㅡ와 메미 에ㅡ와 모기 에ㅡ와 유진 에ㅡ와 라드 에ㅡ와 리느 에ㅡ와ㅡ." 나라 이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남자는 지난번 나라에서 입수한 소음 산탄총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산탄을 발사하는 화약이 얇은 철제 봉지에 들어 있어서 폭약이 봉지를 밀어내기만 하면 탄환이 발사되기 때문에 발포음이 나지 않는 독특한 아이디어 상품이지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사긴 했지만 막상 쏴보니 위력이 너무 약해서 사용하기 어려운 게 흠입니다. "ㅡ로란 에ㅡ와 아마르 타ㅡ와 카지스 타ㅡ와 키아노 타ㅡ와 코레 타ㅡ와 코렌 타ㅡ와 이짐 타ㅡ와 사제테 타ㅡ와 타타미 타ㅡ와 치지르 타ㅡ와 테테 타ㅡ와 니브레 타ㅡ와 네가미 타ㅡ와 네이트 타ㅡ와 하조 타ㅡ와 바비 타ㅡ와 마마 타ㅡ와 에미 타ㅡ와 야이즈 타ㅡ와 로파 타ㅡ와 와셀 타ㅡ와 워드 타ㅡ와 와키오 타ㅡ와 웨브 키ㅡ와 이이니 키ㅡ와 카츠 키ㅡ와 바네메 키ㅡ와 바트로 키ㅡ와 에로 키ㅡ와 콘레 키ㅡ와 콘 키ㅡ와 시트 키ㅡ와 손조 키ㅡ와 타레츠 키ㅡ와 치즈루 키ㅡ와 바안 키ㅡ와 테튼 키ㅡ와 톰 키ㅡ와 하민 키ㅡ와 마제 키ㅡ와 마린 키ㅡ와 마프스 키ㅡ와 미지카 키ㅡ와 포 키ㅡ와 핀 키ㅡ와 호토 키ㅡ와 마가에 키ㅡ와 라진 키ㅡ와 란지 키ㅡ와 라켈 키ㅡ와 림 키ㅡ와 리쿠에 키ㅡ와 루덴 키ㅡ와 로아트 키ㅡ와 와크 키ㅡ와 와레브 키ㅡ와 모튼 키ㅡ와 미그미 지ㅡ와 메메토 지ㅡ와 메렌 지ㅡ와 이프무 지ㅡ와 오톰 지ㅡ와 카렌 지ㅡ와 콜린 지ㅡ와 산레 지ㅡ와 산드 지ㅡ와 시에에 지ㅡ와 시에라 지ㅡ와 슬러 지ㅡ와 스코우 지ㅡ와 소니에 지ㅡ와 미브 지ㅡ와 토마스 지ㅡ와 누키오 지ㅡ와 노트 지ㅡ와 하지레 지ㅡ와ㅡ." 남자는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무아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ㅡ포테 지ㅡ와 호뷰 지ㅡ와 무쥬 지ㅡ와 무가 지ㅡ와 마지나 지ㅡ와 모파 지ㅡ와 모프 지ㅡ와 야나 지ㅡ와 야코지 지ㅡ와 유노 지ㅡ와 유에바 지ㅡ와 유유에 지ㅡ와 요에느 지ㅡ와 요힘 지ㅡ와 라그미 지ㅡ와 리미즈 지ㅡ와 루파르 지ㅡ와 완레 지ㅡ와 안조 야ㅡ와 카무에 야ㅡ와 코츠 야ㅡ와 스파츠 야ㅡ와 지온 야ㅡ와 데레느 야ㅡ와 가렌 야ㅡ와 쿠게제 야ㅡ와 코디 야ㅡ와 우메아 야ㅡ와 사간 야ㅡ와 시바 야ㅡ와 타타 야ㅡ와 트레 야ㅡ와 니니레 야ㅡ와 네코 야ㅡ와 노무에 야ㅡ와 하지트 야ㅡ와 포지 야ㅡ와 마에이 야ㅡ와 무이지 야ㅡ와 무간 야ㅡ와 무진 야ㅡ와 메지나 야ㅡ와 밀 야ㅡ와 모드 야ㅡ와 요진 야ㅡ와 요트 야ㅡ와 라피 야ㅡ와 루루에 야ㅡ와 루루바 야ㅡ와 로온 야ㅡ와 와코프 야ㅡ의 나라예요!" 소녀는 멋지게 이 나라의 이름을 끝까지 읊었습니다. 긴 이름이 끝난 순간. "훌륭해!" 남자는 벌떡 일어서서 진심으로 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휴우, 이제 겨우 끝났군이라는 본심을 감춘 채, "이렇게 긴 이름을 용케 외웠군요! 감동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머리 위에서 박수를 쳤습니다. 소녀가 조금 쑥스러워하며 말했습니다. "저기…, 별것 아니에요. 다들 외우는걸요." "아니, 훌륭해. 긴 이름도 굉장하지만 다들 외우고 있는 게 더욱 훌륭하군."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탄피라도 꺼내 답례로 줄까 하다가 한 명만 특별 취급하는 것은 좋지 않다 싶어 말로만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고마워. 정말 고맙다." "하얀 물고기 좋아, 수고했다. 자, 다시 저쪽으로 돌아가렴." 안내인이 그렇게 말하자 소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원래 있던 자리로 쪼르르 돌아갔습니다. 옆에 있던 어른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훌륭하군요. 감동했습니다." 여자가 그렇게 말하며 안내인을 바라보았습니다. 스무 살 남짓한 젊은 안내인은 어딘가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말을 배우자마자 나라 이름을 가르칩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이름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누가 물어봐도 대답할 수 없으면 곤란하니까요." 석양 속에서 남자가 물었습니다. "그 긴 이름의 유래는 모른다고 하셨죠?" "네. 하지만 이게 우리나라의 이름이니까요.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우리는 계속 이 이름을 외울 겁니다." 이번에는 여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좀 전에 '하얀 물고기 좋아'라는 소녀 말인데요, 그건 별명이죠? 이 나라에서는 평소 본명을 숨기고 별명을 사용하나보군요." "네, 그렇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설명이 필요할 줄 알았습니다." "전에 똑같은 나라를 가본 적이 있어서요." "아아, 그런 나라가 또 있나보군요! 안심했습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줄 알았습니다! 멋진 정보로군요!" 안내인이 기쁜 듯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짧은 기간이지만 두 사람이 머물 동안 그들을 부를 별명을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의논한 끝에ㅡ. 결국 여자는, '물결치는 검은 머리', 남자는, '짐꾼', 이렇게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물결치는 검은 머리'와 '짐꾼'두 사람은 이 나라의 유일한 손님용 집에 묵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는 갓 잡은 생선 요리를 먹었습니다. "고마워요. 기분 좋게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린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이 나라는 멋진 나라로군요. ㅡ이름은 외우기가 좀 어려우니까 '초록 섬의 나라'라는 별명으로 부르면 어떨까요? 그럼." 두 사람의 여행자는 길고 긴 이름의 나라에서 떠났습니다. 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북쪽 지평선과 수평선 너머로 산이 완전히 사라진 무렵이었습니다. "응? ㅡ누가 있는데요." 운전석의 남자가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며 말했습니다. 원래 별로 빠르지 않았던 차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고 한 남자 앞에서 멈췄습니다.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수평선과 지평선뿐인 세계에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남자는 초록색 재킷을 입고 허리에는 45구경 자동식 패스에이더를 차고 있었습니다. 마치 여행자 같은, 그 나라의 누구와도 다른 차림새였습니다. 남자의 짐일까요, 지저분한 배낭 하나가 발치에 놓여 있었습니다. 초록색 재킷의 남자는 조금 놀라면서도 대담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바라보았습니다. "왜 이런 곳에 사람이?"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왼쪽 허벅지의 패스에이더에 슬쩍 손을 댔습니다. 여자가 말했습니다. "배를 타고 왔나보군요. 해변에 뭔가를 태운 흔적이 있어요." 정확한 지적이었습니다. 남자는 해변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자의 말대로 작은 배를 태운 흔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위에 모래를 뿌린 것 같지만 불에 타버린 나뭇조각과 버려진 소형 엔진, 연료 탱크 등이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말도 안 돼…." 남자가 중얼거렸습니다. 즉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여기까지 타고 온 배를 자신의 손으로 태워버린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목숨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기묘한 행동에 남자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천천히 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친절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런 곳에서 누군가와 마주칠 줄은 몰랐군요." "안녕. 그쪽도 여행자인가보군. 놀란 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초록색 재킷의 남자가 말했습니다. "안심해. 전부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니까. 그쪽에 피해는 끼치지 않을 거다. 설마 이런 곳에서 누군가를 만날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불타버린 배의 잔해를 흘낏 바라보며 먼저 운을 뗐습니다. "눈치가 빠르군요." 여자가 차에서 내렸습니다. 초록색 재킷의 남자가 물었습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물론. 그 나라에 대한 질문이겠죠?" 여자가 즉각 대답했습니다. "눈치가 빠르군." 초록색 재킷의 남자가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당신들 조금 전 그 나라를 떠나온 것 같은데 어땠지? 육지와 이어져 있는 한적한 섬에서 1,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지만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던가?" 남자가 여자를 흘낏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그러자. "하핫!" 초록색 재킷의 남자는 싱긋 웃었습니다. 어딘가 비웃는 듯한, 그리고 분노가 담겨 있는 듯한 웃음이었습니다. "당신도 그 나라에 가려는 것 같은데ㅡ." 여자가 말했습니다. 초록색 재킷의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부터는 걸어가야 하지만. 밤에는 도착하겠지. 마침 잘됐어." 여기까지 타고 온 배를 스스로 부수지 않나, 몰래 밤에 접근하려고 하지 않나. 남자의 언동은 너무나도 수상했습니다. "그 나라에서 무슨 짓을 할 생각이죠?" 여자가 물었습니다. 초록색 재킷의 남자는 솔직하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습니다. "ㅡ나는 그 나라 사람들을 모두 죽일 거다." "그거 정말 굉장하군요. 수고가 많겠네요." 남자가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대꾸했습니다. 그러자 초록색 재킷의 남자는 침착한 표정으로 마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듯 말했습니다. "그렇지도 않아ㅡ. 알고 있나? 그 나라의 산꼭대기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지. 우기에 내린 비를 저장해두기 위한. 지금 그 나라는 그 연못 외에는 담수를 얻을 곳이 없어. 내가 갖고 온 독약 한 병을 넣기만 하면 다들 죽을 거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사실 패스에이더로 한정된 사람을 죽이는 게 훨씬 어렵고 힘든 일이지." "그건 그래요." 여자가 동의를 표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리고 제일 중요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자동차 반대편에 있는 남자도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러게요. 꼭 이유를 듣고 싶군요." 초록색 재킷의 남자는 물론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습니다. "물론 가르쳐주지ㅡ. 복수를 위해서다." "복수? 그 나라에?" 여자가 물었습니다. "그래. 나는 그 나라에 복수할 생각이다…. 내가 지금부터 할 이야기를 당신들은 분명 모르고 있을 테지. 그 나라 사람들이 절대 말할 리 없으니까ㅡ. 옛날, 15년 전 일이다. 그 나라의 인구는 1,500명이 넘었지.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나?" 초록색 재킷의 남자가 말했습니다. "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허용범위를 완전히 초과했군요." 여자는 즉각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초록색 재킷의 남자가 기쁜 듯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대체 무슨 얘기입니까? 스승님."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그 나라에는 너무 많은 인구라는 뜻이에요. 그 정도 땅에서는 1,000명 정도 살아가는 게 고작이예요.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500명이나 초과하고 만 거죠." "아, 그렇군요! 그거 큰일이네요…." 남자가 납득할 때까지 기다린 후 초록색 재킷의 남자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그 이전에 4년 동안 이상기후가 계속됐거든. 유달리 비가 많이 내리고 물고기가 왕창 잡혔지. 당시 지도자들은 모두 바보였어. 신이 나서 '인구는 1,000명 하고 열 명 이상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유사 이래 계속된 나라의 금기를 깨뜨리고 말았지. 나라를 크고 풍족하게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야. 자신들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었던 거지. 하지만 자연이, 어획량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그걸로 끝이야. 전부 끝장이지."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어떻게 됐을 것 같나? 앞으로 무시무시한 물 부족과 굶주림이 덮쳐올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바보 같은 지도자들은 모두 자살하고 말았다. 남은 것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게 된 1,500명의 약한 국민들뿐이었지." "그럼 어떤 '기적'이 일어난 거죠?" 여자가 비꼬듯이 물었습니다. 초록색 재킷의 남자가 사나운 미소를 지었습니다. "여행자가 찾아왔지ㅡ. 그들이 나타난 거야." 그들은 열 명 정도의 집단이었다. 몇 대의 트럭을 타고 당신들처럼 그 나라에 나타났지. 북쪽에서. 그들이 나라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그들에게 매달렸다. 도와달라고 말했지.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면서. 이대로는 이제 곧 시작될 다음 건기에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나올 테니까. 1,500명 중 1,000명이 평소대로 생활하면 500명은 죽어나가겠지. 아니면 1,500명 모두 해마다 기아와 갈증에 시달리거나. 사람들은 뭐든지 좋으니까 해결책을 가르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들의 리더는 이렇게 말했다. "좋아. 우리가 전부 해결해주지." 자, 여기에서 문제. 과연 어떤 기적이 일어났을까? 그건 아주 멋진 단 하룻밤의 기적이었다. 그들 열 명은 멋진 기술을 갖고 있었지. '사람을 죽이는' 멋진 기술을. 그들 열 명은ㅡ, 그날 밤 일몰을 기다렸다가 주민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무작위로 죽인 게 아니야. 사무소에서 주민들의 이름과 나이, 성별을 조사해서 '어떤 500명을 죽이면 인구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지' 완벽하게 파악한 후 고아와 유족들이 생기지 않도록 반드시 가족 단위로 살해했지. 정확하게 몇 명을 죽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500명 가까운 숫자였을 거야. 나라 전체에 패스에이더 발포음이 울려 퍼졌지. 새 울음소리와 함께. 그들 열 명은 집 안으로 쳐들어가서 인정 사정 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확실하게 숨통을 끊었다. 죽여서는 안 되는 사람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지. 하지만 살해당하는 사람은 살해당하기 전까지 그 사실을 알 수 없는 법. 그들의 행동은 이해하면서도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날이 밝은 후 그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말했지. "이제 괜찮아. 이제 당신들은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더군. "먼저 시체를 치워라. 전염병이 돌기 전에 최대한 먼 곳으로 옮겨서 깊은 땅속에 묻도록 해. 그리고 죽은 사람들은 그만 잊어라. 인구가 너무 늘지 않도록 조심하며 행복하게 살아라." 그 후 그들은 곧 나라를 떠났고ㅡ. 그 나라는 그들의 말을 지키며 지금도 평화롭고 느긋하게 존재하고 있지. 해피엔딩. 긴 이야기를 들은 남자가 즉각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라…? 그럼 당신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죠? 그 일을 알고 있는 걸 보면 그때 살아남은 사람 같은데. 설마 그 나라에서 여행자가 나올리는 없고." 질문을 받은 당사자가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가 입을 열었다. "11명째가 됐나보군요." "네…? 아아, 그렇군요."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곧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어째서?" 그리고 초록색 재킷의 남자에게 또다시 물었습니다. "운이 좋았던 것뿐이야ㅡ. 그때 일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내가 열 살 때였던 그날 밤, 그들이 집에 찾아와서 다짜고짜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이고 두 여동생을 죽였다. 그리고 그들의 리더는 내게 패스에이더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지ㅡ. 찰칵! 하지만 탄환은 발사되지 않았어." "호오…, 불발이었나보군요. 굉장히 드문 일인데." "동감이야. 패스에이더를 쏠 수 있게 된 후 그게 얼마나 엄청난 기적이었는지 알았지. 목숨을 건진 내게 리더는 이렇게 묻더군. '너 살고 싶냐?' 고. 나는 가족들의 피를 뒤집어쓴 채 대답했지. '살고 싶어요, 함께 데려가줘요'라고. 입 안에 피 맛이 감돌고 지독한 귀울음이 나를 괴롭혔지. 결국 나는 그들의 동료가 되어 몰래 트럭을 타고 고향을 떠났다." "그렇군요." "결과적으로 나라는 구원을 받았지. 우리 가족도 죽지 않았더라면 무척 기뻐했을 거다. 운이 없었던 거야. 그리고 나는 악운이 강한 편이었지. 그 후로 나는 그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며 새로운 인생을 살았다. 죽는 것보다는 나은 삶이었지. 그들도 나를 동료로 인정해줬고. 무엇보다도 리더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여자가 물었습니다. "잘 알겠어요. 그럼 이제 와서 나라에 복수하려고 돌아온 이유는 뭐죠? 리더가, 그녀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건 아닐 텐데." 순간 초록색 재킷의 남자는 눈살을 찡그리며 말했습니다. "…난 리더가 여자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여자의 감으로." "……." 초록색 재킷의 남자는 그 대답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갈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반년 전 동료들이…, 그들 열 명이, 여러 나라를 어지럽히며 돌아다니는 수배범이었던 그들이 우수한 추격자에게 걸리고 말았지. 설마 그렇게 간단히 죽을 줄이야. 추격자는 일을 마친 후 사라져버렸고 또다시 나만 살아남고 말았지. '물을 뜨러 갔다'는 이유만으로. 믿어지나?" "안됐군요. 하지만 운이란 그런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그렇긴 해. 하지만 나는 완전히 삶의 의욕을 잃고 말았지. 죽으려고 생각할 만큼. ㅡ그리고 또 하나는 마침 그때 그 나라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주 평화롭고 느긋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을. 죽은 500명의 사람들을 깨끗이 잊은 채 태평하게 살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아아, 그자들을 죽이고 나도 죽자'고 결심했지. 그래서 간신히 여기까지 온 거야. 이제 곧 그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 설마 이곳에서 당신들과 만나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 말을 들은 남자는 으음 하고 신음하듯 중얼거렸습니다. "큰일 났네. 그 얘기를 들은 이상 당신을 죽여서 그 나라를 구해야 하는 걸까요…?" "글쎄. 어쩌겠나? 피차 패스에이더도 갖고 있는데 뽑을 텐가?" 천천히 살기를 내뿜는 초록색 재킷의 남자를 향해 남자는 살기의 '살' 자도 없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당신 역량도 모르고 쓸데없이 다치기라도 하면 의미가 없겠죠? ㅡ솔직히 별로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큰 소리로 웃는 초록색 재킷의 남자를 바라보며 여자가 물었습니다. "당신 이름은?" 남자가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초록색 재킷의 남자도 조금 놀라며 대답했습니다. "아아…, 두 사람, 꼭 기억해줬으면 좋겠군. 그 나라를 멸망시킬 남자의 이름을. 사실 그 나라에서는 본명을 말하면 안 되지만. 내 이름은 '미라이 투ㅡ'라고 한다." 여자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미라이 투ㅡ'." "그래. 이상한 이름이지? 그 나라에서는 성을 '투ㅡ'나 '아ㅡ'처럼 한 글자를 길게 늘여서 짓곤 하지. 글자가 모두 20개밖에 없어서 같은 성, 같은 이름이 되지 않도록 별 의미 없이 붙이는 거야. 될 수 있는 대로 다르게 들리도록. 하지만 나는 가족들이 고민해서 지어준 이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들어. 죽기 전에 말할 수 있어서 기쁘군." "그렇군요. 잘 알겠어요. 아주 잘 알겠어요." 그리고 여자는 자동차 반대편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쓸데없는 싸움은 그만두도록 하죠." 그 말을 들은 남자가 알겠다고 짧게 대답했습니다. 초록색 재킷의 남자는 발치의 짐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만날 사람들은 모두 죽을 테니까 부디 당신들만이라도 기억해줘. 내 이름은ㅡ, 내가 살아온 증거니까. 잊지 말아줘." "기억해두죠. ㅡ마지막으로 한 가지 조언을 해도 될까요. 입국할 때 한 가지 조심해줬으면 하는 게 있어요." 여자가 말했습니다. "뭐지?" "그 나라는 옛날과 이름이 달라졌어요. 입구에 있는 비석의 이름을 한 번 읽어본 후에 들어가도록 하세요." "……? 그러지. 그럼 이만. ㅡ안녕, 역사의 목격자여." 초록색 재킷의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짐을 어깨에 멨습니다. 독약이 들어 있는 짐을 단단히 메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습니다. 나라가 있는 북쪽을 향해 똑바로. 초록색 재킷의 남자는 곧 작고 노랗고 다 부서져가는 차와 그 옆에 있는 두 사람의 여행자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안녕, 미라이 투ㅡ씨." 여자의 말에 미라이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남기며 가버렸습니다. 여자는 작아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또다시 중얼거렸습니다. "안녕, 역사의 목격자여." 육지와 이어져 있는 작은 섬나라에서 노랗고 다 부서져가는 자동차가 사라진 그 다음 날. 그 나라는ㅡ. 이름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그 나라는ㅡ. 인구가 한 명 늘었습니다. "지금쯤 필사적으로 비석을 다시 새기고 있겠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스승님?" "아무것도 아니에요." 노랗고 다 부서져가는 자동차는 해안을 달렸습니다. 제4화 국경 없는 나라 ㅡAsylumㅡ 내 이름은 리쿠. 개다. 언제나 즐겁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딱히 언제나 즐거워서 웃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태어날 때부터 이런 얼굴인 것뿐이다. 나의 주인은 시즈 님이다. 언제나 초록색 스웨터를 입고 있는 청년인데 복잡한 사정으로 고향을 잃고 지금은 버기를 타고 여행 중이다. 또 한 명의 일행은 티. 항상 말이 없고 수류탄을 좋아하는 소녀인데 복잡한 사정으로 고향을 잃고 얼마 전 우리의 일행이 되었다. 새로운 대륙으로 건너와서 처음 도착했던 나라를 도망치듯 출국한 후의 일이다. 길을 잃어버린 우리는 이윽고 숲 속에서 속세를 등진 사람처럼 살고 있는 노인을 만났다. 운 좋게도 노인은 제일 가까운 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었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시즈 님에게 노인은 조심하라고 말했다. "그 일대는 작은 나라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넓히려고 항상 추악한 싸움을 되풀이하고 있지. 나는 끝없는 전쟁에 염증을 느껴서 그곳을 떠나 온 거라네." 옛날 한 나라의 지도자였다는 노인은 그 말을 남기고 자신이 지은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버기를 타고 숲 속의 길을 달렸다. 이윽고 고개를 넘어 커다란 분지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노인의 말대로 나라가 있었다. 하지만 노인의 말과는 매우 달랐다. 작은 나라들이 군웅할거 식으로 성벽을 맞대고 있는 게 아니라 아주 거대한 나라 하나만이 존재했다. "통합했나? 그렇다면 안정되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됐을지도 모르겠군." 안주할 땅을 찾고 있는 시즈 님이 운전석에서 기쁜 듯이 말했다. 조수석 발치에 있는 나와, "……." 그 위에서 내 머리 위에 턱을 얹고 있는 티와 함께 버기는 비탈길을 내려갔다. "훌륭하지요! 이 나라의 시스템은 어느 곳보다도 훌륭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안내인 여자가 말했다. 우리는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예를 들자면 실내 야구장 같은 거대한 돔 형태의 공간에 몇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경이었다. 남녀노소,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넓고 평평한 공간에 앉아 있기도 하고, 누워 있기도 하고, 책을 읽고 있기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있기도 하고, 라디오를 듣고 있기도 했다. 한 사람당 주어진 공간은 침대 한 개 정도. 옆 사람의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밀집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은 전에도 본 적이 있다. 어느 나라에서 대지진으로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긴급 피난소와 똑같았다. 시즈 님이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설명을 요구하자 안내인은 높은 목소리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나라는 한 위대한 영웅이 옛날 이 지역에 난립해 있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여 만든 나라입니다. 그때까지 오랜 세월 비참한 전쟁이 되풀이되었죠." 그건 알겠다. "여러 나라를 통일해서 거대한 국가를 세웠을 때 초대 대통령이 된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지요." 뭐 그것도 알겠다. "그러다 어느 천재적인 생각을 해낸 겁니다! 그것은 '국경'이야말로 다툼의 근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이란 여러 나라가 자신의 영토를 소리 높여 주장하고, 타인의 영토를 무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이 세계에, 이 행성에, 국경 따윈 원래 없었습니다. 경계선 따윈 있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여기부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초대 대통령은 결심했습니다. 앞으로 이 나라에서는 절대 '경계선'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즉 '누구나 갖고 있는 공간'을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고. 사람들이 자신의 공간을 갖는 것을 헌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한 겁니다!" 시즈 님은 눈썹을 찡그리며 안내인에게 물었다. "그럼…, 주민들은 모두 이곳에 살고 있ㅡ." "그렇습니다, 여행자님! 여기가 집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공간 따윈 없이 평화롭고 공평하게 살고 있는 안주의 땅이죠! 이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거대한 돔에서 함께 생활합니다. 이 나라에는 이런 돔이 아주 많지요. 장래 모든 돔을 통합해서 한 지붕 아래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국가 계획입니다." "가족끼리 함께 사는 것도 안 됩니까? 연인끼리도?" "당연하죠! 그런 식으로 예외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물론 가까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 정도 자유는 있어야겠죠." "그럼…, 이 나라에 '프라이버시'는 없는 겁니까?" 시즈 님의 물음에 안내인은 가슴을 활짝 펴며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없습니다! 그거야말로, '자신의 영토'야말로 어리석은 전쟁을 시작하는 근본적인 이유니까요! 그런 걸 인정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그것을 넓히려고 끊임없이 싸움을 되풀이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그런 건 처음부터 없으면 되는 거죠. 이 나라는 모든 것이 오픈되어 있습니다. 생활 장소도, 화장실도, 욕실도. 그러니까 그걸 둘러싸고 싸움이 일어날 염려도 없습니다." "그 헌법 말인데요…." "네! 헌법으로 개정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어서 두 번 다시 어리석은 과거로 돌아갈 일은 없습니다! 헌법을 위반한 사람이나 모반을 꾀하는 사람은 엄격한 처벌을 받습니다." 안내인은 기뻐서 참을 수 없는 듯한 태도로 몹시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시즈 님에게 말했다. "여행자님들은 이민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나라는! 이 멋진 나라의 국민이 되지 않겠습니까! 대환영입니다!" 시즈 님은 필요한 물건을 구입한 후 저녁 무렵 또다시 성문 밖으로 나왔다. 그 '공간'에서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깊은 숲 속에서 그날 밤을 맞이했다. 시즈 님이 그 나라에서 산 물건 중 하나는 작은 텐트였다. 그 전에 들렀던 나라에서 마침 좋은 물건을 찾을 수 없어서 미뤄뒀던 것이다. 시즈 님은 자신의 텐트와 조금 떨어진 곳에 그것을 세운 후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티에게 말했다. "이건 티의 텐트란다. 오늘부터 여기에서 자도록 하렴." "……." 티는 아무 말 없이 항의하는 눈으로 시즈 님을 바라보았지만 시즈 님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자 티는 말뚝을 뽑고 텐트를 들어서 시즈 님의 커다란 텐트 옆으로 옮긴 후 그곳에 다시 텐트를 세웠다. "잘 자." 티는 시즈 님에게 잘 자라고 말한 후 자신의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잘 자렴, 티." 시즈 님도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의 텐트로 들어갔다. 올빼미 울음소리가 낮게 울려 퍼지는 숲 속. 사이좋게 서 있는 두 개의 텐트를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굉장히 찾기 힘든 후기 ㅡPrefaceㅡ 그리고 여기에도 후기가. 다시 한 번 안녕하세요. 후기로 허를 지르는 작가 시구사와 케이이치입니다. 본문 뒤에 슬쩍 붙여서 여기부터 후기가 시작됩니다. '찾기 쉬운'에 대비해서 '찾기 힘든'은 최대한 찾기 힘든 위치에 최대한 찾기 힘들게 썼습니다. "두 번이나…, 후기가 있다니…, 장난 하냐…." 이런 말을 들을 것 같군요. "선택할 수 없는 후기 따윈 없어!" 그런고로 후기가 두 개라도 신경 쓰지 말고 그대로 읽어주세요. 참고로 세 번째는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세요. 자, 인사는 '찾기 쉬운'에서 끝냈으니 이번에는 제작 비화랄까, 아마도 작가밖에 모를 이야기에 대해 평범한 후기처럼 써내려갈까 합니다. 11권의 내용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없습니다만 본문을 먼저 읽고 나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셔도 상관없습니다. 원래 후기니까요. 설령 영어 제목은 '전기'라 해도. ·메인 타이틀에 대한 고찰 응모원고를 쓰고 있을 때였습니다. 「키노의 여행」만으로는 너무 심플해서 메인 타이틀로는 썰렁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 심플함이 마음에 들지만 당시에는 제법 진지하게 고민했죠. "!" 이거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한 제목이ㅡ. 「어제의 키노의 여행」(주1: 어제는 일본어로 키노(노가 길게 발음됨). 「어제의 키노의 여행」을 일본어로 바꾸면 「키노의 키노의 여행」이 된다.). ……. 지금 제목으로 짓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제목은 심플하게 놔두고 영어 제목 the Beautiful World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그때 '역시 '어제의~'는 그만두자'고 결단을 내린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은 기분입니다. ·오식에 관한 이야기 오식, 즉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잘못된 문자를 말합니다만 사실 꽤 많습니다. 원래 체크하고 또 체크해서 하나도 없게 만들어야 하지만 인간이 하는 일이다보니 반드시 뭔가가 나오더군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1년 전ㅡ. 지난번 「키노의 여행 10」을 집필할 때였습니다…. 찬반양론이었던 아주 긴 작품 「가희가 있는 나라」에 '엘리어스'라는 소년이 등장합니다. 베트남전을 그린 영화 「플래툰」에 등장하는 캐릭터에서 따온 이름입니다만 이 이야기를 쓸 때 제가 유일하게 자력으로 클리어한 RPG 「파이널판타지 VII」의 아주아주 유명한 캐릭터 '에어리스'로 잘못 쓰지 않도록 무척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다보면 실수가 생기는 법. 자꾸 '에어리스'라고 썼다가 지우고 고치기를 되풀이하고 집필 후에도 체크에 체크를 거듭했지만 결국 책이 나오고 보니ㅡ. 죄송합니다(밥이라고 지을 걸 그랬나…. 하지만 밥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캐릭터가 아니었는걸. 반즈는 성이고). 여담이지만 오식은 재판(간행된 책을 다시 출판하는 것)하기 전에 편집부에서 틀린 부분을 고치도록 체크해서 보내줍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책이 나온 후에 글을 꼼꼼히 읽어보지 않습니다. 집필할 때 퇴고를 하면서 몇십 번이나 읽었기 때문이죠. 그 때문에 인터넷 게시판이나 감상 블로그에서 지적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오식을 눈치 채기도 합니다. ·오타에 관한 이야기 오식 외에 오타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어에 그런 말이 있는지는 제쳐두고 키보드를 잘못 누르는 경우를 말하죠. 원래는 그 글자로 끝내려는 게 아니었는데 '이가은는' 등 조사를 잘못 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잘못 쓴 경우가 문장으로서 더 훌륭하거나 반짝반짝 빛나는 경우도 있죠. 그럴 때는 고치지 않고 그대로 씁니다. 결과만 좋으면 장땡. 결국 어디가 오타였는지 잊어버린 채 제 문장이 세상에 나가는 겁니다. 소설에는 우연의 천사와 악마가 살짝 숨어 있답니다. ·캐릭터 이름을 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즐겁다. 「키노의 여행」에는 이름이 있는 서브캐릭터가 별로 없습니다. 캐릭터가 두드러지지 않도록 일부러 '주민'이나 '수염 난 남자', '입국심사관' 등 무미건조하게 쓰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가끔 등장하는 이름이 있는 중요한 서브 캐릭터는 즐거운 마음으로 고민하고 머리를 쥐어짜서 많은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짓습니다. 이것저것 조사해보면 재미있을지도 모릅니다(작명용으로 팔고 있는 「여러 나라말 사전」등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가희의 나라」의 '유안', '케인', '로브'처럼 생각나는 대로 지은 서브 캐릭터도 있습니다만. 네? 주연급 캐릭터 스승님과 그녀의 파트너 이름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요?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사실 스승님은 나오지는 않았지만 지어둔 이름이(퍼스트 네임 뿐이지만) 있습니다. 스승님이 처음 등장한 2권을 집필할 때부터 생각해뒀죠. 나오지 않은 것뿐입니다. 언젠가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한편 파트너 청년은…, 음…, 저…. 주: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시구사와는 그를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패스에이더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한편 패스에이더, 즉 총기, 한마디로 총 말입니다만ㅡ, 이쪽에는 명확한 모델이 있어도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이건 배경 설정이 지구가 아닌 「앨리슨」, 「리리아와 트레이즈」시리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만 알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 총의 특징을 간단히 묘사하곤 합니다. 너무 자세히 쓰면 편집부의 명령으로 잘리기 때문에 지나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합니다. 줄이고 또 줄이고. 그 반동으로 「학원 키노」에서 끝장을 봤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총은 단순히 제 취향으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모델 건이나 에어건이 가까이 있으면 등장인물처럼 겨눠보기도 하고 휘둘러보기도 하고 방 안에서 미친 사람처럼 난리를 치곤 합니다. 흉내 내지 마세요. 아무도 없는 방에서 라이트가 켜진 장난감 총을 들고, "휴우…, 클리어." 라고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30줄 남자는 정상이 아니니까요. 예외도 있습니다. 9권 「죽음의 나라」에서 스승님이 허리에 차고 있던 루가P08. 이것만은 어느 곳에서 악수회를 할 때 어느 분이 "꼭 등장시켜주세요!" 라고 부탁했던 생각이 나서 등장시켰습니다.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있습니다만 앞으로 똑같은 부탁을 해도 들어드릴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릅니다. 이해해주세요. "화승총!" 이라고 외치면 곤란합니다. 또 가끔 <플루트>처럼 제가 만들어낸 총도 등장합니다. 작품에 등장한 총을 조사해보시는 분들은 주의하세요. ·그리고 패스에이더는 '패스에' 워드 프로그램으로 글을 쓸 경우 자주 나오는 긴 단어나 문장은 짧은 단어로 사전등록을 해 두면 편리합니다. 제 컴퓨터에서 '패스에'라고 치고 변환기를 누르면 다음과 같은 선택란이 나옵니다. 1. 패스에이더 2. 패스에이더(주: 총기를 가리킴) 3. 핸드 패스에이더(주: 패스에이더는 총기. 이 경우는 권총) 편리하죠? 굉장히 편리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너무 익숙해지면 보통 대화를 할 때도 "키노의 '패스에'가~." 이런 말이 튀어나올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시구사와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를 지껄여도 부디 뜨뜻미지근한 눈으로 지켜봐주세요. ·키노는 무엇을 들고 여행을 하는가? 「키노의 여행」은 제가 여행을 좋아해서 탄생한 작품입니다. 처음 집필할 때는 종종, "키노의 물건 리스트를 만들어 볼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뭘 갖고 있고 어디에 실어뒀는지 자세히 설정해두면 집필이 편해질 것 같아서요. 하지만 그만뒀습니다. 왜냐하면ㅡ. 제가 '짐을 줄이지 못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떠날 때 이것도 필요하겠지, 저것도 필요할 거야, 이게 없으면 불안해 등등 짐이 유달리 많고 무거워집니다. 여행에서 돌아와보면 결국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거나 현지에서 쉽게 살 수 있었던 경우도 많습니다. 그때마다 다음에는 반드시 가볍게 챙겨서 가자고 반성합니다만 결국 또…. 그런 제가 '키노의 물건 완벽 리스트' 같은 걸 만들었다가는ㅡ. 에르메스 뒤에 짐수레를 끌고 여행을 다녀야 할 겁니다. ·동인지에 대해서. 굉장히 느닷없지만 전 제 작품의 동인지를 만드는 걸 무척 환영합니다. 그렇게까지 좋아해주시는 게 감사하고 '직접 책을 낸다'는 에너지가 필요한 행동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황당한 패러디나(생각해보면 「학원 키노」에서 작가 본인이 비슷한 짓을 하고 있지만…), 읽으면 코피로 홍수가 날 만큼 적나라한 19금 패러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제 작품을 패러디한 동인지는 될 수 있으면 읽지 않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이유는 만에 하나, 아니, 억의 하나라도 이야기가 겹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힘내세요. 그 상상력과 창조력이 도움이 될 때가 분명 올 겁니다. 그리고 후기는 여기에서 갑자기 끝을 맺습니다. 제5화 학교의 나라 ㅡAssignmentㅡ 숲 속의 길을 한 대의 모토라도(주: 이륜차. 하늘을 날지 않는 것을 가리킴)가 달리고 있었다. 뒷바퀴 양옆에 검은 상자가 달려 있고 그 위에 파이프 짐받이가 설치된 모토라도였다. 짐받이 위에는 아무것도 실려 있지 않았다. 운전사는 젊은 인간이었다. 짧고 검은 머리카락에 나이는 10대 초반 쯤. 챙과 귀를 덮는 속대가 달린 모자를 쓰고 눈에는 고글, 그리고 검은 재킷 차림이었다. 운전사의 허리에는 굵은 벨트가 감겨 있었고 오른쪽 허벅지 위치에는 리볼버 타입의 핸드 패스에이더(주: 패스에이더는 총기. 이 경우에는 권총)가 홀스터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몸 앞에는 산탄을 발사할 수 있는 새까만 패스에이더 한 자루가 어깨끈에 매달려 있었다. 긴 튜브 탄창과 배럴 위에 달려 있는 구멍투성이 방열판이 눈에 띄었다. 모토라도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그리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푸른 하늘과 초록빛 숲 속을 달렸다. 숲 속의 길은 일직선으로 뻗어 있어서 앞쪽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운전사는 빠른 속도로 모토라도를 몰았다. 때때로 비뚤어지는 몸 앞의 패스에이더를 제자리로 되돌리며. "키노." 모토라도가 운전사에게 말했다. 키노라고 불린 운전사가 대답했다. "속도라면 늦추지 않을 거야, 에르메스. 최대한 빨리 오래 달리는 연습 중이니까." "그건 상관없지만." 에르메스라고 불린 모토라도가 말했다. "그게 아니라 오늘 어디 가는 거야? 장보러 가?" "내가 말 안 했나?" 키노는 액셀러레이터에서 손을 뗐다. 모토라도의 속도가 줄고 엔진소리도 작아졌다. 키노가 말했다. "학교." "학교?" "응. 나 지금 가는 나라에 있는 학교에 5일 동안 다니게 됐어." "그래? 왜?" "스승님이 그 학교에서만 가르쳐주는 기술이 있다면서 좋은 기회니까 배우고 오래.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할 거야." "흐응. 그렇군." "그러니까 당분간 매일 긴 거리를 달리게 될 거야." "그거야 모토라도로서는 기쁜 일이지만. 요즘은 날씨도 안정적이고." "빠르고 오래 달리는 공부도 되니까." 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또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당겼다. 딱딱하게 다진 흙길에서 에르메스가 속도를 높였다. 숲을 빠져나가자 성벽이 보였다. 회색 성벽이 크고 넓은 나라를 둘러싸고 있었다. 시간은 정오가 되기 조금 전. 태양은 하늘 꼭대기 가까이 떠올라 대지에 내리쬐었다. 키노는 거대한 성벽 앞, 라이플을 든 파수병들 앞에서 에르메스를 멈춰 세웠다. 사이드 스탠드로 에르메스를 세우고 고글을 벗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키노. 이쪽은 파트너 에르메스. 입국시켜주세요." 키노는 가까이 다가온 파수병들에게 정중하게 말한 후 뒷바퀴 옆의 가방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50세가 넘어 보이는 파수병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음, 알았다. 들어가도 좋다." 편지를 읽어본 파수병은 순순히 허가를 내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반 시민이 패스에이더를 소지하려면 엄격한 심사가 필요하단다. 네 패스에이더는 출국할 때까지 우리가 맡아두마." "알겠습니다." 키노는 순순히 대답하며 몸 앞에 걸고 있던 산탄 패스에이더를 벗고 아홉 발이 들어 있는 산탄을 전부 꺼냈다. 그 패스에이더와 산탄, 그리고 배럴과 탄창과 그립 부분을 분해한 허리의 리볼버를 파수병이 내민 나무상자에 재빨리 집어넣었다. "굉장한 걸 갖고 있군…. 압수해놓고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이 넓은 우리나라의 일부에는 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는 테러리스트가 활개 치는 위험한 장소가 있단다. 지도에 적어뒀으니까 섣불리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렴. 그 이외의 장소라면 문제없다. 아, 그리고 속도위반만큼은 조심하거라. 잡히면 벌금을 물어야 하니까."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키노는 에르메스를 밀고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한 사람과 한 대의 뒷모습을 지켜본 후 젊은 파수병이 상관을 돌아보았다. "저…, 하나만 여쭤 봐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묻는 부하를 바라보며 그는 무슨 일이냐고 대답했다. "저 소년은…, 대체 뭡니까?" "글쎄? 나도 처음 보는 소년이네만." "……." 그 담담한 대답에 젊은 병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 노파의 소개장을 갖고 있더군. 들여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네." "'그 노파'라면 남쪽 깊은 숲 속에 살고 있다는…, 그 무시무시한 소문의 노파 말입니까?" "달리 누가 있겠나?" "손자일까요?" "아니. 내가 아는 한 그 노파는 줄곧 혼자 살고 있었다네. 소문으로는 길을 잃고 헤매는 소년을 숲 속에서 주웠다더군." "뭡니까, 그건…? 그보다 그 노파는 대체 정체가 뭡니까?" "그건 전 대장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네. 대장은 연대장에게서 얘기를 들었고 연대장은 장군에게서 직접 들었다더군. 마침 말이 나온 김에 자네에게도 말해두지. 선배 행세를 하려는 게 아니야. 알아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얘기하는 거라네." "네." "'오래 살고 싶으면 쓸데없는 탐색은 하지 말 것'. ㅡ이상." "……. 오늘 저녁밥은 뭘까요?" "글쎄, 뭘까? 생선이면 좋겠군."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성벽에 둘러싸인 넓은 나라 안에는 숲과 밭이 지평선 저편까지 펼쳐져 있었다. 드문드문 집들이 보였다. 키노는 파수병에게 받은 지도를 펼친 후 재킷 주머니에서 메모를 꺼내 서로 비교해보았다. "이제 알겠군, 똑바로 가다 두 번째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꺾어들면 돼. 거기서 더 가다보면 작은 마을이 있어. 거기가 목적지야." 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지도와 메모를 뒤집어서 에르메스에게도 보여주었다. "응, 맞는 것 같아." 키노는 지도와 메모를 넣고 달리기 시작했다. "여러분, 안녕. 오늘부터 이 교실에서 새로운 학생 한 명이 함께 공부하게 됐어요.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소개하도록 하죠. 이름은 키노라고 한답니다. 키노, 앞으로 함께 공부할 학생들이에요. 모두 열두 명. 키노와 같은 나이거나 조금 위랍니다. 그럼 친구들에게 인사하도록 하세요." "안녕하세요. 키노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알겠지만 키노는 이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게 아니에요. 나라 밖에 큰 숲이 있죠? 그곳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답니다. 하지만 이건 여기 있는 여러분만 알고 있는 비밀이랍니다. 오늘부터 키노는 선생님이 가르치는 오후 수업을 받게 될 거예요. 다들 사이좋게 함께 공부하도록 하세요. 키노의 모습이 여러분과 다르다고 따돌리면 안 돼요. 함께 책상을 나란히 하고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 친구랍니다. 알겠죠? ㅡ자, 그럼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키노, 저 책상에 앉으세요. 다른 아이들을 따라잡으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할 거예요. 알겠죠?" "네. 잘 부탁합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한 숲 속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키노와 에르메스는 달리고 있었다. 키노는 아침과 마찬가지로 몸 앞에 패스에이더를 걸고 아침과 마찬가지로 맹렬하게 질주하고 있었다. 숲 속에 높은 배기음이 울려 퍼졌다. "키노! 학교는 어땠어?" 에르메스가 큰 소리로 물었다. 키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에르메스는 다시 한 번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응? ㅡ아! 재미있었어!" 키노도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맹렬한 속도로 양옆을 흘러가는 숲의 나무들이 고글에 비쳤다. "뭘 배웠는데?" "물건을 만드는 법." "무슨 물건?" 에르메스의 물음에 키노는 그 '물건'에 대해 대답했다. "호오ㅡ, 좀 재미있겠다." "즐거웠어. 재미있더라. 반 아이들과 별로 친해지지 못해서 좀 겉돈 것 같긴 하지만…. 아마 긴장해서 그랬을 거야. 다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진지하게 물건을 만들고 쉬는 시간에는 사이좋게 얘기를 나누더군. 다들 그 나라 사람이라 진지하고 심각하게 장래를 생각하고 있나봐." "흠흠,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었어!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된 여선생님인데 예쁜 금발에 굉장한 미인이야. 무척 다정하고 오늘 수업을 시작한 나를 꼼꼼하고 친절하게 가르쳐줬어. 말투도 급하지 않고 알아듣기 쉬워. 모르는 말이 많아서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싫은 내색 한 번도 안 하고 가르쳐줬어. 덕분에 수업 중에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하나도 없었어." "흐응." "스승님이 갑자기 학교에 다니라고 했을 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생각보다 훨씬훨씬 즐거웠어." "잘됐네. 계속 기다려야 되는 나는 따분해 죽겠지만. 들개가 내 타이어에 영역 표시를 하려고 들지 뭐야." "그게 뭔데?" "화장실 신세가 될 뻔했다는 뜻이야. 이래서 난 개가 싫어. 소리를 질러서 깜짝 놀라게 해주긴 했지만." "뭐? 시끄럽게 굴면 들킬 텐데." "걱정 마. 인간에게는 들리지 않게 아주 높은 목소리로 질렀으니까." "……. 그게 무슨 소리야?" "설명하기 귀찮아. 나중에 가르쳐줄게.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든가." "…에르메스도, 스승님도, 선생님도 정말 많은 걸 알고 있구나. 난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뭐 어때. 앞으로 배우면 되지." "응…, 맞아. 내일도 모레도 학교에 갈 거야. 5일 후에 수업이 끝나니까 그때까지 계속." "나야 하루 종일 숲 속에서 자는 것보다 달리는 게 낫지만." "돌아가면 스승님한테 오늘 배운 걸 얘기해야지. ㅡ아, 스승님의 굉장한 점을 또 하나 발견했어." "뭔데?" "스승님은 아는 건 뭐든지 가르쳐주고 모르는 건 그걸 알고 가르쳐줄 사람을 가르쳐줘. 그러니까 스승님은 자신이 뭘 모르는지 잘 알고 있는 거야. ㅡ내 생각에 그건 굉장한 일인 것 같아." "그렇군. ㅡ그건 그렇고 그 나라에 그런 걸 가르쳐주는 학교가 있을 줄이야. 좀 놀랐어. 그런데 키노." "응?" "배운 건 좋지만 실제로 도움이 될까?" "글쎄…. 실은 잘 모르겠어." "뭐야." "하지만 글자를 배우기 시작할 때 '이게 도움이 될까?' 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 '이런 걸 외울 시간에 아이들과 밖에서 놀고 싶어. 나무 오르기를 잘 하고 싶어'라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글자를 배우면 재미있는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 지금 배우고 있는 것도 언젠가 도움이 될 거야." "그렇군. 모토라도는 글자를 쓰는 방법 따윈 평생 몰라도 되지만." "…에르메스, '모토라도의 일생'은 어떤 거야?" "설명하기 어렵군." 키노와 에르메스는 질주를 계속하며 숲 속의 교차로를 꺾어들었다. 그 길을 한동안 달리자 통나무집 한 채가 나타났다. 통나무집은 숲을 일궈서 만든 밭 옆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요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굴뚝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키노는 밭 앞을 지나 통나무집 앞에서 에르메스를 멈췄다. 곧 집 안에서 한 노파가 모습을 나타냈다. 앞치마 차림의 노파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긴 은발을 하나로 올리고 있었다. 허리 뒤에는 배럴이 짧은 리볼버가 홀스터에 꽂혀 있었다. "어서 오렴, 키노." "다녀왔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이라고 불린 노파는 통나무집 현관에서 길로 내려와 키노에게 산탄을 사용했냐고 물었다. 키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평소대로 밭에 있는 허수아비를 쏴보세요." "네!" 키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르메스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조금 달린 후 뒷바퀴의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체가 커다랗게 기울고 뒷바퀴가 미끄러지며 방향이 빙글 바뀌었다. "가자, 에르메스." "살살 해줘." 키노는 에르메스를 출발시켰다. 급하게 가속하며 차례차례 기어를 올렸다. 통나무집과 노파 앞을 통과할 때 키노는 양손을 놓았다. 관성의 법칙으로 계속 달리는 에르메스에 탄 채 키노는 몸 앞에 걸고 있던 산탄 패스에이더를 들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리고 살짝 엉덩이를 들며 왼쪽을 겨눴다. 밭 안쪽, 숲과의 경계선에 다섯 개의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쓰고 남은 목재로 만든 인간과 똑같은 크기의 허수아비에는 각각 철판이 앞치마처럼 걸려 있었다. 키노는 방아쇠를 당겼다. 발사된 아홉 개의 둥근 산탄은 허공에 퍼지며 허수아비에 명중하여 철판을 두드렸다. 높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키노는 강한 반동을 잘 흘려 넘기며, 그리고 왼손으로 빠르게 펌프를 조작하여 탄피를 배출하며 산탄을 연사했다. 숲 속에 잇달아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근처에 있는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밭 앞을 지나는 동안 키노는 다섯 발을 연사했다. 탄환은 모두 다섯 개의 허수아비에 명중했다. 인간이라면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밭 앞을 지난 후 키노는 양손으로 핸들을 잡고 급브레이크를 걸어 또다시 모토라도의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또다시 속도를 높여 이번에는 어깨끈과 함께 패스에이더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나머지 네 발이 네 개의 허수아비에 명중했다. 마지막 한 발이 발사된 후 길 위에는 아홉 개의 탄피가 떨어져 있었다. 천천히 앞으로 돌아온 키노에게 노파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좋아요. 실력이 늘었군요." 키노는 에르메스를 멈추고 엔진을 껐다. 사이드스탠드를 세우고 땅에 내려섰다. "학교는 어땠나요, 키노?" 노파가 물었다. "재미있었어요." 키노는 즉각 대답했다. "그럼 저녁식사를 할까요. 오늘은 소시지 스튜를 끓였답니다."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가는 키노를 바라보며, "안 부러워." 에르메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음 날. 학교에 다닌 지 이틀째 되는 날 오후. "그래, 들어가렴." 키노와 에르메스는 파수병의 허가를 받고 성벽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 뭔가 질문은 없나요? 없나보군요. 자, 여러분은 이제 제일 기본적인 것을 배웠습니다. 머리가 아주 좋은 학생들뿐이라 선생님은 기뻐요. 네? 괜히 비행기 태워봤자 아무것도 안 나온다고요? 정말인데. 그보다 대체 어디에서 그런 말을 배웠나요? 선생님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ㅡ키노도 배우는 속도가 다른 학생들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군요. 처음에는 갑자기 새로운 환경에서 공부하게 돼서 혹시나 따라오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선생님은 키노한테 사과해야 할 것 같군요. 정말 우수해요." "고맙습니다." "이 반에는 지금까지 열두 명의 우수한 학생이 있었지만 오늘부터는 '열세 명'이군요. ㅡ네? 역시 아무것도 안 나온다고요? 아하하, 알겠어요. ㅡ오늘 수업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다음 수업은 하루 쉬고 그 다음 날 하겠습니다. 쉬는 동안 오늘 배운 걸 다시 한 번 살펴보세요. 다음부터는 조금 복잡한 공부를 하게 될 겁니다. 그럼 여러분, 안녕. 조심해서 돌아가도록 하세요ㅡ." 그리고 이틀 후. "여어, 왔구나." 키노와 에르메스는 파수병의 허가를 받고 성벽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분, 물건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건 손재주가 아니랍니다. 우리는 손목시계를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그보다 중요한 건, 제일 중요한 건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잘' 만드는 거예요. '잘' 만들어진 물건은 만든 사람의 성격대로 '잘' 작동한답니다. 쓸모없는 물건을 만드는 건 괜한 시간낭비일 뿐이에요. 그런 걸 만들어서는 안 되지만 수업시간에는 괜찮아요. 만약 잘 만들 수 없다면 선생님과 함께 어디가 잘못됐는지 생각해보도록 해요. 도저히 모르겠으면 선생님이 알려줄게요. 그리고 다음에 만들 때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면 돼요. 여러분이 만든 걸 체크해볼까요. ㅡ아, 훌륭하군요. 잘 했어요. ㅡ이것도 훌륭하군요. 내 말대로 잘 만들었어요. ㅡ아, 이건 이 끈을 이쪽에 묶지 않으면 걸릴 것 같네요. 하지만 그 외에는 아주 좋아요. 나중에 고치도록 하죠. ㅡ이건, 음, 훌륭하군요. ㅡ키노가 만든 건, 아, 조금 고쳐야 할 부분이 있군요. 이 부분은 밖에서 보이면 안 돼요. 이걸 숨겨야겠군요. 그리고 매듭도 함께 숨기도록 하세요. 밖에서 보여도 되는 건 이것 하나뿐이지만 그것도 숨기도록 하죠. ㅡ괜찮아요. 키노가 만든 것도 고치면 좋아질 거예요. 그렇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을 것 없어요." "선생님, 질문이 있는데요." "뭐죠, 키노." "이 끈 말인데요, 위에 묶어야 하나요?" "좋은 질문이군요. 그건 경우에 따라 달라요. 문제는 몸 어디에 붙이느냐에요. 배에 붙일 경우 위에 묶어서 만들도록 하세요. 등에 붙일 경우에는 아래쪽에. 즉 몸과 반대 방향이 되도록 보이지 않게 하면 되는 거예요. 음, 일단 지금은 위로 묶도록 하세요. 보이는 쪽이 만들기 쉬우니까요." "그렇군요. 알겠어요. 고맙습니다." "다른 질문은? ㅡ오오! 다들 적극적이군요. 키노가 다른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네요." "ㅡ라고 선생님께 칭찬받았어요." "잘됐군요, 키노." "내일도 갈 거예요. 앞으로 두 번만 더 배우면 완성이에요." "훌륭하군요. 완성되면 갖고 와서 내게도 보여주세요." "네." 그로부터 이틀 동안 키노와 에르메스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키노, 열심히 하고 있군요." 키노는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고, "올 테면 와봐라!" 에르메스는 개와 씨름을 했습니다. "여러분! 드디어 수업이 끝났습니다. 여러분의 노력을 선생님은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키노는 5일 동안 다녔던 교실에 있었다. 낡은 건물의 한 방을 개조한 교실. 콘크리트 기둥은 여기저기 깨져 있었고 창문에는 유리창 대신 널빤지가 박혀 있었다. 천장에는 백열등이 몇 개나 달려 있었지만 교실 안은 어두컴컴했다. 낡고 수리한 흔적이 눈에 띄는 책상과 의자에 키노를 포함한 열세 명의 소년소녀가 앉아 있었다. 하얀 셔츠차림의 키노 외에는 모두 기운 흔적이 눈에 띄는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학생들의 책상 위에는 작은 가방이 놓여 있었다. 가죽 가방도 있고, 천가방도 있고, 배낭도 있고, 어깨에 메는 가방도 있고, 손에 들고 다니는 가방도 있었다. 피크닉을 가기에는 딱 좋은 크기의 여러 가지 가방들. 안에 뭔가가 들어 있는지 모두 조금씩 부풀어 있었다. 결코 비싸 보이지는 않지만 직접 정성스럽게 만든 가방들뿐이었다. 키노의 앞에는 어깨에 메는 옅은 베이지색 가방이 놓여 있었다. 역시 커다란 도시락 통을 넣은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드디어 완성했군요! 한 명도 탈락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군요! 이제 선생님이 가르쳐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이제 그 가방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서 아빠, 엄마, 오빠, 언니, 그리고 이웃 사람들에게 보여주도록 하세요! 분명히 기뻐해줄 거예요!" 재봉틀이 놓여 있는 교탁 앞에서 금발을 하나로 묶은 미인이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일었다. "이제 여러분과는 헤어져야겠지만 선생님은 여러분이 앞으로 훌륭히 역할을 완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할게요. 수업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가르쳐주고 싶은 게 있어요. 들어주세요." 스물여섯 개의 눈동자가 선생님의 얼굴을 향했다. 선생님은 학생들 모두와 천천히 눈을 맞춘 후 말했다. "인생에서 뭔가를 얻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뭘까요? 선생님은 '신념'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그렇게 정한 것.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내는 힘'ㅡ그거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여러분은 앞으로 그 신념에 따라 행동하게 될 거예요. 그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할지도 몰라요. '그게 정말 올바른 길인가'. ㅡ하지만 여러분, 흔들려선 안 돼요. 마음을 움직여선 안 돼요. 마음이 움직여선 안 돼요. 여러분이 원하는 최종 목표까지 똑바로 나아가도록 하세요! 선생님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죠? 하지만 앞으로 여러분이 바깥 세계에 나가서 신념에 따라 행동할 때ㅡ, 그때만은 거짓말을 해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보다 자신의 신념을 믿으세요. 신념을 위해 몸 바쳐 싸우도록 하세요!" 선생님은 온몸을 휘두르며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꽃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알고 있어요. 여러분 모두 그럴 수 있다는 걸. ㅡ여러분, 졸업입니다. 축하해요!" 키노는 옅은 베이지색 가방을 에르메스 뒷바퀴의 상자에 넣고, "다녀왔습니다, 스승님." 숲 속의 통나무집으로 돌아왔다. 현관 앞. 새 울음소리와 붉은 하늘 아래에서, "다 만들었어요, 스승님!" 노파는 키노의 가방 안을 살펴보았다. "흐음, 지금은 이런 재료로 이렇게 만드나보군요." 키노는 에르메스에게도 가방 안의 물건을 보여주었다. "흠, 이 끈에 걸리게 되어 있군. 흐음ㅡ." 에르메스도 몹시 감탄했다. 다음 날 오전. "그럼 시작할까요, 키노. 가방을 가져오세요." "네, 스승님. 여기 있어요." 키노와 노파는 키노가 만든 물건을 조심스럽게 분해해서 구조를 살폈다. 그리고. "흠. 굉장한 참고가 됐어요. 열심히 노력했군요. 아주 잘 만들었어요. 자세한 도면도 그렸으니 그만 돌아가도록 할까요." "네!" 다시 원래대로 조립했다. 오후. 두 사람과 한 대는 집에서 떨어진 숲 속에 들어갔다. 키노는 옅은 베이지색 가방을 나뭇가지에 걸었다. 가방 안에서 뻗어 나온 선에 다른 긴 끈을 묶었다. 그리고 끈을 늘어뜨리며 노파와 에르메스가 있는 멀리 떨어진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당겨도 될까요, 스승님?" "네, 언제든지 당기세요." "에르메스는?" "나도 됐어." "그럼 시작합니다. 제발 성공하기를!" 키노는 긴 끈을 힘껏 당겼다. 끈은 숲 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이윽고 가방에서 떨어졌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가방에서 2초 정도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가방은 폭발했다. 안에 들어 있던 고성능 군용 폭약이 폭발했다. 폭약 주위에 박혀 있던 수많은 못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근처에 있던 나무들의 표면에 가차없이 꽂혔다. 폭풍(爆風)이 숲을 뒤흔들고 나뭇잎이 요란하게 날아올랐다. 가방을 걸어뒀던 나무는 폭발로 줄기가 움푹 파여 허공으로 치솟았던 검은 연기가 사라짐과 동시에 숲 속으로 사라졌다. 숲 속에 울려 퍼져 모든 새들을 날아오르게 했던 폭음이 하늘로 사라졌다. "성공이에요! 무사히 폭발했어요." "잘됐다." 기뻐하는 키노와 에르메스에게 노파가 말했다. "그럼 선생님께 보고를 해야겠군요. 내일 그 나라에 다시 한 번 가보는 게 어떨까요? 사야 할 물건이 있으니 간 김에 사오도록 하세요." 다음 날. 아침 일찍 집을 나온 키노와 에르메스는 긴 거리를 단숨에 질주하여 오후가 되기 조금 전에 나라 안으로 들어갔다. 늘 그랬던 것처럼 넓은 나라 안에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낮은 빌딩이 밀집되어 있는 마을 중심부에 도착해서 늘 에르메스를 세워뒀던 뒷골목으로 꺾어들려던 순간이었다. "아, 학교가…." "어라라?" 길 저편, 학교가 있던 건물이 무너진 상태였다. 거대한 불도저가 이미 돌무더기로 변한 건물 위를 뒤덮고 모든 것을 가차없이 부수고 있었다. 키노는 에르메스를 밀고 뒷골목을 지나 건물 앞으로 향했다. 건물은 많은 무장 경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앞쪽의 넓은 길에 경찰차와 트럭이 몇 대나 서 있었고 그 뒤에 쳐놓은 규제선 바깥쪽에서 마을 사람들이 음울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키노를 발견한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조금 기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곧 무관심을 가장한 무표정으로 변했다. 파괴음과 함께 부서져가는 건물 앞에 젊은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금발이었다. 여자는 경관들에게 둘러싸여 뒤로 수갑을 차고 있었다. 무너지기 시작하는 건물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선생님이다." 키노가 작은 목소리로 에르메스에게 말했다. "뭐야. 무슨 일이지?" "물어볼까." 키노는 에르메스를 밀고 규제선 앞으로 다가가서 그곳에 있는 젊은 경관에게 말을 건넸다. "저,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응? ㅡ아, 넌 이 나라 사람이 아닌가보구나. 널 위해서 하는 말인데 이런 마을에는 오지 않는 게 좋을걸." 경관이 키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리고 바로 뒤에 있는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들리건 말건 아랑곳없이 말했다. "경찰에서 테러 조직 아지트 하나를 부수는 중이다. 이 쓰레기더미 같은 냄새 나는 마을은 테러리스트들의 소굴이지. 중앙 정부가 하는 일에 모조리 더러운 폭력으로밖에 반대할 수 없는 쓰레기는 이런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나는 법이야." 키노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잡혀 있는 예쁜 여자분은?" "저 여자? 저 여자는 저래 보여도 테러리스트와 한패다." "흐응. 무슨 짓을 저질러서 붙잡힌 거죠?" 에르메스가 키노 대신 물었다.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지…." 경관은 벌레를 씹은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그 질문에 대답했다. "저 여자는 이 폐쇄된 건물에 '학교'를 만들어서 네 또래의 아이들에게 은폐가 가능한 고성능 폭탄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흐응. 그래서?" "그래서…, 어제 그 아이들이 소풍이라고 속이고 나라의 중심부에 있는 관청가에 왔지. 그리고…, 사람들이 밀집되어 있는 빌딩과 시장에서 가방을 든 채 자폭했다. 열두 명 모두. 한마디로 자폭 테러지." "왜요? 그 아이들은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글쎄. 그 아이들은 이 마을에서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자랐으니까 머리가 정상이 아니었겠지. 테러로 죽는 게 '신념'인 미치광이들이니까. 이번 일도 그렇게 하라고 부모나 친척이나 형제들이 꼬드긴 게 분명해! 그 결과 1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지. 지금도 200명 이상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어. 빌어먹을 테러리스트들! ㅡ간신히 이 건물을 찾아내서 저 여자를 체포한 거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키노가 담담하게 말했다. "저 여자는 이제 곧 처형될 거다. 테러리스트를 교도소에 집어넣으면 또다시 석방을 요구하는 테러가 일어나니까 체포 즉시 사살하라는 엄명을 받았거든." 건물은 완전히 무너져 돌무더기로 변했다. 경찰 부대가 뒤에 서 있는 검은 트럭에 타라고 선생님을 재촉했다. 선생님이 마을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 그곳에 있던 키노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젊은 경관은 동료에게 끌려 눈앞을 지나가는 테러리스트를 바라보며 키노에게 물었다. "너 저 여자와 아는 사이냐?" 키노는 단호하게, 선생님에게도 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선생님은 만족스러운 듯이, 그리고 조용히 미소 지으며 경관에게 끌려 검은 트럭 앞으로 걸어갔다. 선생님은 경관들과 함께 창문이 없는 검은 트럭 화물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모두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경관들은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도록 패스에이더를 겨눴다. 잠시 후 경관이 검은 트럭 밖으로 나왔다. 마을 사람들이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트럭 운전석에서 검은 복면을 쓴 경관 한 사람이 나타났다. 손에는 대구경 라이플을 들고 있었다. 그는 트럭 뒤로 돌아가서 라이플에 커다란 탄환 한 발을 장전했다. 문이 열려 있는 화물칸 안을 겨눴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무거운 발포음이 건물에 부딪혀 메아리친 후 하늘로 빨려 들어갔다. "철수!" 명령과 동시에 경관들은 각각 차와 트럭에 올라탔다. 불도저를 실은 대형 트럭을 선두로 자동차 행렬은 마을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검은 트럭이 달리기 시작했을 때 화물칸에서 시체 하나가 떨어졌다. 도려낸 것처럼 얼굴이 사라지고 금발이 피로 물든 시체가 허공을 날아 길에 떨어졌다. 어딘가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자동차 행렬이 사라진 후 마을 사람들이 길에 떨어진 시체 주위를 둘러쌌다. 마을 사람들은 시체를 부드럽게 눕히고 가슴 위에 손을 모아주었다. 그리고 사라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일제히 박수갈채가 일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녀를 영웅으로 칭송하는 환성을 질렀다. 환성이 울려 퍼지는 마을에 모토라도와 운전사의 모습은 없었다. 제6화 길 이야기 ㅡPassageㅡ 여름 숲이었다. 나무와 풀들이 무성하게 우거진 구릉지가 몇 겹이나 이어지며 대지에 펼쳐져 세계를 초록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하늘에는 새하얀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고 태양이 세계를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 숲 속의 좁은 길을 한 대의 모토라도(주: 이륜차. 하늘을 날지 않는 것을 가리킴)가 달리고 있었다. 숲 속의 길은 좁고 울퉁불퉁했다. 폭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까 없을까 정도. 지면은 질척하고 울퉁불퉁. 나뭇가지가 하늘을 뒤덮어 아침인데도 어두컴컴했다. 모토라도는 앞바퀴가 도랑에 빠지고 뒷바퀴가 진흙 속에서 헛바퀴를 돌면서 덜컹덜컹 앞으로 나아갔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모토라도의 뒷바퀴 양옆에는 검은 상자가, 그 위의 짐받이에는 가방과 침낭이 끈으로 묶여 있었다. 바퀴와 차체는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운전사는 젊은 인간이었다. 나이는 10대 중반. 커다란 눈에 단정한 얼굴. 머리에는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귀를 덮는 속대를 위로 올려서 고글 밴드로 고정하고 있었다. 고글은 눈이 아닌 모자 위에 쓰고 있었다. 튀어 오른 진흙으로 더러워진 하얀 셔츠 위에 검은 조끼를 입고 허리에는 굵은 벨트를 매고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에는 핸드 패스에이더(주: 패스에이더는 총기. 이 경우에는 권총)가 홀스터에 꽂혀 있었다. "지독한 길이군…. 정말 지독한 길이야…." 운전사가 신음하듯 말했다. "난 속았어…. '부자연스러울 만큼 훌륭한 길이 있으니까 놀라지 마' 좋아하네…." 뒷바퀴가 또다시 진흙 속에서 미끄러졌다. 운전사는 허둥지둥 핸들을 꺾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모토라도 탱크에 떨어졌다. "힘내, 키노. 조금만 더 가면 숲이 끝날 거야." 모토라도가 남의 일처럼 말했다. 길 앞쪽이, 지금 달리고 있는 숲의 터널 앞쪽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키노라고 불린 운전사는, "하지만 에르메스, 저기부터 길이 나아질 거라는 보장 따윈ㅡ, 영차…, 없어." 엉덩이를 살짝 들고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으며 대답했다. "햇볕이 닿아서 지면이 건조하기만 하면 조금은 나아. 잠시 쉴래?" 에르메스라고 불린 모토라도가 말했다. "그래…. 모처럼 아름다운 숲에 왔으니까 이 멋진 대자연을 느긋하게 감상해볼까…." 키노가 웃으며 대답했다. "굉장히 열 받았구나, 키노." "뭐야…, 이건…?" 길 한가운데에서 키노가 중얼거렸다. "굉장하다ㅡ. 음, 정말 굉장해." 바로 옆에 사이드 스탠드로 서 있는 에르메스도 감탄하며 말했다. 그곳은 넓은 길이었다. 나무를 베고 뿌리를 파내고 대지를 평평하게 다져놓은, 대형 트럭 두 대가 여유 있게 달릴 수 있을 만큼 넓고 훌륭한 길이었다. 키노와 에르메스는 숲 속의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빠져나와 그 길에 도착했다. 길 위에 달라붙어 있는 진흙은 에르메스가 달려온 흔적이었다. "왜 이런 나라 안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길이…? 에르메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니까 걱정 마. 그건 그렇고 놀라운걸. 정말 놀라워. 이 길은 도로라고 해도 좋을 정도야." 키노는 몸을 빙글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숲 속의 길은 구릉을 따라 완만하게 꺾이고 오르막과 내리막을 되풀이하며 시야 가득 뻗어 있었다. 키노는 넓은 길을 가로지르며 도로를 관찰했다. 쪼그려 앉아서 장갑을 벗고 뜨거운 지면을 만져보았다. "무거운 롤러 같은 걸로 땅을 평평하게 다진 것 같아. 정말 달리기 편하겠군…." "그거 알아, 키노? 흙에 뭔가를 섞어서 단단하게 다진 거야. 게다가 길 중앙이 다른 곳보다 조금 높아." "응? 어째서?" 키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비가 내릴 때 물이 좌우로 흘러가게 하려고. 길 양옆을 봐. 길을 따라 도랑이 파여 있지? 나무로 옆을 단단히 막은 도랑이. 그 도랑을 통해 숲으로 빗물을 흘려 보내는 거야. 빗물에 의한 지면의 풍화를 막기 위해서지. 아마 길 아래에 여기저기 터널이 뚫려 있을걸. 언덕 위에서 흘러온 물은 그곳을 통해 밖으로 흘러가게 돼 있을 거야." 에르메스의 설명을 들은 키노는 또다시 감탄하듯 신음했다. "하지만 키노, 여긴 나라 안이 아니야. 이런 시간과 수고를 들여서 이렇게 훌륭한 도로를 만든 이유를 전혀 모르겠어." 에르메스가 의아한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난 덕분에 살았어!" 키노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키노는 그 길을 따라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길 곳곳에는 간판이 서 있었다. 그 간판에는 이 앞의 나라까지 엔진이 달린 탈것을 서둘러 몰 경우, 느긋하게 몰 경우, 말을 타고 달릴 경우, 마차를 타고 갈 경우, 자전거를 타고 갈 경우, 그리고 걸어서 갈 경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지 표시되어 있었다. 길은 구릉지를 따라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되풀이하며 끝없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도랑 등의 설비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정비되어 있었고 한쪽 면이 절벽인 곳에는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통나무로 궤도 이탈 방지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길 양옆의 비탈에는 홍수가 날 경우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통나무로 말뚝과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었고 더욱 완벽한 방지를 위해 풀과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그 풀과 나무들이 자란 모습에서 도로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강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멋진 다리가 있었다. 길을 만들기 위해 벌채한 통나무를 아낌없이 사용해서 만든, 튼튼해 보이는 다리였다. 또 옆에는 다리가 파손될 경우에 대비하여 예비 통나무가 쌓여 있었고 다리를 고치는 방법이 적힌 간판이 서 있었다. 물을 뜨러 강으로 내려갈 때를 위한 계단이 있는 보도와 야영을 위한 평평한 광장까지 갖춰져 있었다. "완벽해! 정말 멋진 길이야!" 키노는 몹시 감탄하며 에르메스를 타고 아무도 없는 길을 빠른 속도로 쾌적하게 달렸다. 차체에 달라붙어 있던 진흙이 차츰 말라서 때때로 가루를 흩뿌리며 뒤로 떨어졌다. 숲 속의 진흙길을 달릴 때보다 다섯 배는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정오를 조금 지났을 무렵. "굉장해. 벌써 도착했군. 게다가 간판에 적혀 있던 대로야." 길은 곧장 성문으로 뻗어 있었다. 그곳은 구릉지의 분지에 자리 잡은 아담한 나라였다. 키노는 3일군의 입국허가를 요청했다. 곧 입국이 허가되었다. 입국수속을 밟으며 키노는 파수병에게 길이 훌륭하다고 말했다. "그 길은 이 나라 사람들이 만든 건가요?" "아뇨." 파수병은 즉각 부정했다. "그건 제가 설명하는 것보다 그들에게 직접 묻는 게 빠를 것 같군요." "그들? 누군가 그 길을 만든 집단이 있단 말인가요?" "네. 여행자님은 운이 좋군요. 그들은 오늘까지 이 나라에 머물 겁니다. 곧장 중앙 공원으로 가보세요. 축제가 한창일 겁니다." 입국을 마친 키노와 에르메스는 나라의 큰길을 달려서 파수병의 말대로 중앙공원으로 향했다. 큰길이라고는 해도 양옆에 밭이 늘어서 있는데다 폭이 좁고 표면도 울퉁불퉁했다. 곳곳에 물웅덩이와 깊은 바퀴자국이 남아 있었다. "확실히 그 길을 만든 건 이 나라 사람들이 아닌 것 같군." 에르메스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통나무집이 늘어서 있는 주택가를 지나자 중앙공원이 나타났다. 숲과 잔디밭이 있는 넓고 평평한 공원이었다.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천 명은 넘을 듯한 사람들이었다. 노점이 여기저기 있고 음악이 연주되는 등 무척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공원에는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식사와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그곳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는 이 나라 사람들인 듯한, 모두 똑같은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사람들. 그들은 전체의 7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 하나는 그들과 다른 풍습을 지니고 있는 듯한, 소매 없는 셔츠를 입고 양팔을 드러낸 사람들. 그들은 남녀노소 모두 햇볕에 그을린 갈색 피부에 굵은 양팔의 근육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단단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흐음, 저 사람들이 '그들'인가." 에르메스가 말했다. 키노도 동의를 표했다. 축제는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환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와서 끊임없이 권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배고프다." 눈앞으로 오가는 고기를 보며 키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보다 가서 얘기나 들어!" 에르메스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키노는 에르메스를 밀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먼저 체크무늬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좀 전에 입국한 사람입니다. 이 축제와 '그들'에 대해 가르쳐주시겠습니까?" 키노의 물음에 중년 여성은, "어머나! 또 손님이 오셨군요!" 그렇게 깜짝 놀란 후, "그럼 소개해줄게요! 따라와요!" 키노와 에르메스의 손을 이끌고 그들이 모여 앉아 있는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을 소개해주었다. 그중에는 여자와 아이들도 섞여 있었다. 역시 갈색 피부에 건장한 체격을 지닌 장년 남자가 말했다. "오오! 반갑군요! ㅡ여행자님, 아직 점심식사 전이면 함께 드시지 않겠습니까?" 키노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소개를 한 후 에르메스를 센터 스탠드로 세우고 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날라 온 식사를, 구체적으로는 통돼지 구이와 사슴고기 스테이크와 삶은 옥수수와 콩 수프 등을, "자, 사양 말고 많이 드세요." 사람들의 말대로 전혀 사양하지 않고 많이많이 먹었다. 키노는 음식을 먹으며 그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에르메스를 타고 동쪽에서 왔다는 것과 숲 속의 험한 길을 빠져나오자 훌륭한 길이 나타나서 예정보다 훨씬 빨리 이 나라에 도착했다는 것 등을 이야기했다. "정말 굉장한 길이었어! 감동했어요!" 에르메스가 그렇게 말하자 그들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 말했다. "훌륭하죠? 멋진 길이에요. 덕분에 우리나라에도 더 많은 여행자와 상인들이 찾아올 거예요. 교류와 교역이 활발해지면 이 나라도 좀 더 발전할 수 있을지 몰라요. 나라가 풍족해지고 인구가 늘고…. 자꾸 꿈에 부풀게 되네요! 이것도 전부 여러분 덕분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모두 입을 모아 그들을 칭찬했다. 키노는 입을 닦고 차를 마시며 그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이동하면서 길을 만들고 있나요?" "네." 리더라는 장년의 남자가 대답했다. "우리는 길을 만들며 대상(隊商)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지금은 297명의 동료들과 함께."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공원 밖에 그들이 사용하는 마차와 대형 텐트가 있었다. 마차에는 나무 크레인이 실려 있었다. 저것만 있으면 상당한 수준의 토목공사가 가능할 것이다. 멋진 포장마차 외에도 무거운 돌로 만든 롤러,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한 로프 다발, 수많은 삽과 도끼, 식량으로 삼기 위해 데리고 다니는 가축들도 보였다. "이렇게 규모가 큰 이동 집단은 보기 드문데." 에르메스가 감탄하며 말했다. "저도 처음 봤습니다." 키노의 말에 남자가 설명을 계속했다. "우리는 어떤 차나 마차도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는 길을 최대한 개량하고 있습니다. 만들고 나서 이동하고 또 그곳에 길을 만들죠. 인생의 대부분이 이동 생활입니다. 식사는 대부분 사냥을 하거나 나무열매를 따 먹고 가축에게서 우유를 얻거나 때로는 고기를 먹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그런 식으로 제가 달려온 그 길을 만들며 이 나라에 도착한 거로군요." "네. 10일쯤 전입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무척 친절합니다. 이 공원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도록 허가해주셔서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축제까지." 남자가 고마움을 표시하자 사람들은 오히려 미안해하며 말했다. "별말씀을! 그 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그럼 여러분은 이 나라 사람들에게 부탁을 받거나 보수를 받기 위해 길을 만든 게 아니란 말인가요?" 키노의 물음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게는 그게 삶이 보람이니까요. 오히려 '마음대로' 만들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군요. 가끔 군사적으로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나라에서는 싫어할 때도 있습니다. '적이 공격해오기 쉬워졌다'는 이유로. 그럴 때에는 방어에 적합한 장소를 가르쳐주거나 벽을 쌓아서 허가를 받기도 합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일을 계속하고 계신 건가요?" "계속." 남자가 즉각 대답했다. 키노는 남자에게 되물었다. "계속?" "제가 태어날 때부터 계속." "……. 그럼 여러분에게는 나라가 없나요?" "네. 우리에게는 나라가 없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5대 전에 시작됐다더군요. 지금은 없는 나라의 사람들이 몇 개의 그룹으로 갈려 시작한 일입니다. 일제히 나라를 버리고 길을 만드는 여행을 떠났죠. 그 후로 우리는 아이를 낳고 키우며, 때로는 다른 나라나 황야에서 동료들을 받아들이며 줄곧 이 여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외의 그룹도 분명 어디선가 열심히 길을 만들고 있겠죠." "대체…, 어째서? 왜 그런 일을 하는 거죠?" 키노의 물음에 남자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이 세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다음 날. 키노는 날이 밝자마자 잠에서 깨어났다. 가볍게 운동을 하고 나서 키노가 <캐논>이라고 부르는 리볼버를 뽑는 연습을 한 후 분해해서 청소를 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싸구려 호텔의 커튼을 열자 희미한 빛 속에서 거리 저편의 중앙공원이 보였다. "……." 키노는 가방 안에서 저격용 스코프를 꺼내 중앙공원을 살펴보았다. 십자선이 그려져 있는 둥근 스코프 속에 텐트 철수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때?" 방 한구석에 서 있던 에르메스가 느닷없이 물었다. "어제 들었던 대로 오늘 아침 이 나라를 떠날 생각인 모양이야. 능숙하게 철수 작업을 하고 있어." 키노가 중앙공원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키노?" "어제 내가 그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었지?" "응." "그리고 그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어." "그랬지." "난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아무 보상 없이 몇백 년이나 그런 일을 계속하다니." "흠. 그래서 뭘 어쩌려고?" "그 사람들은 서쪽으로 길을 만들며 이동할 테니까ㅡ." "그렇군. 그럼 키노는 모레 출국해도 금방 따라잡겠네." "그때 다시 한 번 물어보려고. 나라 안에서는 대답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지도 몰라." "잘 되면 좋겠네." "시도해봐서 나쁠 건 없지. ㅡ그건 그렇고 에르메스." '응?" "이제 보니 아침에 잘 일어나는 것 같은데 앞으로도 계속 잘 해봐. 내가 지칠 때까지 두들겨야 겨우 일어나지 말고." "그거 알아, 키노?" "뭘?" "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야." "됐어. 의미도 없는 소리 하지 마." 키노와 에르메스는 그 나라에 이틀 동안 머물렀다. 팔 수 있는 물건을 팔고 사야 할 물건을 사고 에르메스에 연료를 보급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훌륭하죠? 저건 길을 만드는 기술도 기술이지만 세상 사람들을 위해 아무 보상 없이 일하는 게 더 대단해요!" "일에서 삶의 보람을 발견하다니 정말 멋져." "다들 눈이 빛나더군요. 듬직하고 기분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입을 모아 길을 만드는 사람들을 칭송했다. 입국한 지 3일째 되는 저녁, 키노와 에르메스는 서쪽 성문으로 출국했다. 그곳에는 갓 만든 멋진 길이 숲의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라를 떠날 때 키노는 이런 부탁을 받았다. "그들을 만나면 정말 고맙다고 전해주게나." 커다란 자루를 건네주는 사람도 있었다. "혹시 이걸 가져다줄 수 없나. 오늘 구운 빵이야. 내일이라도 그들에게 전해줬으면 좋겠군. 그때까지는 키노 군이 먹어도 돼." "알겠습니다." 키노는 사람들의 부탁을 수락했다. 침낭 양옆과 위에 억지로 자루를 묶고 아직 아무도 달리지 않은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달리지 않아 키노는 성벽이 보이는 위치에서 에르메스를 멈췄다. "금방 따라잡으면 여러모로 아까우니까 그만 쉬자." 키노는 숲 속으로 들어가서 적당한 자리를 찾아 텐트를 쳤다. 저녁식사는 빵이었다. 다음날. 키노는 날이 밝자마자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에르메스를 두들겨 깨워서 해가 뜨기 전에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따라잡은 것은 언덕을 겨우 하나 넘었을 때였다. "굉장하군…." "동감." 그곳에는 도로 공사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갓 만든 길 위에는 텐트가 늘어서 있었고 그곳에서 여자와 아이들이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근처에는 가축들을 둘러싼 울타리. 옆에는 이동용 마차가 서 있었다. 앞쪽에는 크레인을 실은 공사용 마차가 있었다. 옆에는 목재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그 앞쪽부터 길이 사라진 상태였다. 쓰러진 나무들과 아직 남아 있는 나무뿌리들, 그리고 반쯤 마른 흙. 그 너머에는 숲이 펼쳐져 있었다. 남자들은 이미 일을 하고 있었다. 건장한 몸에서 땀을 흘리며 나무를 옮기기도 하고, 뿌리를 파내기도 하구, 롤러를 끌며 흙을 다지기도 하고, 도랑을 파기도 하고, 설계도인 듯한 판자를 들고서 어떻게 길을 만들지 의논하고 있기도 했다. "바로 여기가 길이 태어나는 곳이군." 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에르메스를 멈추고 엔진을 껐다. 키노를 발견한 아이들이 즐거운 듯이 달려왔다. 키노는 조금 가벼워진 자루를 짊어지고 여자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쫓아왔습니다. 전에 들렀던 나라에서 빵을 가져다주라고 하더군요." 사람들은 키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함께 아침을 먹자고 권했다. 키노는 즉각 대답했다. 그런 키노를 바라보며, "빈대." 에르메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숲 위에 떠 있는 태양의 빛을 받으며 어제 키노와 이야기를 나눴던 남자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ㅡ." 키노는 에르메스를 밀며 그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남자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느닷없이 말했다. "'길을 만드는 진짜 이유'를 묻고 싶은 거겠지?" 키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혹시 나라 안에서는 말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훌륭하군! 키노 군은 역시 훌륭해. 배짱도 있고 지성도 있고 실로 훌륭해. 역시 여행자는 달라. 나라 안의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르군. 마음에 들어!"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머그컵을 든 손의 검지로 키노를 가리켰다. 그리고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켠 후 말했다. "그 지적 호기심에 응해주고 싶군." "오. 그럼 가르쳐줄 건가요?" 센터 스탠드로 서 있는 에르메스가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남자는 물론이라고 대답하며 옆에 있는 그루터기에 앉으라고 권했다. 키노는 고맙다고 말하며 그곳에 앉았다. "가르쳐주겠지만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면 안 돼. 뭐 말해봤자 이득을 얻거나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남자가 말했다. "진짜 목적ㅡ. 우리가, 우리 동료들이 길을 만드는 이유. 그건 물론 우리의 삶의 보람이기는 하지만ㅡ. 이유는 말이지ㅡ." "흠, 흠." "이유는?" 에르메스와 키노의 맞장구에 남자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 세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라네." 망치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남자들이 길을 만들기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여자와 아이들이 섞여 있는 곳도 있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키노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굉장하지?" 그리고 이해가 되나? 라고 물었다. "모든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전 이해가 안 가는군요." 키노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럼 설명해주지. 우리 선조들이 생각해낸 장대한 계획을." 남자가 거창하게 말했다. "짝짝짝." 에르메스가 말로 박수를 쳤다. "먼저 우리나라 이야기부터 해야겠군. 나는 본 적도 없는, 이제는 사라진 우리의 고국. ㅡ우리나라는 굉장히 가난했다더군. 겨울마다 사람들이 죽고 아이를 낳으면 80퍼센트는 살아남을 수 없는 나라였지. 그런 환경에서는 꿈도 희망도 사라지기 마련이라네. 선조들은 세상을 원망하고 세계를 저주했지. 그들의 인생은 너무나도 비참했으니까." "그래서 세상을 미워하게 된 건가요?" 키노가 물었다. "그래. 이런 빌어먹을 세상은 이제 필요 없다고 온 세상과 모든 사람들을 미워하게 됐지. 몸과 마음을 다쳐 이 세상에 복수하기로 결심했다네. 세계를 멸망시키고 말겠다고." "그래서, 그래서?" "선조들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멸망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하기 시작했지.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무력으로 학살하는 거였지. 하지만 그게 무리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어. 그러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하니까. ㅡ필요한 것은 힘. 자신들에게 힘이 없으면 남의 힘을 이용하면 그만이지." "흠, 흠." "그래서?" "선조들은 곧 좋은 생각을 떠올렸지. 천재적이고 악마적인 계획을. 그 힘을 멸망시킬 상대로부터 빌린다는 무서운 계획을 떠올린 거야. 그리고 길을 만들기 시작했지." "우웅?" "아직 이해가 안 되는데요." "이제부터가 본론이라네. 선조들은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이 세계를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버리면 된다'고 생각했지." "그건 이해하기 쉽군." "그렇군요."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란 어떤 곳일까?" 남자가 퀴즈를 냈다. "황무지?" 에르메스가 대답했다. 키노의 대답도 거의 비슷했다. "글쎄요ㅡ.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곳 아닐까요. 저도 몇 번인가 그런 곳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이곳에는 나무와 풀과 물이 있지. 나무와 풀은 동물을 키우고 물은 풀을 키우는 법이야. 즉 이곳은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지. 그러니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널려 있는 이 세계를 부숴버리면 그만이야. 아니, 부서지게 만들면 그만이야. 인간의 힘으로. 많은 인간의 힘으로." "아ㅡ, 대충 이해가 가요." 에르메스가 말했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작은 섬에 열 명이 살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섬에는 열 명이 먹고 마실 수 있는 식량과 물이 있어. 그런데 사람이 열다섯 명으로 늘어나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가 굶주리겠죠." 키노가 대답했다. "바로 그거야. 이 세계도 마찬가지라네. 이 땅에 사는 인간의 수가 허용범위를 넘어서면 멸망이 시작되기 마련이지. 이 세계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 키노가 대답했다. "풍족하게 만들면 되겠죠." "맞았어. 인간을, 인간이 모여 있는 나라를 풍족하게 만들면 된다네. 인간은 인구를 증가시키고 소비하는 식량도 늘어나게 되어 있지. 당연히 밭도 넓어질 테니까 쉽게 멸망하지는 않겠지만 이윽고 언젠가는 반드시 한계가 오기 마련이야. 밭을 만들 땅과 물도 부족해지겠지." "그래서 길을 만드는 건가요…." "그래. 길을 만들어 나라와 나라를 연결시키면 어떻게 될까? 그 나라 사람들은 무척 기뻐했지? 교류가 활발해지고 나라가 풍족해질 거라고. 인구가 늘고 나라가 넓어지고 점점 번영할 거라고." "그런 나라를 점점 늘리는 게 목적이군요." "그래. 이 세계에 있는 나라를 전부 연결해버리는 게 우리의 목적이라네. 잘 닦아놓은 길은 사람들이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고 부족한 물건을 풍족한 곳에서 운반할 수 있게 해주지. 인류는 번영을 계속하고 수많은 나라가 자연을 삼켜버릴 터. 인간은 한없이 증식해서 결국 세계를 삼켜버리겠지. 도중에 현명한 사람이 그 사실을 눈치 채봤자 소용없어. 인간은 편리한 걸 좋아하는 생물, 한번 손에 넣은 편리함은 절대 버리지 못하는 법이니까. 손에 넣지 못한 이는 손에 넣은 이를 선망하고 손에 넣으려고 애쓰기 마련이지. 소수의 현명한 이가 모든 인간들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해. 하물며 굴복시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지. ㅡ이렇게 세상은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불가항력의 변화를 겪게 될 거야." "인간이 '편한 걸 좋아하는 동물'이라는 건 내가 보장하죠. 모토라도인 내가 하는 말이니까 틀림없어요." 에르메스가 말했다. 키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왜 '모토라도인 내가 하는 말이니까'라는 말이 나오는 거지?" "'훈수초단'이라는 말도 있잖아, 키노." 키노는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 미안해, 에르메스. 맞는 말이 뭔지 모르겠어." "원래 맞는 말이야! 당사자보다 제3자가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야." 남자는 키노와 에르메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말했다. "세계를 멸망할 때까지 발전시키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ㅡ. 그게 길이라네. 길이야말로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최고이자 최강의 발명이지. 우리는 그것을 이용해서,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힘을 이용해서 언젠가 이 세계를 멸망시킬 거라네." "그렇군요…. 그 장대한 계획은 대충 이해했습니다." "근데 진짜 느긋한 계획이네. 얼마나 걸릴까요?" 에르메스가 물었다. 남자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군. 앞으로 몇천 년? 몇만 년? 어쨌든 그때쯤이면 나도, 키노 군도 살아 있지 않겠지." "……." 키노는 아무 말 없이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반가운 상황도 있지." "호오?" "'편해지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 낳은 과학기술의 급족한 발전. 요즘은 에르메스 군처럼 동력으로 달리는 교통수단도 드물지 않은 편이지. 우리가 들렀던 나라에는 기계로 커다란 빌딩을 짓는 기술도 있더군. 그런 '편리한' 과학 때문에 인류는 발전에 박차를 가하게 될 거다. 마차보다는 버스나 트럭이 속도도 빠르고 많은 물건을 운반할 수 있지. 커다란 빌딩은 인간이 살 곳을 늘게 해줄 거야. 그런 것들이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 추세를 한계까지 지탱해주겠지." "그건 그래요. 인간들이 모두 키노처럼 모토라도를 타고 다닌다면 분명히 연료가 부족해질걸." "그렇지? 배기가스는 공기를 오염시키고 태양을 가리지. 식물이 자라지 않게 될 수도 있어." "이산화탄소에는 온실 효과가 있어서 너무 많은 이산화탄소를 뿜어대면 행성 전체에 급격한 온난화 현상이 일어날지도 몰라. 기후가 급변하고 빙하가 녹아서 바다를 덮칠 수도 있어요. 그럼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난리가 날걸요." 에르메스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키노는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남자도 그렇게 말했다. "뭐 됐어요. 어쨌든 아저씨들의 계획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에요." "그거 훌륭하군. ㅡ그 나라에서 기뻐하는 사람들을 봤지? 태평하게 기뻐하며 우리를 환대해준 사람들의 얼굴을." "네." "그들은 아무것도 몰라. 우리가 그들의 미래를 빼앗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걸. 자신들을 멸망시키려 하고 있다는 걸. 물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죽지는 않겠지. 오히려 편하고 멋진 생활을 즐기며 발전을 누리게 될 거야. 그 기쁨과 힘이 자신들의 미래를 부술 거라는 사실도 모른 채…." 남자의 무시무시한 미소를 바라보며 에르메스가 말했다. "즐거워 보이는군요.' 그러자 남자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멋진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 즐겁다마다! 이렇게 길을 만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네! 착해 빠진 녀석들만 득실거리는 그 나라를 겨우 떠난 게 기뻐서 견딜 수 없어! 정말 멋진 인생이야!" "키노 군이 지나간다. 길을 비켜줘라!" 남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공사 현장에 울려 퍼졌다. 모두가 일손을 멈췄다. "여러분, 아침밥 잘 먹었습니다. 그럼 우린 이만." 키노는 에르메스를 타고 작업 현장을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다들 열심히 하세요ㅡ. 정말 멋진 길이었어요." 에르메스가 말했다. 모두가 웃는 얼굴로 배웅하는 가운데 키노는 공사 현장 앞쪽에 있는 좁은 숲 속의 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르메스를 멈췄다. "젠장!" 키노는 욕설을 내뱉었다. 숲 속의 어두컴컴한 길에서 에르메스의 뒷바퀴가 질퍽한 땅에 파묻혀 헛돌았다. "진정하고 힘내ㅡ." 에르메스가 남의 일처럼 말했다. "정말 지독한 길이군!" 키노는 필사적으로 에르메스를 앞뒤로 흔들며 액셀러레이터를 조정하여 겨우 진흙에서 탈출했다. 또다시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 순간. "우왓!" 이번에는 앞바퀴가 미끄러져서 넘어질 뻔했다. 키노는 필사적으로 발을 내밀어 간신히 에르메스가 쓰러지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얼마 안 되는 거리를 달린 것만으로도 땀투성이가 된 키노를 올려다보며 에르메스가 물었다. "그 사람들이 길을 만들 때까지 기다릴래?" 키노는 좁고 질퍽한 길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럴 여유 없어. ㅡ난 이래봬도 인간이야." "그렇군. 그럼 힘내." "좋았어!" 키노는 기합을 넣으며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에르메스의 목소리와 요란한 배기음이 숲 속에 울려 퍼졌다. 제7화 싸우는 사람들 이야기 ㅡReasonableㅡ 봄의 숲 속을 한 대의 모토라도(주: 이륜차. 하늘을 날지 않는 것을 가리킴)가 달리고 있었다. 평평한 대삼림 속에, 싹을 틔우기 시작한 녹음 속에 길 하나가 뻗어 있었다. 검은 흙길. 폭은 트럭 한 대가 다닐 수 있을 정도. 모토라도의 뒷바퀴 양옆에는 검은 상자가 달려 있고 그 위에는 가방과 침낭이 묶여 있었다. 은색 연료 탱크가 아침의 햇빛을 둔탁하게 반사했다. 운전사는 젊은 인간이었다. 나이는 10대 중반. 챙과 귀를 덮는 속대가 달린 모자를 쓰고 여기저기 벗겨진 은색 테 고글을 쓰고 있었다. 검은 재킷을 입고 허리에 굵은 벨트를 맨 차림이다. 허리 뒤에는 자동식 핸드 패스에이더(주: 패스에이더는 총기. 이 경우에는 권총) 한 자루가, 오른쪽 허벅지에는 대구경 리볼버 한 자루가 홀스터에 꽂혀 있었다.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에는 새하얀 구름이 떠 있었다. 상쾌한 바람에 감싸인 채 모토라도는 느긋하게 달렸다. "한적하다, 키노." 모토라도가 말했다. "그러게, 에르메스." 키노라고 불린 운전사가 대답했다. 키노는 기어를 낮춘 채 액셀러레이터를 거의 당기지 않고 달리기 쉬운 길을 느긋하게 달렸다. 잠시 후, 무엇 하나 변하지 않은 풍경 속에서,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숲 속에서." 에르메스라고 불린 모토라도가 입을 열었다. "누군가와 마주치면 깜짝 놀라겠지. 이쪽도, 저쪽도." "……." 키노는 한순간 고글아래의 눈을 가늘게 떴다. "그야말로 정전버럭." 에르메스가 말했다. 키노는 그 말을 무시하며 물었다. "몇 명이지? 거리는?" 에르메스가 대답했다. "아직 한참 더 가야 돼. 숫자는 꽤 많은 것 같은데. 열 명 정도?" "알았어. 그럼 만나면 얘기를 해봐야겠군." 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액셀러레이터를 당겼다. 좌우로 흘러가는 나무들이 속도를 높였다. 이제는 더 이상 나무들의 형태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달리자 키노의 눈에도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길 앞쪽에서 커다랗게 손을 흔들고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웬일이지." 에르메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키노는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남자들의 앞에서 에르메스를 멈췄다. 그곳에 있던 것은 열 명 정도의 남자들이었다. 길에 앉아 있는 사람도 있고 숲 속의 나무에 기대어 있는 사람도 있었다. 아래로는 20대부터 위로는 50세 정도. 체격은 모두 건장한 편. 야외 생활에 적합한 재킷과 조끼 차림으로 발치와 팔꿈치가 더러워져 있었다. 무기는 당연히 갖고 있었다. 볼트 액션식 라이플과 리볼버 등. 짐은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표정은 모두 온화했다. 패스에이더를 겨누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중 한 사람, 수염을 기른 40대 남자가 키노에게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여어, 여행자인가보군. 멈추게 해서 미안하네. 잠시 물어볼 게 있는데 괜찮겠나? 잠깐이면 되는데." 키노는 에르메스의 시동을 건 채 말했다. "뭐죠?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고맙네. 우린 여행을 하고 있다네. 제일 가까운 나라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가르쳐주지 않겠나. 숲을 지나와서 잘 모르겠군." 남자가 말했다. 키노는 지극히 태연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가 온 방향에 있는 나라가 더 가깝습니다. 어제 저녁에 출발했으니까요. 위쪽 기어 상태가 안 좋아서 천천히 달려왔습니다." "미안." 에르메스가 또다시 작게 말했다. "그리고 이 앞쪽, 즉 서쪽에 있는 나라는 아마 3일쯤 걸릴 겁니다." "훌륭한 대답이군. 그럼 우린 동쪽으로 가도록 하지. 고맙네. 덕분에 살았어." "별말씀을. 그럼 실례합니다." 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흔드는 남자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뒤를 돌아보자 앉아 있던 남자들이 일어서서 걷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키노는 단숨에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곧 느닷없이 속도를 낮췄다. 길 오른쪽 끝으로 이동하여 나무들 사이에서 에르메스를 멈추고 엔진을 껐다. "휴우…." 키노는 한숨을 쉬며 에르메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에르메스를 굵은 나무에 기대어놓았다. 재빨리 뒤쪽 짐칸 위의 짐을 풀고 둥글게 만 침낭을 풀 위에 내려놓았다. 키노는 뒤쪽 짐받이에 올려놓은 채 가방을 열었다.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옷가지 등의 짐이 아니라 무전기 한 대였다. 대형 무전기 한 대가 가방 안쪽을 점령하고 있었다. 키노는 메인 스위치를 켜고 접혀 있던 안테나를 세웠다. 고글을 목에 걸고 한쪽 귀에 헤드폰을 댔다. 무전기에서 코드로 연결되어 있는 마이크를 꺼냈다. 그리고 마이크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모자'로부터 '덮개'에게ㅡ. 들립니까?」 이틀 전. 키노는 이틀 동안 머문 나라의 싸구려 호텔에서 방문자와 만났다. 방문자는 20대부터 50대까지 섞여 있는 여덟 명의 남자들과 아직 스무 살 남짓한 여자 한 명, 그리고 그녀가 안고 있는 갓난아기였다. 방문자는 키노에게 다음 나라까지 경호를 부탁했다. 그들은 사정이 있어 나라를 버린 방랑자들로 트럭 한 대를 타고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나라에서 이주를 거절당하고 허가받은 체재 기간이 다 되어 내일 서쪽에 있는 다음 나라로 떠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광대한 숲에는 상인들을 노리는 산적이 종종 출몰한다고 한다. 하나밖에 없는 길에 잠복하고 있다가 상인들을 협박해서 짐의 절반을 강탈해 가는 산적들. 게다가 거절하면 모두 가차없이 죽인다는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몹시 당황했다. 그들도 패스에이더로 무장하고 있긴 했지만 이런 위험한 일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만에 하나라도 재산을 절반이나 빼앗기면 끝장이다. 이건 사활이 걸린 문제다. 그래서 경호해줄 사람을 찾아 온 나라를 헤맸지만 나라 안에서 치안을 유지하는 거라면 몰라도 나라 밖으로 나갈 사람은 없을 거라고 거절당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우연히 입국한 키노에게 경호를 부탁했다. 여행자라면 나름대로 실력이 있을 거라는 한줄기 희망을 걸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실례의 말씀을. 키노는 강해." 모토라도라면 트럭 앞을 달리다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거나 함정을 눈치 채면 재빨리 보고할 수 있다. 그래서 작전상 그들의 귀중품인 무전기를 보고용으로 빌려주고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 옷가지 등의 짐은 트럭에 실었다. 산적들을 만나서 격퇴했을 때의 보수는, "지금 우리에게는 이 정도가 최선입니다."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치고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제안을 들은 키노는 무척 고민했지만, "뭐, 결정하는 건 키노니까." 결국 그 의뢰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방에서 사라진 후 에르메스가 의뢰를 받아들인 이유를 물었다. "아기가 귀여워서." 키노는 그렇게 대답했다. 숲 속ㅡ. 무전기 스위치를 끈 키노는 가방 뚜껑에 붙여두었던 라이플을 꺼냈다. 그리고 앞뒤로 분해되어 있던 라이플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조립했다. 저격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자동 연사식 라이플. 키노는 그것을 <플루트>라고 부르곤 했다. "역시 그들일까?" "아마도." 키노는 어깨에 메고 있던 예비탄창을 넣어둔 자루를 꺼내 아홉 발이 들어 있는 탄창을 <플루트>에 넣고 첫 번째 탄환을 장전했다. 가방을 닫고 침낭을 묶은 후. "금방 돌아올게." "알았어." 키노는 에르메스에게 그렇게 말한 후 길 옆의 숲 속으로 뛰어갔다. 초록색 잎사귀가 무성한 나뭇가지를 헤치며 숲 속을 달리던 키노는 남자들이 있던 곳과 300미터쯤 거리를 두고 멈췄다. <플루트> 오른쪽 옆에 달린 긴 원통을 떼고 배럴 끝에 천천히 끼웠다. "자, 그럼…." 키노는 몸을 낮추고 숲에서 길로 얼굴을 내밀었다. 뒤를 돌아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플루트>로 길 앞쪽을 겨누고 스코프를 들여다보았다. 십자선이 그려져 있는 둥근 렌즈 속에서 길 건너편 숲 속에 남자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역시 산적들인가…." 남자들은 모두 배낭을 벗고 라이플을 손에 들고 있었다. 개중에는 손잡이가 달린 수류탄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곧 이곳에 도착할 트럭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키노는 <플루트>를 움직이며 남자들의 숫자를 셌다. 조금 전보다 두 사람 많은 열두 명이었다. 남자들이 나무 뒤에 숨었다. 동시에 길 앞쪽에서 트럭 지붕이 작게 보이기 시작했다. 보닛이 튀어나온 갈색 중형 트럭. 화물칸 위에는 초록색 덮개가 덮여 있었다. 범퍼 앞에는 키노의 지시대로 통나무 하나가 가로로 묶여 있었다. 트럭은 길을 가득 점령한 채 하늘을 뒤덮고 있는 나뭇가지를 차체로 밀어내며 느린 속도로 달려왔다. 트럭에서는 보이지 않겠지만 키노에게는 숨어 있는 습격자들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절 원망하지 마세요…." 키노는 작게 중얼거리며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수류탄을 든 남자의 머리에 스코프의 십자 선을 맞췄다. 키노는 총구를 살짝 움직이며 방아쇠를 당겼다. 원통 속에서 발포음이 흡수되고 탄환만이 남자를 향해서 날아갔다. 탄환은 남자의 팔에 정확하게 명중하여 피부와 살을 꿰뚫었다. "크헉!" 남자가 들고 있던 수류탄이 숲 위로 떨어졌다. 아직 핀을 뽑지 않은 상태였기에 폭발하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키노는 제일 먼저 뒤돌아본 반응이 빠른 남자의 다리를 쏘았다. 허벅지 끝부분, 뼈와 굵은 혈관이 없는 부분을 조준하여 정확하게 명중시켰다.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며 쓰러지는 동료의 모습을 보자 남자들은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키노는 미처 도망치지 못한 한 사람의 다리를 쏘았다. 남자는 탄환을 맞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길가에서 사람들이 사라졌다. 더 이상 키노가 저격할 사람은 없었다. 그 자리를 트럭이 유유히 지나갔다. "좋았어." 키노는 벌떡 일어서서 좀 전에 이곳으로 올 때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숲 속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트럭에 따라잡히기 전에 에르메스로 돌아갔다. <플루트>를 어깨에 메고 재빨리 에르메스에 올라탔다. "어서 와." "세 사람쯤 부상을 입혔어. 추적하기 어려워질 거야." 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킥 스타터를 밟아 시동을 걸었다. "왔어, 키노." 트럭이 속도를 높이며 길을 달려와서 키노의 눈앞을 지나갔다. 키노는 길 동쪽을 살펴보았다. 아직 추적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키노는 에르메스를 몰고 트럭 뒤를 쫓았다. 트럭은 곧 따라잡을 수 있었다. 트럭 화물칸에는 남자 두 사람이 긴장한 얼굴로 방어용 철판 뒤에서 라이플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은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 스탠딩칼라 셔츠와 바지. 그중 한 사람이 키노에게 외쳤다. "해, 해냈습니다! 놈들이 쫓아오지 않습니다!" "알겠으니까 어서 도망치세요." 키노는 트럭 뒤를 따라가며 큰 소리로 외쳤다. 트럭은 나뭇잎을 날리며 숲 속의 길을 달렸다. 그 나뭇잎을 맞으며 키노와 에르메스는 트럭 뒤를 따랐다. "음ㅡ, 이대로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까?" 에르메스가 물었다. 키노가 즉각 대답했다. "아니…. 나라면 뭔가ㅡ." 키노는 끝까지 말을 맺지 못했다. 트럭이 급브레이크를 걸었기 때문이다. 화물칸의 남자가 허둥지둥 화물칸 앞쪽을 움켜잡을 정도였다. 키노도 뒷바퀴를 미끄러뜨리며 멈춰 섰다. "장애물을 설치해둘 거야." 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에르메스에서 내려 재빨리 사이드 스탠드를 내렸다. 트럭 옆에서 길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예상대로 나무가 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트럭 앞쪽에 커다란 나무가 쓰러져서 길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키노가 화물칸의 남자에게 외쳤다. "신경 쓰지 말고 밀어서 부러뜨리세요." 하지만 그 명령이 운전석에 전달되기도 전에 트럭이 달리기 시작했다. 트럭은 조금 전진한 후 곧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앗ㅡ." 할 말을 잃어버린 키노의 눈앞에서 트럭은 길을 벗어나 북쪽 숲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키노는 재빨리 트럭이 사라진 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바퀴 자국을 보고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길이 있었다. 트럭이 나뭇가지를 꺾으며 숲 속으로 사라져갔다. 화물칸의 남자들이 빨리 따라오라는 듯 키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쪽으로 가면 안 돼요!" 키노는 큰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트럭은 덜컹덜컹 흔들리며 사라져갔다. "아아, 젠장! 간단한 함정인데!" 키노는 에르메스에 올라탔다. "안 되겠다. 이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골치 아프다니까. 어떻게 할래?" 에르메스가 말했다. 키노는 에르메스의 사이드 스탠드를 걷어찼다. 그리고 동시에 트럭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수풀이 무성한 길을 달리며 키노는 에르메스에게 투덜거렸다. "기가 막혀…. 아무래도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군…." 트럭과 모토라도가 사라지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통나무로 장애물을 설치해놓은 그곳에 열두 명의 남자가 걸어왔다. 부상을 당한 세 사람은 몸에 붕대를 감은 채 동료들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그 얼굴에는 복수심이 드러나 있었다. "그 여행자는 경호원으로 고용된 자인가…. 어려서 방심했는데." 키노에게 말을 걸었던 40대 남자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험악한 얼굴로 숲 속의 흙 위에 남아 있는 타이어 자국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뒤에서 다른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함정에 걸렸습니다." 수염을 기른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이제부터는 서두를 필요 없다. 그 여행자도 확실하게 죽여라ㅡ. 자, 나무를 치워라. 길에 흔적을 남기지 마라." 트럭이 멈춘 곳은 유적이었다. 숲 속의 길을 끝없이 달려서 결국 다른 길로 나가지 못하고 도착한 장소ㅡ. 그곳은 옛날 성채가 있었던 곳이었다. 숲 속의 평평한 대지에 느닷없이 펼쳐져 있는 포석. 사방 100미터쯤 되는 공간에 포석을 깔아놓은 길이 뻗어 있었고 그 양옆에 건물의 벽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예전에는 이곳에 집이 서 있었을 것이다. 넓은 길 중앙에는 커다란 건물이 남아 있었다. 한 변이 20미터쯤 되어 보이는, 성채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었다.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는 튼튼한 건물의 지붕 위는 성벽과 마찬가지로 네모난 요철이 있는 방어벽이었다. "이건…. 멋진 곳이군…." 키노가 작게 중얼거렸다. 키노의 발과 에르메스의 타이어는 물에 잠겨 있었다. 유적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깊이 10센티미터 가량의 물이었다. 물에는 아주 미미한 흐름이 있었다. 흐르는 물처럼 맑고 포석이 비칠 만큼 투명했다. 또 빛에 따라 하늘과 벽을 비추기도 했다. "정말 멋진 곳인데, 키노. 이 성채를 만든 사람은 포석을 거의 완벽하게 수평으로 깔아놓은 거야." "강물이 흘러 들어와서 이렇게 멋진 곳이 됐구나…. 쳇, 이럴 때만 아니면 이런 곳을 발견하게 돼서 너무너무 신났을 텐데." 쓸쓸하게 중얼거리는 키노의 눈앞에는 트럭이 서 있었다. 중앙의 넓은 길 끝 쪽, 중심부에 있는 건물 옆이었다. 차체와 타이어에 달라붙은 흙과 나뭇잎이 물에 떨어져 천천히 흘러갔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를 지키듯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트럭에서 차례차례 내렸다. 키노는 에르메스에서 내려서 뒤를 돌아보았다. 숲으로 곧장 뻗어 있는 길을 살펴본 후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금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왜 그 나무를 그대로 밀고 나가지 않은 겁니까? 이건 함정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여기로 몰아넣은 겁니다. 이제는 길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게…." 말문이 막힌 남자들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책망하지 마십시오." 그 뒤에서 입을 연 것은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였다.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에 혼자만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눈에 띄었다. "당신은… 의사라고 하셨죠?" 키노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경호를 의뢰하러 왔을 때 시종일관 여자와 아이 옆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의사이기 때문에 위험한 일에는 참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이들의 리더 격인 듯했다. 그가 말을 할 때 다른 사람은 발언을 삼가곤 했다. "그런 상태로 몇 번이나 트럭을 나무에 부딪히면 아기의 목숨이 위험할 것 같아서 도저히 내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의사에 말에 키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정도는 단단히 안고 있기만 하면ㅡ." "키노 씨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죠…. 이런 결과를 불러와서 미안합니다." "…무슨 말씀이죠?" "이 아이는…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합니다. 세 살까지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릅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안 됩니다." 의사의 말에 주위의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남자들은 슬며시 눈길을 내리깔았고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는 팔에 살짝 힘을 주었다. "오, 저런." 에르메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키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 그런 말은 처음에 하셨어야죠…." "미안합니다." 의사가 말했다. 키노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을 비추는 아름다운 길이 숲으로 곧장 뻗어 있었다. "나만 따돌리다니 너무해ㅡ. 나중에 전부 얘기해줘야 돼, 키노." 투덜거리는 에르메스를 트럭과 조금 떨어진 곳에 감춘 후. "알았어. 잠깐만 여기에서 기다려." <플루트>를 등에 멘 키노가 에르메스에게 말했다. "서둘러! 무기와 식량만 운반해라!" 여덟 명의 남자들이 의사의 지시에 따라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과 키노, 그리고 여자와 아이는 성채 중심부의 건물로 들어갔다. "뭐지…? 여기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건물 안은 이 폐허를 축소해놓은 것처럼 십자 형태의 복도와 그 옆의 작은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 덕분에 실내는 밝았다. 그리고 몇몇 방에는 무너진 집에서 돌을 운반하여 책상과 의자, 침대처럼 쌓아놓은 것들이 보였다. 다른 방에서 발목까지 올라오는 바닥의 물에 젖지 않도록 장작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것이 발견되었다. 돌을 얹어서 숨겨놓은, 아직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모닥불 흔적도 보였다. "……." 그것을 본 키노는 먼저 두 남자에게 옥상 위로 올라가서 길을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아직 이곳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산적들이 보이면 당장 패스에이더를 쏘아서 알리도록 명령했다. 남자들은 라이플을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설마 했지만ㅡ." 키노는 건물 중심부에 있는 방에서 나머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근처에 있던 커다란 짐을 짊어진 의사가 무슨 일이냐고 대답을 재촉했다. "여기, 누군가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의사의 물음에 키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십중팔구 그 산적들이겠죠. 이곳은 침상도 있고 물도 있고 전망도 좋습니다. 훌륭한 곳이죠." 키노의 말에 남자들은 당황하며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 "그럼 놈들은 지금 이곳에 숨어서ㅡ." "없습니다. 있다면 벌써 누군가를 쐈겠죠. 산적들은 계속 한곳에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 본거지를 만들어 이동하고 있을 겁니다. 아마 이곳은 그런 아지트 중 하나겠죠." "그럼 놈들은 우리를 그런 곳으로 몰아넣었단 말인가…." 의사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키노는 오히려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길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던 거겠죠. 사방을 감시하고 방어전을 펼치기엔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ㅡ." 남자 한 명이 기대를 담아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키노는 그 말을 가로막았다. "문제는 언제까지 이곳에서 버틸 수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식량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따져봐도 불리하죠. 저쪽은 숲에 진을 치고 장기전으로 나올지도 모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세 명을 죽이는 건데.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소용없지만." "그럼…." "어떻게든 빨리 적을 전멸시켜야죠.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질 겁니다." 키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직후ㅡ. "응?" 키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살을 찡그리며 물이 흐르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응? '전멸'…. 이상하군…." 그리고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본 남자 한 명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왜, 왜 그러나?" 키노는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군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상하네요. 어째서 그때 눈치 채지 못한 걸까요?" "뭘 말입니까?" 의사가 물었다. 키노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산적들의 행동 말입니다. 길을 막고 샛길로 몰아넣은 직후 어째서 그곳에 함정을 설치해두지 않은 걸까요? 바퀴자국 사이에 수류탄을 숨기고 트럭이 와이어에 걸리면 폭발하도록 설치해뒀으면 됐을 텐데. 트럭을 달리지 못하게 만들면 그걸로 끝일 텐데." "……." "……." 의사도, 다섯 명의 남자들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키노의 목소리만이 돌 벽에 부딪혀 실내에 울려 퍼졌다. "그건 '그렇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ㅡ." 키노는 도중에 말을 멈췄다. 그리고 줄곧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와 의사를 비롯한 여섯 명의 남자들에게 말했다. "누구ㅡ, 다친 사람 있습니까? 위의 두 사람을 포함해서." "아니…? 없는데…." 의사가 의아한 듯이 대답했다. "그럼ㅡ." 키노는 방 한구석의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피는 누구 겁니까?" 그곳에는 붉게 물든 물이 흐르고 있었다. 검붉은 액체가 맑은 물속에서 한줄기 선을 그리고 있었다. 남자들은 깜짝 놀라며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 움직임으로 인해 선은 잠시 물결의 흔들림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선은 방 밖의 복도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른 흐름에 부딪혀 지워져버렸다. "뭐, 뭐지… ?" 어리둥절해하는 남자들을 흘낏 바라보며 키노는 물결의 흐름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발밑의 물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선은 옆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벽의 돌 틈으로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키노는 여자와 아이, 경호원 두 사람을 그곳에 남겨두고 의사와 세 남자를 데리고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이동하여 옆방 앞에 도착했다. 그곳은 돌을 쌓아 입구를 막아놓은 작은 방이었다. 키노의 부탁으로 남자들이 재빨리 돌을 치우기 시작했다. 입구의 돌을 치우자 실내에도 돌이 사람의 가슴 높이까지 난잡하게 쌓여 있었다. 그 돌을 몇 개 움직였을 때 아래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 남자들과 의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역시." 오직 키노만이 짧게 중얼거렸다. 산더미처럼 쌓인 돌 밑에 있던 것은 시체였다. 몇 겹으로 쌓인 시체가 좁은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대충 열 명에서 열다섯 명 정도. 모두 성인 남자의 시체였다. 목을 잘린 시체도 있었고 탄환에 머리가 뚫린 시체도 있었다. 피부가 변색된 정도로 보아 죽은 지 반나절 정도. 모두 갈색과 초록색이 섞인 야외 활동에 적합한 옷을 입고 있었다. "뭐, 뭐지, 이 사람들은…?" 젊은 남자가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물론 진짜 산적들입니다." 키노가 대답했다. 여자와 아이가 있는 방으로 돌아온 후 키노는 옥상에서 길을 감시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아직 숲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은 없었다. 시간은 한낮을 맞이하고 있었다. <플루트>를 등에 멘 키노는 아기를 제외한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말했다. "하던 얘기를 계속하도록 하죠. 아까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은ㅡ'. 그 사람들은, 당신들을 노리고 있는 자들은 짐이 목적이 아닙니다. 아까 그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산적이 아닙니다. 이곳을 아지트 삼아 이 근방을 어지럽히던 산적들은 어젯밤 그 사람들 손에 모두 죽었습니다." 끼어드는 사람은 없었다. 키노는 말을 이었다. "그럼 대체 누굴까요?" 갑작스러운 키노의 질문에 남자들은 숨을 삼켰다. 여자가 작게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 의사는 아무 말 없이 키노의 얼굴을 응시했다. "여러분, 사실은 알고 계시죠. 자신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집단에 대해서. ㅡ당신들이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산적이 아닙니다." "……." "누구입니까?" 대답은 없었다. 키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해주지 않겠다면 그걸로 좋습니다. 하지만 산적으로부터 지켜주겠다는 약속은 필요 없게 됐으니 전 에르메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제 마음대로 행동하겠습니다." "뭐라고! 배신할 셈인가!" 남자들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키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먼저 거짓말을 한 건 그쪽입니다. 이건 계약위반입니다. 알고 있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ㅡ그 사람들과 담판을 지어서 저만 놓아달라고 하겠습니다." "이 자식이!" 키노의 눈앞에 있던 남자가 허리의 홀스터로 손을 뻗었다. 의사가 그만둬! 하고 외친 것과 키노가 그의 손을 걷어찬 것은 거의 동시였다. 키노의 부츠는 물을 튀기며 남자의 손을 걷어찼다. 튕겨나간 리볼버가 물속으로 떨어져 방구석까지 미끄러졌다. "큭…." 손을 감싸 쥐는 남자를 향해, "빨리 줍지 않으면 물이 들어가서 못 쓰게 될 겁니다." 키노는 발을 되돌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 오른손은 키노가 <캐논>이라고 부르는 허리의 리볼버에 닿아 있었다. 의사가 허둥지둥 끼어들었다. "다들 그만두게. 키노 군과 싸워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나. 게다가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키노 군은 우리보다 강해. 우리가 숫자로 밀어붙여 이긴다 해도 그 다음은 어쩔 셈인가? 우리 목적이 뭐지?" 잔뜩 흥분했던 남자들은 그 말에 어깨를 떨궜다. 키노의 발에 차였던 남자도 패스에이더를 주워서 물을 털고 홀스터에 꽂았다. "키노 씨, 키노 씨도 제발 도발하지 말아주십시오. 우리가 잘못했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의사가 애원하듯 말했다. "그럼 목적을 가르쳐주시겠습니까? 저도 이제 와서 그 사람들에게 백기를 들어봤자 순순히 용서해주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전부 얘기하지요. 다들 괜찮겠나?" 남자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의자는 여자가 안고 있는 아기를 바라보았다. "저 아이는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최후의 생존자입니다. 나는 왕가의 주치의였고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은 시녀와 시종들이었습니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키노는 의사에게로 시선을 되돌리며 물었다. "계속하시죠." "반년 전, 왕가는 혁명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왕가의 일족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지요….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이 아이입니다." "그럼 이 아이는 그 사람들이 잔당을 없애기 위해 목숨을 노리고 있는ㅡ, 아, 그게 아니지. 제가 반대로 말했군요." "그렇습니다…. 놈들은 열광적인 지지자인 전 근위병들입니다. 나라는 아직 정치적으로 혼란에 빠진 상태입니다. 혁명 직후에는 국민들도 열광했지만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된 지금 왕가의 부흥을 바라는 국민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놈들은 왕가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 아이를 데려가서 군주제를 부활시키려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산 채로 '포획'하고 싶어했던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막기 위해 나라에서 도망쳤습니다. 이제 왕실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저는 이 아이가 앞으로 자유롭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 사람들은 이 아이의 병에 대해 알고 있나요?" "당연히 모릅니다. 알고 있는 건 여기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알고 있다 해도 관계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쫓겨 다닌 겁니까? 나라를 떠난 후부터 줄곧?" "아뇨. 처음에는 무사히 도망쳤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마 나라에 보낸 심부름꾼이 붙잡힌 것 같습니다. 키노 씨와 만났던 그 나라에서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서 이렇게 행동한 겁니다." 키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휴우.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들고 말았군요." "키노 씨, 싸운 적이 없는 우리들만으로는 병사들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키노 씨도 이대로는 무사히 길로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에르메스는 너무 눈에 띕니다." "그렇긴 하죠." "비겁한 부탁이라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부탁드립니다. 우리 편에 서주십시오. 만약 이 아이가 다음 나라에 무사히 도착하면 보수로 트럭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중에 제일 값나가는 물건입니다. 팔면 상당한 돈이 될 겁니다." 그 말에 남자들이 선생님! 이라고 언성을 높였지만 의사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이렇게 된 이상 목숨이 더 소중하지 않은가. 다음 나라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아이만큼은 이주를 결정해야 하네. 앞으로 3년이면 돼. 시간이 지나면 우리 일은 끝나네. 전부 끝이야." 키노는 울먹이며 어깨를 떨구는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보수는 어쨌든 간에 죽지 않기 위해서는 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그리고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하는 의사를 제지하며 말했다. "좀 더 많은 무기가 필요합니다. 서둘러 찾아주세요." "유적에 무기가 있을까?" 남자들이 물었다. "죽은 도적들의 무기가 있을 겁니다. 시체에는 없었습니다. 무거우니까 들고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마 방 어딘가에 숨겨놓았을 겁니다." "그렇게 된 거야." "저런. 굉장히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들었네." 폐허의 벽에 둘러싸인 곳에서 키노와 에르메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그로부터 남자들은 무기를 찾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옥상의 두 사람은 다른 사람과 교대했지만 아직 적을 발견했다는 보고나 발포는 없었다. 키노는 <플루트>를 등에 멘 채 에르메스의 뒷바퀴 옆에 달려 있는 상자에서 예비 탄약과 액체 화약이 들어 있는 나무상자를 꺼냈다. "이대로 달려서 도망치지 그래? 가방 안의 무전기를 팔면 옷값 정도는 나올 텐데." 에르메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키노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다른 길'이 있었더라면 그랬을지도 몰라." "오, 그거 좀 재미있군. 그래서?" "다른 길을 찾으면 그렇게 할 거야." 키노는 그렇게 대답하며 나무상자를 옆구리에 꼈다. "미리 말해둘게. ㅡ안녕, 키노." "응. ㅡ안녕." "이 말, 몇 번째더라?" "글쎄. ㅡ그럼 나중에 보자." 키노는 웃으며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그리고 하늘을 비추는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며 달리기 시작했다. 물소리와 함께 폐허에서 폐허로 달려서 성채의 건물 안으로 돌아갔다. "아마 이게 전부일 겁니다." 건물 한 방에 모여 있는 것은 구식 무기뿐이었다. 화약과 탄환을 총구에 넣는 낡은 라이플과 같은 타입의 핸드 패스에이더 몇 자루. 리볼버 라이플이라고 불리는 회전식 탄창 라이플 세 자루. 그 총들에 사용하는 액체 화약이 술병으로 열 병 정도. 별로 날카로워 보이지 않는 검이 크고 작은 것을 합쳐서 열네 자루. 그리고 커다란 나무 수레차에 실려 있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대포 한 대. "패스에이더는 전부 구식이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액체 화약은 꽤 많지만 이걸 사용할 바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볼트 액션식을 사용하는 게 나을 겁니다. 칼은 접근전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남자 한 명이 보고했다. "그리고 대포는 굉장한 구형입니다. 단순이 철로 만든 원통이라 일단 안을 씻으면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화약은 어떻게 구한다 해도 탄환이 없습니다." 다른 남자가 단도를 넣어서 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거의 날아가지 않을 겁니다. 돌을 부숴서 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타입은 한 발만 쏘면 끝입니다. 수레차를 고정시키지 않으면 발포의 반동에 의해서 뒤로 날아가기 때문에 방향도 쉽게 바꿀 수 없습니다. 애초에 이곳에서는 고정시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남자가 수레차를 밀며 말했다. 나무바퀴가 달린 수레차는 유달리 가볍게 움직였다. 대포 꽁무니 쪽에 있는 나무 고정 장치는 남자가 몇 번이나 포석에 고정시키려고 애써도 미끄러지기만 할 뿐 뜻대로 되지 않았다. 키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군요"라고 중얼거렸다. 그런 키노의 옆에서, "이젠 끝장이야…. 모두 죽을 거야…." 일행 중 제일 젊은 20대 초반의 남자가 말했다. 옆에 있던 동료가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직 모르는 거잖나. 안 그래?" "하지만 우린 평범한 사람이야! 그 자들처럼 엄격한 훈련을 받은 병사가 아니라…. 남을 죽여본 적도 없는 사람이 산적들을 학살한 자들을 이길 수 있을까? 말해봐! 싸울 수 있냐고!" "아니…, 그건ㅡ." 젊은 남자는 동료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느닷없이 등에 메고 있던 라이플을 물속에 팽개치고 큰 소리로 외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이젠 지긋지긋해!" 동료가 그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 손은 허공을 움켜쥘 뿐이었다. 젊은 남자는 큰 소리로 외치며 남쪽 큰길로 뛰어나갔다. "항복! 난 항복하겠어!" 남자는 큰 소리로 그렇게 외치고 격렬한 물결을 일으키며 전속력으로 달렸다. "무슨 일이지?" 옥상 위에서 주위를 감시하던 사람이 물었지만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젊은 남자는 절규하며 질주를 계속했다. "항복! 날 살려줘! 항복한다! 항복!" 그리고. 숲까지 10미터 정도 남았을 무렵. 탕. 날카로운 발포음과 동시에 쓰러졌다. 젊은 남자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앞으로 쓰러져서ㅡ.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옥상 위에서 주위를 감시하던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려 퍼졌다. "상대방이 보이지 않으면 쏘지 마세요! 탄환 낭비입니다!" 키노가 즉각 고개를 들며 외쳤다. "…알았다. 미안…" 힘없는 목소리만이 되돌아왔다. 한순간 건물 안이 정적에 감싸였다. 다음 순간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여자가 아이를 달랬지만 불이 붙은 것처럼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건물 안. "……." 키노는 오른쪽 허리에서 <캐논>을 뽑았다. 조금 전. "항복! 날 살려줘! 항복한다! 항복!" 그렇게 외치며 감시하고 있는 건물에서 뛰어나온 남자를 바라보며, "쏴라." 수염을 기른 남자는 숲 속에서 짧게 명령했다. 굵은 나뭇가지에 앉아서 스코프가 달린 라이플을 겨누고 있던 남자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 후 건물 옥상에서 총성이 울렸지만 탄환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지금이라면 어떻게든 조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쏠까요?" 저격수가 물었다. "아니, 됐다." 망원경을 통해 앞쪽에 서 있는 트럭과 건물 옥상에 엎드려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수염을 기른 남자는 그렇게 대답했다. "서두를 것 없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 "알겠습니다." 남자들은 또다시 숲 속에 몸을 숨겼다. "대장님, 드십시오." 키노의 탄환에 다리를 맞은 남자가 소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와서 금속 컵에 담긴 차를 내밀었다. "고맙다. 다리는 어떤가?" "굉장히 아픕니다. 이 아픔을 그 여행자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ㅡ공주님과 함께 나라로 돌아가자. 모두 기다리고 있다." 수염을 기른 남자는 부하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 그리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부하의 손에서 차를 받아들었다. 수염을 기른 남자가 천천히 차를 입에 머금었을 때였다. 멀리서 아기 울음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공주님이다! 무사하신 것 같군!" 누군가가 말했다. 남자들 사이에서 웃음이 일었다. 그 직후ㅡ. 탕. 탁한 발포음이 그 울음소리를 지웠다. "응? 적의 공격인가?" "아닙니다!" 대화가 오가는 동안에도 무거운 발포음은 계속되었다. 탕. 타앙. 타앙. 탕. 탕. 이윽고 다른 패스에이더 소리가 그 소리를 뒤덮었다. "안에서 서로 쏘고 있습니다!" 저격수가 외쳤다. "뭐라고?" 수염을 기른 남자는 컵을 내던지고 망원경을 움켜잡았다. 총성과 함께 건물 안에서 때때로 빛이 일었다. 건물 옥상에 있던 두 사람이 허둥지둥 내려가는 모습도 보였다. "놈들…, 내부 분열을 시작했나보군!" 수염을 기른 남자에 이어 숲 속에 숨어 있던 부하들이, "빌어먹을! 감히 공주님 앞에서!" "멍청한 놈들!" "그 여행자 짓은 아니겠지!" 흥분하며 입을 모아 외쳤다. 저격수가 머리 위에서 물었다. "보초가 내려갔습니다! 돌입할까요?" 타앙. 탕. 타앙. 발포음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지금은 너무 위험하다. 잠시 기다려라." 그 소리를 들으며 수염을 기른 남자는 벌레를 씹은 듯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똑같은 발포음을 남자들보다 가까운 곳에서 들으며, "오, 난리 났네. <캐논>과 <숲의 사람>을 마구 쏘아대고 있군." 에르메스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난사 소리는 시작된 지 30초 만에 멈췄다. "……." 수염을 기른 남자는 망원경으로 움직임이 사라진 건물을 살펴보았다. 그 뒤에서 저격수와 부상자를 제외한 일곱 명의 동료가 라이플을 들고 언제든지 돌입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설마 그 여행자가 놈들을 모조리 죽인 건 아니겠죠…?" 수염을 기른 남자가 부하의 물음에 대답했다. "알 수 없지. 그럴 가능성은ㅡ있다." 그리고 망원경을 내린 순간이었다. "대, 대장님! 입구를 보십시오!" 저격수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수염을 기른 남자는 즉각 망원경을 들었다. 약 50미터 앞, 건물 남쪽 입구에서, "아니!" 여행자가 밖으로 시체를 던지고 있었다. 모토라도를 타고 있던 여행자가 분명했다. 입구 옆에서 여행자가 자신보다 큰 남자의 시체를 밖으로 던졌다. 물보라가 일었다. 시체는 숲에서 10미터쯤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는 시체와 마찬가지로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두 시체가 입고 있는 것은 똑같은 모양의 검은 옷. "또 나왔습니다." 여행자는 또다시 시체를 끌고 와서 처음 던졌던 시체 옆에 던졌다. 물보라가 일었다. "다음에 나올 때 팔이라도 쏠까요?" 저격수가 물었다. 수염을 기른 남자는 망원경을 노려보며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나. "…웃!" 또다시 들려오기 시작한 아기 울음소리에, "그만둬라! 공주님은 무사하다!" 즉각 그렇게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지시를 기다리겠습니다." 아기 울음소리를 배경 삼아 여행자는 또다시 입구 옆에 나타나서 시체를 던졌다. 시체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서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저 녀석, 뭘 하는 거지…?" 부하의 물음에 다른 부하가 대답했다. "내부 분열을 일으켜서 도망칠 셈인가?" "놈들이? ㅡ아니! 여행자 짓이 분명해!" "혹시 사정을 들은 것 아닐까? 저 여행자는 공주님이 어찌 되든 아무 상관 없을 터. 공주님을 이용해서 우리와 교섭하려는 건 아닐까?" "설마…, 공주님을 인질 삼아 모토라도를 타고 자기만 도망칠 속셈인가…?" 부하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수염을 기른 남자가 입을 열었다. "대단한 자로군. 우리에게 시체를 보여주고 있는 거다. 놈이 요청하면 교섭에는 응해주지." "대, 대장님! 하지만ㅡ." "우리 목적은?" "…공주님을 무사히 조국으로 모셔 가는 겁니다!" "그래, 맞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활하고 더러운 여행자와 대화를 나눠줄 수도 있다. 만약 거치적거리는 시종들을 모조리 죽였다면 상도 주도록 하지." "대장님…." "단 풀 메탈 재킷 납 탄환을. 우리에게는 우수한 저격수가 있다. 멀리 달려갔을 때 뒤에서 한 발 선물해주지. 두 발은 못 준다." 그 말에 부하들은 겨우 웃음을 터뜨렸다. "여섯 명째입니다." 저격수의 목소리. 지금 건물 앞에는 여섯 구의 시체가 엎드려 있었다. "건물에 남아 있는 남자는 이제 두 명. 그리고 공주님과 그 여자뿐입니다." "모두 죽이는 데 성공했나? 여행자여." 수염을 기른 남자와 부하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지켜보는 가운데 여행자가 일곱 번째 시체를 던졌다. 회색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 "응?" 여행자는 시체를 집어던진 직후 오른쪽 허벅지에서 리볼버를 뽑아 입구에서 손을 내밀었다. 탕. 탕. 탕. 그리고 시체의 뒤통수를 연달아 세 번 쐈다. 가까운 거리에서의 대구경탄 연사. 머리가 완전히 날아가고 뇌수가 튀어오르는 것이 50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옛 동포에게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는 여행자를 바라보며 남자들이 중얼거렸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으려는 건가…." "지독한 놈…." "너무해…" "저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부하들은 완전히 전의가 저하된 눈치였다. "정신 차려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염을 기른 남자가 부하들을 다그쳤다. 그 와중에도 아기 울음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마지막 한 명입니다." 저격수의 말대로 여행자는 또 한 명의 시체를,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시체를 건물 밖으로 끌어냈다. 여덟 명의 시체 덕분에 그곳을 흐르는 물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수염을 기른 남자는 길게 숨을 내쉬며 찬사를 보냈다. "해냈군…. 훌륭해. 감탄스럽군." 그리고 나무 위의 저격수에게 누군가가 탄환에 맞거나 명령을 내릴 때까지는 절대로 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자, 다음은 어떻게 나올 생각이냐? 우수한 여행자여." 수염을 기른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20초 후 아기 울음소리가 멎었다. 때때로 새 울음소리만 들려올 뿐 정적에 감싸인 100초가 흐른 후. "할 얘기가 있습니다. 들ㅡ립ㅡ니ㅡ까ㅡ!" 여행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들린다! 그쪽은 어떤가!" 키노가 있는 건물 남쪽 입구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쪼그려 앉아서 발치를 흐르는 물로 피투성이 손을 씻고 있던 키노는, "오ㅡ, 이젠 살았나?"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키노는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신 뒤, "들립니다ㅡ! 그쪽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탄환에 맞지 않도록 입구 조금 뒤에서 입 앞에 손을 모으고 최대한 큰 소리로 외쳤다. "말해봐라!" 남자의 대답을 들은 키노는 큰 소리로 말했다. 첫째, 조금 전까지 호위를 맡았던 남자들은 내게 거짓말을 해서 모두 죽였다. 둘째, 여자를 고문해서 아기가 공주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셋째, 나는 그쪽의 후계자 다툼에는 흥미 없다. 자신과 모토라도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넷째, 그쪽을 쏜 건 미안하지만 아기의 안전과 교환하고 싶다. 트럭도 필요 없다. 다섯째, 아기를 넘길 테니 시체를 확인할 겸 이쪽으로 와라. 도중에 몇 번이나 안 들린다는 대답을 듣고 그때마다 목청을 높여야 했던 키노는 대화가 끝난 후 작게 중얼거렸다. "휴…, 목 아파." 키노의 요구를 들은 수염을 기른 남자는, "응해주지." 그렇게 말하며 부상당한 세 명을 숲 속에, 저격수를 나무 위에 남겨두고 일곱 명의 부하들에게 따라오라고 명령했다. "준비됐습니다. 가시죠." 부하들이 말했다. 수염을 기른 남자는 키노에게 외쳤다. "지금 여덟 명이 함께 가겠다! 한 발이라도 쏘면 교섭 결렬이다!" "알겠습니다! 하다못해 평범하게 얘기할 수 있는 위치까지 와 주세요! ㅡ콜록!" 그 대답을 들은 후. "좋아! 방심하지 마라." 수염을 기른 남자는 선두에 서서 숲에서 유적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부츠가 물에 닿았다. "왔군…." 키노는 길을 걸어오는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키노의 손에는 알루미늄 물통이 들려 있었다. 키노는 물통에 든 물로 바싹 마른 목을 축인 후 발치에 뱉었다. 밖을 쳐다보자 8인분의 시체가 좌우로 네 명씩 나뉘어 뒹굴고 있었다. 중앙에는 3미터 정도의 폭이 있었다. 시체는 지금도 피를 흘리며 물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물에 비친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 기묘한 색으로 물들어 보였다. 길 앞에 남자들이 있었다. 남자들은 라이플을 허리 높이로 겨누고 길 좌우로 갈라져서 복병에 주의를 기울이며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패스에이더를 쏘면 즉각 옆에 있는 폐허에 몸을 숨길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눈치였다. "자, 그럼…, 말 그대로 '한 방' 승부입니다." 키노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정말 괜찮을까?" 건물 안에서 남자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해보지 않으면 모르죠." "이봐…." "하지만 전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지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성공할 겁니다. 계획대로 하세요. 도화선의 길이가 중요합니다." 키노가 말했다. 천천히 시간이 흘렀다. 이제 남은 거리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건물과 약 20미터쯤 떨어진 위치에서 선두의 오른쪽 옆에 있던 수염을 기른 남자가 왼쪽 주먹을 들었다. 순간 부하들이 각 방향을 경계하며 걸음을 멈췄다. "이봐, 여행자!" 수염을 기른 남자가 외쳤다. "이제 들리나? 피차 목 아프게 소리 지르는 건 그만두지 않겠나." "동감입니다." 키노의 목소리는 조금 위에서 들려왔다. 수염을 기른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키노는 지붕 위에 있었다. 키노는 당당하게 온몸을 드러내고 지붕 가장자리에 한 발을 얹은 채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공주님…." 그 팔에는 강보에 싸인 아기가 안겨 있었다. "놈…." 저격수도 동시에 키노를 포착하고 목에 십자 선을 맞췄지만 탄환을 맞고 아이를 떨어뜨리거나 앞으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여어, 여행자!" "안녕하세요. 당신이 대장이로군요." 키노와 수염을 기른 남자는 먼저 인사를 나눴다. 키노가 말했다. "20미터쯤 되려나? 아침처럼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기쁘군요." 수염을 기른 남자는 라이플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아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쪽이 안고 있는 건 우리나라의 소중한 공주님인가?" "네. 저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에게서 전부 들었습니다. 당신들은 이 아이를 내세워 왕가를 재건할 생각이라면서요?" "그렇다." "솔직히 그 문제는 제게는 관심 밖입니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제게 중요한 건 저와 모토라도 에르메스가 여행을 계속하는 겁니다." "그렇겠지." 처음에는 주위를 경계하던 부하들도 차츰 키노에게 주의를 쏟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전 제게 거짓말을 해서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한 그 사람들을 처치했습니다." "훌륭하군. 우리 일손을 덜어줘서 고맙다. 그쪽 때문에 사랑하는 부하 세 명이 다쳤지만 목숨에 지장은 없다. 이런 멋진 곳에서 서로 싸울 필요 없지 않은가. 그 일은 피차 잊어버렸으면 좋겠군." "오, 둘 다 놀고 있군ㅡ."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르메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몇 가지 제안을 하죠." "좋다, 말해봐라." "전 이 아이를 안은 채 짐을 챙겨서 에르메스를 타고 길로 돌아가겠습니다. 여러분은 조금 뒤에서 트럭을 타고 따라오세요. 이 아이를 돌보던 여자는 안에서 정신을 잃고 있으니 적당히 데려가도록 하십시오." "그러지. ㅡ그리고?" "양쪽 다 길에 나가면 전 조금 떨어진 길 위에 아기를 내려놓고 열심히 도망치겠습니다. 쫓아오지 않으면 그걸로 전부 끝납니다. 아기와 함께 트럭을 타고 나라로 돌아가세요. 제안은 이상입니다." "훌륭하군. 우리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지. 만약 거절하거나 도중에 그쪽에 손을 대면 어떻게 되나?"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키노는 재킷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안에는 초록색 액체 화약이 들어 있고 코르크 마개에 작은 도화선이 꽂혀 있었다. 키노는 그것을 강보에 싸인 아기의 배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제가 쓰러져서 이 병에 충격이 가해지면 저와 에르메스와 함께 이 아이도 폭발로 죽고 말겠죠." 한 부하가 "나쁜 놈!" 이라고 중얼거렸다. 수염을 기른 남자는 그런 부하를 달래며 말했다. "상상조차 하기 싫군. 그런 무서운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지." "그럼 교섭 성립이군요." "그래, 성립이다. 그쪽이 떠나는 걸 잠자코 지켜보도록 하지." "잠자코 저격수로 쏠 생각이시죠?" 키노가 단호하게 말했다. "……." 수염을 기른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라면 그렇게 할 겁니다!" 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지붕 가장자리에서 살짝 몸을 비켰다. 그리고 지붕에 뚫린 건물의 계단 입구를 향해 외쳤다. "발차!"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발포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시무시한 굉음이 건물 안에서 들려왔다. 키노를 올려다보고 있던 수염을 기른 남자와 길 양옆에 흩어져 있던 부하들은 자석에 이끌리듯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검은 건물 입구. 그곳에서 대포가 달려왔다. "아니!" 수염을 기른 남자를 향해, 그리고 그의 부하들을 향해ㅡ. 남쪽에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포석이 깔린 길을, 물에 잠긴 아름다운 길을 대포가 수레차와 함께 돌진해 다가왔다. 두 개의 바퀴가 배처럼 물보라를 일으켰다. 건물에서 모습을 나타낸 지 불과 3초 후. "웃!" 수염을 기른 남자의 눈에 자신의 바로 옆을 달려가는 구식 대포가 비쳤다. 수레차 위의 대포가 완전히 거꾸로 놓여 있는 것을 본 순간 그 대포가 건물 안에서 발사되어 반동을 이용해서 이쪽으로 달려왔다는 사실을 즉각 눈치 챌 수 있었다. "하핫!" 수염을 기른 남자는 그 아이디어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도 똑바로 길 한가운데를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부하들 누구에게도 명중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며 싱긋 웃었다. 동시에 남자의 뛰어난 시력은 수레차 뒤에 있는 고정 장치에 묶여 있는 나무상자들을 포착했다. 그리고 그곳에 도화선이 뻗어 있는 것도. 불이 붙어 있었다. 짧았다. "아?" 다음 순간 나무상자는 폭발했다. 키노는 대포의 '발차'를 확인한 순간 아기를 안은 채 울타리 뒤로 몸을 날렸다. 아기를 배에 끌어안듯 남쪽으로 등을 돌렸다. 아기의 배에 얹혀 있던 병은 지붕에 떨어져서 초록색 물을 흩뿌리며 깨졌다. 수레차의 상자는 남자들의 거의 한가운데에서 폭발했다. 안에 들어 있던 액체 화약이 불꽃과 충격파를 발생시켰다. 수면에 수백 개의 작은 파문이 일었다. 불길은 앞에 서 있던 수염을 기른 남자를 포함한 네 명을 삼키고 그들의 피부와 옷에 불을 붙였다. 충격파와 수레차 파편은 나머지 네 사람을 덮쳤다. 그들은 뒤로 날아가서 벽에 세차게 부딪혔다. 그리고 머리로 벽에 구멍을 뚫었다. 아마도 뇌수인 듯한 부위를 허공에 흩뿌리며. 두 번째 폭발음은 푸른 하늘을 뒤흔들며 첫 번째 폭발음보다 더욱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튼튼한 포신은 폭발에도 부서지지 않고 허공을 날아서 어느 집의 벽을 산산조각 내며 떨어졌다. "위험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벽에서 불과 3미터 떨어져 있던 에르메스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아아…." 스코프를 통해 그 광경을 목격한 저격수는 한 박자 늦게 밀려온 폭풍에 휩쓸려 자칫하면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뻔했다. 간신히 균형을 되찾은 그가 본 것은 피와 함께 벽에 달라붙어 있는 네 명의 동료와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불길 속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는 네 명의 동료였다. "……." 그는 쏘았다. 먼저 경애하는 대장을. 재장전. 옛날 병사 학교의 동기였던 전우를. 재장전. 가끔은 밉살맞았던 2년 후배를. 재장전. 그리고 동생처럼 생각했던 젊은 남자를. 재장전. 약 4초 만에 네 발을 쏘았다. 네 명의 비명이 멎었다. 모두 편안해졌다. "일단 후퇴한다!" 저격수는 재빨리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리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 사람에게 말했다. 순간 그는 그중 한 사람의 얼굴에 굵은 나무 파편이 박혀 기묘한 공예품처럼 변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그는 시체를 내버려두고 라이플을 어깨에 멨다. "일어서! 달려라!" 그리고 팔을 다친 동료의 등을 두드리며, 다리를 다친 동료를 부축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풀을 밟으며 트럭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 달렸다. 곧 다리를 다친 사람이 쓰러졌다. 붕대 위로 피가 배어나왔다. "정신 차려! 괜찮다! 당장 쫓아오지는 않을 거야! 길로 나가서 말을 매어둔 곳까지 달리기만 하면 된다! 알겠나!" "그래…." 몸을 일으킨 동료와 함께 그는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팔을 다친 남자가 달리면서 뒤를 돌아보며 두 사람을 격려했다. "힘내! 쓰러지면 내가 업어주마!" 다리를 다친 남자가 식은땀 범벅이 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하핫! 네 목소리가 천사의 목소리로 들리는 날이 올 줄이야!" "멍청한 자식! 난 항상 천사ㅡ." 저격수와 그의 부축을 받고 있는 동료의 눈앞에서 뒤를 돌아보던 남자가 쓰러졌다. 길 옆에서 뛰쳐나온 것은 단도를 허리 높이로 겨눈 남자였다. 온통 피범벅이 된 옷을 입은, 분명 어젯밤 죽였던 산적이었다. 지저분한 옷차림에 머리에는 위장을 위해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붙였고 검게 칠한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산적은 오른쪽 옆에서 뛰쳐나와 남자의 배를 깊이 찌른 후 그대로 함께 쓰러졌다. 동시에 다른 산적이 수풀에서 뛰쳐나왔다. "으아아아!"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치며 도끼를 휘둘렀다. 옆에 있던 남자의 머리에서 뿜어 나오는 피를 뒤집어쓰며 저격수는 등에 메고 있던 라이플을 앞으로 돌려 산적의 얼굴을 겨누었다. "큭!" 방아쇠를 당겼을 때 그의 몸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발사된 탄환은 나뭇가지에 구멍을 뚫었다. 뒤에서 목에 매달린 세 번째 산적이, "죽어라!" 큰 소리로 외치며 팔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목을 부러뜨릴 정도의 완력은 없는 듯했다. 저격수는 왼쪽 주먹으로 산적의 콧등을 쳤다. "크헉!" 한순간 팔의 힘이 느슨해졌다. "하앗!" 그 틈에 저격수는 산적을 메다꽂았다. 공격은 재미있을 만큼 쉽게 성공했다. "끄억!" 산적은 등부터 땅에 떨어져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후우."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든 순간 저격수의 눈에 바람을 가르며 똑바로 날아오는 피에 젖은 도끼가 보였다. 그 일격으로 그는 즉사했지만 세 명의 시종은 고함을 지르며 시체를 마구 내리쳤다. 그것은 목 위의 형태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피투성이가 된 세 사람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위 속의 음식물과 위액을 토하며 시체로 가득 찬 유적으로 돌아왔다. 얼굴을 보이자 속옷 한 장 차림의 동료들이 달려와서 그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기뻐했다. 세 사람은 도망친 적을 모두 처치했다고 보고했다. "수고했네…." 역시 볼썽사나운 모습의 의사는 눈물을 흘리며 세 사람을 치하했다. 세 사람은 피범벅이 된 옷을 벗고 다른 사람들처럼 속옷 한 장 차림으로 차가운 물위에 몸을 굴렸다. 얼굴에 묻어 있던 산적들과 전 근위병들의 피가 물에 씻겨 내렸다. 몸을 씻은 후 세 사람은 아이는 무사하냐고 물었다. "무사하네. 귀마개를 해서 고막에도 이상 없다네. 다른 사람들도 무사하네. 키노 씨와 유적을 치우고 있지. 아아…, 전부 키노 씨의 작전대로야. 하지만 제일 수고한 건 자네들일세. 지원해줘서 고맙네. 정말 잘 했어. 나는 할 수 없는 일을 정말 잘 해줬네. 자들은 싸움에서 이긴 게야! ㅡ지금 술을 준비하고 있네. 다 함께 축배를 들도록 하지. 공주님의 미래를 위해 건배하세나!" 오후가 반쯤 지나고 하늘의 푸른빛이 더욱 짙어졌다. 그런 하늘을 비추고 있는 길 위에 열 명의 인간과 한 대의 모토라도, 그리고 한 대의 트럭이 서 있었다. 그곳은 유적 중앙의 건물 앞이었다. 시종들로 위장해서 던진 시체는 이미 치워져 있었고 그때 사용했던 그들의 옷은 빨아서 트럭 덮개 위에 널려 있었다. 죽은 열두 명의 병사와 동료 한 명의 시체는 키노의 지시에 따라 숲으로 옮겨서 땅에 눕히고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덮었다. 병사들이 갖고 있던 물건 중 아직 쓸 만한 것ㅡ라이플과 수류탄, 탄약과 휴대식량 등은 트럭 화물칸에 실었다. 일곱 명의 남자들은 모두 속옷 한 장 차림에 상반신은 알몸, 다들 수건을 허리에 감거나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에르메스가 센터 스탠드로 서 있었다. 그리고 에르메스의 뒷좌석 짐받이 위에는 널빤지가 놓여 있었다. "이런 취급을 받을 줄은 몰랐어!" 테이블 신세가 된 에르메스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아기를 업은 여자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여덟 개의 머그컵에 갓 마개를 딴 술병에서 붉은 액체를 따랐다. 한 병을 8등분하자 얼마 되지 않은 양이었지만 다들 기쁜 듯이 컵을 들었다. 테이블에 남아 있는 커버 하나는 천국에 간 동료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키노는 유일하게 자신이 끓인 차가 담긴 머그컵을 들고 있었다. "다들ㅡ정말 수고했네. 훌륭하게 싸워줬네." 의사가 입을 열었다. "다들 괴로웠을 테지. 무서웠을 테지. 소중한 동료도 한 사람 잃었네. 그리고 예전에는 같은 곳에서 웃으며 일하던 열두 명의 동포들과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됐지. 그래도 이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싸워야 하네! 언젠가 안주할 땅을 찾을 때를 위해 간직해둔 한 병이지만, 마지막 고향의 맛이지만 지금이야말로 이 술을 맛볼 때가 아닐까! ㅡ이의는 없겠지? 이미 마개를 따버렸지만." 남자들 사이에서 웃음이 일었다. 여기저기서 없습니다! 더는 못 기다리겠습니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사가 컵을 높이 들었다. 남자들도 그를 따라 컵을 들었다. 키노도 그들을 흉내냈다. "조국의 안정과, 이 아이의 미래와,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와, 그리고 죽은 동료들을 위하여ㅡ, 건배!" 건배를 외치는 합창이 울려 퍼진 후 남자들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단숨에 술을 마셨다. 그 모습에 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컵을 들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 직후. "ㅡ마시지 마!" 큰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오?" 에르메스가 놀라며 작게 중얼거린 순간. "커헉!" "컥!" "크윽!" "콜록!" "큭!" "크아아아!" 의사를 제외한 여섯 명의 남자들은 거의 동시에 선혈을 토했다. 분수처럼 피가 뿜어 나왔다. 남자들은 입에서 피를 쏟으며 물소리와 함께 천천히 쓰러졌다. 쓰러진 남자들의 몸이 작게 경련했다. 하지만 그것도 곧 멎고 말았다.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산적들의 피와는 달리 선명하게 붉은색으로 수면을 물들였다. "오, 저런." 에르메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 째서…." 의사는 컵을 물에 떨어뜨리며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근처에 서 있는 여자를 향해 두세 걸음 필사적으로 걸어갔지만 곧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커헉…." 의사는 머리부터 떨어지듯 물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물속에서 반쯤 얼굴을 내밀며, 입에서 가늘게 피를 흘리며 결국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키노는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리고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키노의 왼쪽 옆, 2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 지금은 쓰러져 있는 의사 앞에 아직 서 있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그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을 업고 있었다. 스무 살 남짓한 젊은 여자가 천천히 키노를 돌아보았다. "성공했다!" 키노는 처음으로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여자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 "음ㅡ, 왜 이런 짓을?" 그렇게 물은 것은 키노가 아니라 차체 여기저기에 피를 뒤집어쓴 에르메스였다. 그 물음을 들은 키노는 선 채로 차를 마셨다. 붉은 물이 발밑을 흘러갔다. "알고 싶어요? 꼭 알고 싶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여자는 웃고 있었다. 연인이 비밀을 물었을 때처럼 평화로운 미소였다. "알고싶어알고싶어! 제발 가르쳐줘요!" 에르메스도 그런 여자에게 맞추기 위해서인지 즐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여자는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업은 채 대답했다. "그럼 가르쳐주죠! 하지만 그 전에 키노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 말부터 해도 될까요?" "좋아요ㅡ." "그럼ㅡ." 여자는 키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키노 씨." "……." 키노는 컵을 입에 댄 채 눈꺼풀을 살짝 움직여 그 말에 대답했다. "근위병들을 처치할 수 있었던 건 키노 씨 덕분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이 아이를 대신해서 다시 한 번 인사 드려요. 엄마로서." "……. 별말씀을." 키노는 입에서 컵을 떼고 짧게 대답했다. "그럼 가르쳐주죠." 여자는 키노에게서 에르메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키노는 모토라도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네는 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난 이 아이의 친엄마예요. 이 아이는 내가 낳았어요. 그리고 아빠는 혁명으로 죽은 왕이에요." "오, 놀라워라." "그렇죠? 내가 제일 놀랐는걸요! 난 왕궁에서 빨래를 하는 시녀였어요. 그것도 갓 궁에 들어온 말단 시녀였죠. 2년 전쯤의 일이에요." "그래서그래서!" "어느 날 왕과 우연히 만나서ㅡ, 믿을 수 없게도 왕은 나를 사랑해줬어요! 예쁘다면서 사랑해줬어요! 기뻤어요! 물론 왕에게는 후궁이 몇 명이나 있었고 아이도 몇 명이나 있었죠. 하지만 별 볼일 없는 나를 보고 첫눈에 반한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를 가졌군요?" "그래요! 하지만 당장 알려지게 됐죠. 왕궁은 뱀 소굴이나 마찬가지에요. 자신의 아이를 왕위 계승자로 만들기 위해 후궁은 근위병을 움직여 온갖 방법으로 나를 협박했죠. 그 아이를 낳으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다고…." "오, 저런."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낳고 싶었어요. 그래서 왕궁에서 만난 친절한 의사 선생님과 상의해서 '유산했다'는 거짓 진단서를 받고 왕궁을 떠났죠." "그게 저 사람?" 에르메스가 물었다. "저 사람이에요." 여자는 쓰러진 의사를 보지도 않고 즉각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나라 외곽에 있는 고향 마을로 돌아갔어요. 어머니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 사고로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죠. 아아, 어머니, 거짓말을 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역시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을 거예요. 어머니는 손주가 태어나기를 손꼽아 기다렸고 나는 무사히 아이를 낳았어요. 반년 전 일이죠." 여자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에서 자고 있는 아기를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왼손가락으로 아기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래서?" 에르메스가 물었다. 키노는 빈 컵을 든 채 여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곧 '혁명'이라는 이름의 살육이 시작됐어요. 다정했던 왕도, 밉살맞았던 후궁들도, 그 아이들도 모두 죽었죠. 고향 마을에까지 그들의 목을 실은 차가 왔어요. 정말 너무하지 않나요. 그로부터 얼마 후ㅡ, 의사 선생님이 우리 마을을 찾아왔어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라는 왕실의 시종들과 함께." "저 사람들?" "맞아요." 여자는 에르메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뒤에는 반라의 남자들이 쓰러져 있었다. 출혈이 멎은 것일까. 물은 원래의 맑은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시체 사이로 하늘이 비쳤다.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어요. '놈들이 당신 딸을 노리고 있다. 당신의 목숨도 위험하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전 근위병들 잔당이 나에 대한 냄새를 맡았다고. 그것도 이번에는ㅡ." "공주님을 빼앗으러 왔군요." "맞아요! 정말 너무하지 않아요? 이 아이가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유일한 아이라는 이유로 나한테서 빼앗으려고 하지 뭐예요!" "그래서 도망쳤구나." "그래요. 사실은 싫었어요. 어머니한테 진실을 밝히지도 못한 채 난 고향 마을은 고사하고 나라마저 버릴 수밖에 없었죠. 여행자는 그냥 떠돌이잖아요! 그런 생활은 죽어도 싫었어요! ㅡ아, 키노 씨, 미안해요. 어디까지나 '나'는 싫었던 것뿐이에요. 미안해요." 여자가 키노를 바라보며 말했다. 키노는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말하듯 가볍게 손을 저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그 사람들과 도망쳤어요. 이 나라 저 나라를 전전하며 도망쳐 다녔죠. 이젠 괜찮을 것 같다고 안심하면 추적자들은 또다시 정보를 입수해서 우리를 쫓아오곤 했어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허둥지둥 그 나라를 떠나야 했죠. 정말 끔찍했어요." "그것도 이젠 끝이네요." "그래요! 이젠 끝났어요! 그런 생활은 이제 끝이에요! 이제 근위병들에게 목숨을 위협받을 걱정도 없고 도망치기만 하는 생활을 하지 않아도 돼요!" "그럼 앞으로 어쩔 생각이죠?"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에르메스 씨. 당신은 정말 다정하군요." "그렇진 않지만ㅡ, 어떻게 할 거죠?" 여자는 에르메스를 향해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세우며 오른쪽 눈으로 윙크를 던졌다. "다 연습해놨답니다!" "웅? 뭘?" "트럭 운전! 잘 한다고 칭찬도 받았어요!" "아, 여기에서 살지 않아도 된단 말이구나." "물론이죠. 안 그러면 모조리 독살하진 않았을 거예요! 난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거든요!" "알았어요. 그럼 똑같은 질문을 해서 미안하지만 어떻게 할 거죠? 이제부터." "물론 고국으로 돌아가야죠." 그 말을 들은 순간. "엥?" "……?" 에르메스는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키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뭐라고 했죠?"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어요." "어째서?" "어째서라니…. 지금 나라는 다시 왕을 맞이하려고 한참 시끄럽다잖아요?" "그런 곳으로 돌아갔다가는ㅡ." 에르메스가 말했다. 여자가 도중에 그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요! 내 딸이 여왕님이 되는 거예요!" 키노는 천천히 에르메스에게 다가가서 빈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술잔을 집어든 후 손을 뻗어 하류에 술을 버렸다. 붉은 술은 곧 물에 녹아 사라졌다. 키노가 입을 열었다. "그게 당신의 진짜 목적이었습니까." "물론이죠.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자마자 난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 아이는 여왕님이 되고 난 여왕님의 어머니로서 우아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지만 근위병들에게 딸을 넘겨줘서 그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어요.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건 이 아이뿐,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이 포기할 때까지 이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도망쳤다가 다시 나라로 돌아올 생각이었어요. 키노 씨 덕분에 이렇게 빨리 그 계획을 실현할 수 있어서 너무너무 기뻐요!" "그럼 '남은 목숨은 3년'이라는 의사의 말은." "당연히 거짓말이죠! 시종들을 움직이기 위해서 의사 선생님이 생각해낸 거짓말이에요. '길어도 3년만 지나면 도피행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설득했다더군요. 의사 선생님에게도, 시종들에게도 가족이 있으니까요. ㅡ하지만 그걸 함정에 빠진 변명으로 사용할 줄은 몰랐어요. 당황해서 키노 씨의 말을 듣지 않은 건 의사 선생님이었거든요. 하지만 전부 잘 끝났으니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맞아. '끈이 좋으면 다 조인다'는 말도 있잖아! 그렇지, 키노." 에르메스가 기쁜 듯이 말했지만 키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어느 나라에 정착해서 시종들이 떠나고 나면ㅡ, 이 아이를 잘 키워서 나라로 돌아가 선을 보일 생각이었어요. 굉장히 장대한 계획이었죠." "흠, 흠." "하지만 다 죽어버리면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릴 필요 없잖아요! 그래서 다 죽였어요. 의사 선생님이 갖고 있던 약을 먹여서.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내 계획이 성공한 건 전부 키노 씨 덕분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여자는 또다시 키노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곧 이렇게 말했다. "아참, 나 좀 봐. 아직 사례 얘기를 하지 않았죠! 키노 씨는 정말 훌륭하게 싸워준걸요. 꼭 사례를 하고 싶어요! 이 트럭은 내가 운전해서 돌아가야 하니까 안 되겠고, 키노 씨가 원하는 건 뭐죠? 자금으로 써야 하니까 뭐든지 줄 수는 없지만 최대한 성의를 표시하고 싶어요. 그래야만 내 마음이 풀릴 것 같아요! 참, 시종들이 조금이지만 보석을 갖고 있었어요! 나라를 떠날 때 각각 집에 있는 값나가는 물건을 전부 갖고 왔다더군요! 우리를 위해서 갖고 온 거니까 우리가 써도 되겠죠!" 에르메스가 조금 목소리를 낮추며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에게 말했다. "그런 말을 해도 될까? 키노가 댁을 죽이고 전부 갖고 갈지도 몰라요." "어머? 키노 씨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어요!" 여자는 웃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기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울 리 없잖아요! 그런 건 말도 안 돼요. 나도 여자니까 알아요. 키노 씨는 싸울 땐 굉장히 잔혹하지만 실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그렇대, 키노. 어떻게 할래?" 에르메스가 오랜만에 키노에게 말을 건넸다. "뭐…, 나는…, 오늘은…, 더 이상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아…." 키노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역시 키노 씨는 다정하군요!" 여자가 말했다. "아닙니다." 키노는 그 말을 부정했다. 동시에ㅡ. 키노의 시선 끝에서, 그리고 여자의 바로 뒤에서 남자가 일어섰다. 물을 뚝뚝 떨어드리며 상반신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온몸의 근육이 긴장된ㅡ. 그리고 마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일어섰다. 남자의 굵은 두 팔이 여자의 작은 머리를 움켜잡았다. "아?" 여자는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자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기이한 방향으로 목이 꺾인 채 죽었다. "…부…탁…." 남자는, 의사는 그렇게 말하며 또다시 물속에 쓰러졌다. 키노는 재빨리 달려가서 쓰러질 뻔한 여자의 시체를 붙잡았다. 순간. "……." 시체의 등에 잠들어 있는 아기가 보였다. 키노는 강보를 풀고 아기를 안아들었다. 가냘픈 여자의 시체는 곧 물속에 쓰러졌다.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어 부릅뜬 눈을 가렸다. 키노는 아기를 에르메스의 짐받이 위에 눕혔다. "난 아기 침대가 아니야." 에르메스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키노는 무시하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혀 울지 않네. 에르메스 위가 편한가봐." "뭐, 할 수 없지." 에르메스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으아아아아아!" 남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의사는 물 위에 주저앉아서, "으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무릎을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50세가 넘는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남자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오열을 계속했다. 남자의 통곡이 멈춘 것은 하늘이 석양에 물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하얀 구름이 옅은 오렌지색 하늘을 지나갔다. 키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양쪽 다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다른 것은 수면에 비친 수많은 시체뿐. "키노 씨…, 부탁이 있습니다…." 의사가 고개를 숙인 채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죽여주세요…. 나를 죽여줘…." 키노는 조금 화가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 제가 했던 말 못 들으셨나요?" 그리고 물었다. "트럭은 운전할 수 있겠죠?" * * * 할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내게 말했다. '인생은 싸움이다'라고. '싸우는 것을 두려워 말아라'하고. 하지만 내가 태어난 나라에 대해서는, 그리고 내 어머니에 대해서는ㅡ. 결국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알아봤자 뭐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니까 별로 상관없지만. 하지만 내게 왜 '키노'라는 이름을 지어줬는지는 물어볼 때마다 이야기해주었다. 키노는 여행자의 이름. 할아버지가 아기였던 나를 안고 떠돌아다닐 때 우리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여행자의 이름이다. '모토라도를 탄 굉장히 다정하고 굉장히 강한 여행자'라는 것 외에 자세히는 모른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키노 씨'라고밖에 말해주지 않았다. 키노 씨는 할아버지와 나를 해치려던 사람들을 물리치고 우리를 지켜주었다. 우리를 위해서 싸워주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전부 키노 씨 덕분이란다." 할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내게 말했다. 그 여행자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직 여행을 계속하고 있을까. 또 누군가를 위해 싸우고 있을까. 아니면ㅡ. 에필로그 카메라의 나라·a ㅡPicturesque·aㅡ 키노와 에르메스가 입국한 것은 과학적인 발전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옛날부터 소박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나라였다. 돌을 쌓아 올린 것뿐인 성벽 안에서 국민들은 몇백 년 전부터 변함없이 완벽한 자급자족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입을 것은 전부 마나 비단 등의 자연섬유로 만든 옷, 먹을 것은 전부 농약을 뿌리지 않고 재배한 곡물과 채소. 나라에 따라서는 오히려 많은 돈이 들 법한 생활을 그들은 느긋하게 계속하고 있었다. 키노와 에르메스는 오랜만의 손님(차)이라는 이유로 큰 환영을 받았다. 식사도 대접받았다. 키노는 그 맛에 감격하여 매일매일 깨끗이 음식을 먹어치웠다. 느긋한 3일간의 체재를 마친 그날 아침. 키노와 에르메스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하려고 했을 때였다. "키노 씨, 에르메스 씨. 부탁이 있습니다. 함께 찍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며 카메라 한 대를 들고 왔다. 검은 카메라였다. 렌즈를 교환할 수 있는 일안 렌즈식으로 사용하는 필름은 금속 용기에 들어 있는 35밀리 필름. 다른 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필름이었다. 표준 50밀리 화각의 매뉴얼 포커스 렌즈가 장착되어 있었고 목에 거는 헝겊으로 만든 끈이 달려 있었다. 여기저기 작은 긁힌 자국이 있긴 하지만 부품이 없거나 파손된 부분은 없었다. 아직 충분히 쓸 수 있는 카메라였다. "……?" 키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놀라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에르메스가 물었다. "좋은 카메라네. 그거 어디에서 난 거예요?" "이건 말이죠ㅡ." 카메라를 들고 온 사람이 경위를 설명했다. 10여 년 전 한 여행자가 이 나라에 도착했다. 20대밖에 안 되는 젊은 남자였지만 여행 도중 입은 상처 때문에 병에 걸려서 이미 위중한 상태였다.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간호를 했지만 허무하게도 그는 며칠 후 죽고 말았다. "제 소중한 보물입니다…. 답례로… 여러분께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때 그가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건네준 것이 이 기계였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보물입니다. 번갈아 관리하며 보존하고 있죠. 이름은 '필름은 이제 없다'입니다." "네?" "그게 이름?" 키노와 에르메스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그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흐응, 그렇게 된 거구나. 그래서 그건 어떻게 사용하나요?"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조사해서 알아냈습니다ㅡ. 이 둥근 쪽을 누군가에게 향합니다. 그럼 이걸 들고 있는 사람은 작은 창을 통해 그 모습을 그림처럼 볼 수 있습니다. 통을 돌리면 그림이 뚜렷해지죠. 정말 놀라운 물건입니다." "흐음." "그리고?" "오른쪽 끝에 있는 단추를 오른쪽 옆으로 움직입니다. 손을 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럼 그 근처에 있는 툭 튀어나온 부분을 딱 한 번 누를 수 있게 됩니다. 두 분께 한 번 해봐도 될까요?" "좋습니다." "오케이ㅡ." 허락을 받은 카메라를 든 사람은 오른쪽 눈으로 파인더를 통해 키노와 에르메스를 바라보며 셔터를 눌렀다. 찰칵. 느릿한 금속음이 들려왔다. "지금 튀어나온 부분을 누르고 있는 동안 여행자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ㅡ." 그가 기쁜 듯이 말했습니다. "저는 여행자님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으잉?" "이건 말이죠, 머릿속에 그 그림을 스윽 넣어주는 장치입니다. 오른쪽 눈에서 머릿속으로 여행자님들의 그림이 들어와서 기억에 똑똑히 남는 거죠. 그러니까 전 멋진 추억을 머릿속에 넣어뒀다가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는 겁니다. 한순간 사라지는 건 그 때문이죠." "아…, 그렇군요." 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부탁이 있습니다. 키노 씨와 에르메스 씨를 추억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이 기계를 사용해도 될까요?" 키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좋습니다. 여러분도 함께하지 않으실래요?"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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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키노와 에르메스는 곧 커다란 병원 앞에 도착했다. 현관문 앞에는 간호사 몇 명이 배웅을 나와 있었다. 길에는 검은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마침 운전사가 자동차 문을 열었다. 키노는 자동차 뒤에 에르메스를 세우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축복하는 목소리에 감싸여 병원에서 부부가 나타났다. 젊은 부부는 웃고 있었다. 남편은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었고 아내는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부부는 신세를 진 간호사들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한 후 웃는 얼굴로 간호사 몇 명을 끌어안았다. 차로 걸어가던 두 사람이 키노와 에르메스를 발견했다. "어머나, 여행자님! 보세요! 겨우 셋째가 태어났어요!" 아내가 활짝 웃으며 바구니 속의 아기를 보여주었다. "그렇군요…. 축하드립니다." 키노가 일단 그렇게 말하자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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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물음에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빨리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두 아이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먼저 얼굴을 보여줘야죠!" 아내가 대답했다. 그리고. "센터는 그 다음에 갈 거예요." 제1화 정의의 나라 ㅡIdiotsㅡ 바다와 초원 사이를 한 대의 모토라도(주: 이륜차. 하늘을 날지 않는 것을 가리킴)가 달리고 있었다. 하늘에 구름은 없었다. 하늘 꼭대기에서 내리쬐는 강한 햇빛 아래 맑고 푸른 대해원이 수평선까지 펼쳐져 있었으며, 좁고 하얀 모래사장을 사이에 끼고 초록색 대지가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었다. 하얀 길은 마치 계산해놓은 것처럼 남북으로 곧게 뻗어 있었고 모토라도도 남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고 있었다. 모토라도는 뒷바퀴 옆에 검은 상자를, 위에는 가방을 싣고 있었다. 연료통과 음료수 통도 침낭과 함께 로프로 묶여 있었다. 모토라도는 모래사장과 초원의 경계에 있는 길을 달렸다. 운전사인 젊은 인간은 하얀 셔츠와 까만 조끼를 입고 있었다. 챙과 귀를 덮는 속대가 달린 모자를 쓰고 여기저기 벗겨진 은테 고글을 쓰고 있었다. 허리에는 굵은 벨트를 매고 있었고 오른쪽 허벅지에는 리볼버 타입의 핸드 패스에이더(주: 패스에이더는 총기. 이 경우에는 권총)가 홀스터에 꽂혀 있었다. 허리 뒤에도 자동식 패스에이더 한 자루를 옆으로 눕혀 차고 있었다. 길을 보고 있던 운전사가 문득 시선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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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지평선과 수평선 너머에 검은 구름이 펼쳐져 있었다. "아, 저쪽은 어둡네. 웬일이람." 모토라도가 말했다. 운전사가 대답했다. "이제 조금은 시원해질까?" 다음 날 아침. 모토라도 한 대가 회색 하늘 아래를 달리고 있었다. 어제까지 온통 푸른색이었던 하늘은 회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동쪽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은 간신히 위치를 알 수 있을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초원도, 모래사장도 어두컴컴했다. 하늘의 색을 충실히 비추고 있는 바다는 마치 엷은 먹물을 떨어뜨린 것 같았다. 운전사는 어제 입었던 조끼에 소매를 단 검은 재킷을 입고 있었다. "잘됐네, 키노. 시원해져서." 모토라도가 운전사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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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라고 불린 운전사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왜 낮인데 이렇게 어두운 걸까? 구름치고는 이상해…. 왜 그런지 알아? 에르메스." 모토라도에게 그렇게 물었다. 에르메스라고 불린 모토라도가 대답했다. "아마 어딘가 멀리서 화산이 분화한 것 아닐까." "화산? 그럼 화산재란 말이야?" "조금 달라. 화산재는 무거워서 비교적 금방 가라앉고 지표면에 쌓이거든. 하지만 아직 그런 건 보이지 않는걸. 그보다 가벼운 물질이 부유분진이 돼서 하늘 높은 곳에 모여 있는 거야. 바람을 타고 아주 먼 하늘까지 뒤덮어버린 거지." "흐응…. 그럼 이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려나?" '아마도. 분화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1년이나 2년, 좀 더 오래 계속될지도 몰라." 그 대답을 들은 키노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모처럼 따뜻한 곳에 가려고 했는데…." "변경하는 게 좋을지도 몰라." 모토라도 한 대가 회색 하늘 아래를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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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날. 키노는 코트를 입고 달리고 있었다. 검은 재킷 위에 갈색 코트를 입고 긴 옷자락을 양쪽 허벅지에 감아 고정시키고 있었다. 얼굴에는 밴대나를 감고, 모자의 속대를 내리고, 끝에 달린 끈을 턱 아래 묶고 있었다.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이제는 태양의 위치도 거의 알 수 없었다. 대낮인데도 바다와 초원의 세계는 글씨를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검은 바다에서 파도가 하얗게 부서졌다. 키노는 에르메스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길 앞쪽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키노, 안 되겠어. 가면 갈수록 어두워지잖아." 에르메스가 말했다. "그렇구나…. 가면 갈수록 어두워지는구나." 키노는 낙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ㅡ12권에 계속ㅡ

2020/03/07 09:26 2020/03/07 09:26

저는 저희 아빠 한테 십이년전에 간 이식 해드렸어요. 저희 아빠가 간이 안좋은건 알고 있었고 갑자기 입원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어도 이식을 할만큼 악화된줄은 몰랐는데 그상황에서도 아빠는 저한테는 말한마디 안했어요. 왜요? 저는 자식이니까요 이제 막 대학교 졸업했고 취직도 해야하고 결혼도 출산도 해야하는 어린 딸이고 귀한 자식이니까. 아빠랑 피를 나눈 자식이라 결과가 잘 맞을 확률이 가장 높아도 저한테는 비밀로 했어요. 결국 제가 알게되서 검사받고 수술했는데 많이 우셨대요. 솔직히 살고 싶은데 어떻게 자식한테 이렇게 하냐고 마음이 너무 아프고 속상하다고. 이게 정상적인 부모에요 ...그리고 그렇게 받았으면 어떻게든 관리하고 건강하게 규칙적으로 시간맞춰 약 먹고 자식한테 빚진 마음으로 살아야 해요. 근데 동생한테 그런 마음으로 살까요 어머님이? 그리고 보험은 잘 들어두셨죠? 동생 생활비 잘 마련해두셨대죠? 저희 아빠는 전부 잘 마련해두셨어요. 그래서 아빠랑 저 병원에 있는 동안 힘들지 않았고. 저는 열흘만에 퇴원했어도 정말 체력이든 뭐든 정상인처럼 살려면 일년은 걸린것 같아요. 배 수술부위에 감각은 몇년 더 지나니 돌아온거 같고요. 암튼 일년 가까이 체력 회복하고 지낼동안 백수로 있어도 힘들지 않게 금전적 지원 해주실수 있는지? 앞으로 동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동생앞으로 마련해둔 돈은 있는지. 원래 ㅇ식받으면 얼마를 주는게 있다는데 자식이니 당연히 더 미래 걱정되는 마음에 준비 해두셨겠죠? 저희 아빠도 저 혹시 잘못되서 취직 못하거나 오랫동안 힘들까봐 미리 제 앞으로 마련해준 돈이 있었어요. 글쓴분 어머니는 본인 살겠다고 동생한테 간 빼갈 생각은 하면서 간을 주고 난 후 자식이 혹시 회복기에라도 잘못될걸 대비할 생각은 하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본인 보다 살 날이 더 긴 자식인데 당장 자기생각에 자식이 겪을 부작용이나 당장 퇴원후에 회복기조차 준비를 안해놨을거 같아요.

2020/03/07 09:26 2020/03/07 09:26